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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Nov 20. 2023

산울림 - 아마 놀랄 거야, 깜짝 놀랄 거야

[너.들.이 07] 세대마다 산울림이 퍼진다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07 산울림


너들이 연재를   려고 하다가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끊겼다기보다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요절한 음악가들의 연작을 하고 나니 생각들이 버겁기도 하였고, 그들의 음악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세상은 넓지만 ‘창작의 세계 생각보다 좁아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마주하였다. 거기에 더해 메인에 한국 대중음악 대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놓으라 하는 저명한 비평가들의 글이 덮고 있으니. 솔직히 글을 쓰고자 하는 시동을 거는 일은 버거웠다.


그러던 시간 중에 귓가에 자꾸 맴도는 노래가 있었으니, “내가 고백을 하면 아마 놀랄 거야, 깜짝 놀랄 거야”라고 고백 강요하는 노래, ‘산울림’의 음악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해 보니, 산울림과 그 밴드의 중심에 있던 ‘김창완’을 이야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눌 음악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심한 생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산울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본다.


산울림 로고 (사진=나무위키)



동요인지 가요인지? 록인지 포크인지?


‘좋은 노래’라는 것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나름일 수밖에 없다. 곡의 완성도가 높아 음악 자체로 평가를 받을 수도 있고, 노래를 전달하는 가수와 보컬의 능력으로 이야기되기도 하며, 가사와 형식의 파급과 감동에 대한 느낌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그런 기준으로 볼 때 1975년에 나타난 ‘산울림’이라는 밴드는 이상한 음악 그룹이다. 초창기 음악은 당시 혁명적인 음악으로 다가선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데뷔 앨범의 충격을 흡수하고, 신중현이 펼쳐 놓은 록 음악의 서곡을 마음껏 누려 연주한 아마추어들의 반란이었다.


산울림의 데뷔앨범을 섹스 피스톨스와 연관시키는 이유는 흔히 두 가지를 든다. 우선 발매를 같은 해에 했으며, 아마추어리즘이 가득한 편곡과 연주로 주류 프로의 세계를 흔들어 대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외피적인 평가에 그칠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면을 누락시키거나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면 제법 심오하다. 산울림의 앨범은 정치적, 사회적 이념과 신념은 물론 미학적이고 음악적인 이론가들의 채점표로부터도 이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은 소위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포장된 신념’으로부터 관계를 설정하기 난해하다. 아니 오히려 무관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음악도 초창기는 사이키델릭 록의 음악 문법을 따라가는 듯했지만, 4집부터는 포크의 정수를 보여 주는 모습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팀의 주축이 된 김창완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동요’의 알맹이를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다. 음악의 원초적 기능은 정서 함양에 있다. 이 기능에 가장 충실한 노래가 동요다. 사고의 전복이나 이념의 주장 따위의 ‘불순물’이 끼어들 수 없는 장르이다. 반대로 사이키델릭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여러 명상과 종교의 영향, 그리고 각종 전자 악기들의 편성 등으로 대표되는 ‘어른’의 음악이다. 이처럼 산울림의 음악 스펙트럼은 그저 ‘넓다’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다.


재 결성 후 (사진=노컷뉴스)


끝까지 형제밴드로 남은 전설


1975년부터의 대한민국 음악계는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독재 정권의 ‘가요대정화운동’과 더불어 그로 인한 ‘긴급조치 9초’, ‘대마초 파동’으로 기존의 음악인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더 이상 음악 활동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의 새로운 음악 주류였던 록 음악과 시대의 저항정신을 느끼게 하는 포크 음악은 철저하게 박해받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그룹이 삼 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이었다.


산울림은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 형제로 구성된 대표적인 한국의 록밴드다. 이들은 삼 형제가 서울대학교 2명(김창완, 김창훈)과 고려대학교 1명(김창익)이 진학한 가족밴드로도 유명했다. 산울림 형제들은 학창 시절 주말마다 방에 계란판 방음벽을 만들어 싸구려 악기로 자신들의 자작곡을 연주하며 지냈다고 한다. 1977년 MBC에서 대학가요제를 개최한다고 해서 '무이(無異, 평소와 다름없음)'라는 밴드를 결성해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다. 당시 둘째였던 김창훈은 ‘샌드페블즈’의 5기 멤버였는데, 형제 밴드에 합류하기 위하여 자작곡 <나 어떡해>를 샌드페블즈 6기들에 주고 나왔다.


그들의 어린 시절 (그림=GQ)


1977년 1회 대학가요제의 비화가 여기에 숨어 있다. 당시 예선에서는 형제 밴드 무이의 <문 좀 열어줘>가 1위,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가 2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맏형 김창완 때문에 규정 위반 탈락을 하였다. 바로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규정이 있었는데 김창완은 1975년에 졸업한 졸업생이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로 본선에서는 샌드페블즈가 <나 어떡해>로 대상을 받게 되었다. 아쉬움이 없겠냐마는 각자 사회생활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추억을 위해 서라벌 레코드에 데모 테이프를 건네고 기념 앨범을 제작하고자 하였다. 당시 리코딩 비용만 2~300만 원이나 들어 고민했더니 서라벌 레코드사에서 무료로 녹음을 해 주겠다고 제안하여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 앨범이 1집 <산울림의 새 노래 모음>이다.


당시 150곡 정도의 자작곡을 엄선하여 레코드사에 가져다준 것만 해도 대성공이었고, 레코드사가 무료로 녹음해 주겠다고 하며 그룹 이름도 ‘산울림’이라 지어 준 것도 행운이었다. 거기에 더해 당시 싸구려 노브랜드 악기를 쓰던 시기여서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기타의 줄이 풀려 조율 불가가 되자, 근처에 있던 음악 평론가 이백천 씨의 도움으로 펜더사의 스트라토 캐스터 기타와 이펙터를 빌려 녹음한 그야말로 ‘아마추어’의 음반이었다. 그러나 발매된 1집 레코드판이 40만 장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이 음반은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5위에 뽑혔다. 참고로 6위는 산울림 2집이다.


그 후 형제들은 전업 음악가의 길을 가는 맏이 형과 함께 동생들이 호응했지만, 중간에 둘은 군대도 다녀오게 되고, 취업도 하게 되며 1986년 잠정 해체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2000년대 초반 신해철을 중심으로 산울림의 음악을 재조명하고 재결성에 대한 노골적인 대중들의 요구를 받아 형제들이 다시 뭉치게 되었다. 이렇게 내놓은 앨범이 산울림의 13집이다. 이 앨범은 1~3집의 초기 감성으로 회귀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마침 국내 인디 음악씬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던 시기였다. 인디씬의 특징은 차가운 세태 비평의 관조와 혁명가의 낙관이 얽히고, 아마추어적인 음악과 어린아이 와도 같은 노래들이 조명을 받던 시기였다. 70년대 산울림의 노래가 2000년대에 독립 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이때 내놓은 노래가 <기타로 오토바이 타자>와 <무지개>다.


마지막 콘서트 (사진=민중의 소리)


2008년 1월 29일 드럼을 치던 막내 김창익이 캐나다에서 사고사로 세상을 떠났다. 눈길에 지게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지게차에 깔려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 이에 따라 김창완은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이렇게 떠나 버린 이상 예정되어 있던 것 이상의 산울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산울림은 해체하고 긴 전설의 막을 내렸다. 산울림은 처음 시작과 그 끝이 형제들의 놀이터이자 가족들의 음악이었으며, 아마추어들과 언더그라운드 인디들 희망의 서주로 남았다.

   


황무지에 주단을 깔고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산울림 활동 당시의 상황은 그야말로 전쟁 후의 황무지 같았다. 이런 풍조에서 산울림의 노래는 흔히 오해받는다. 바로 ‘시대정신’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는 그 많은 산울림의 노래를 다 들어 보지 못한 섣부른 비평일 가능성이 높다. 산울림은 활동 당시 유난히 심의 태클을 많이 받은 밴드다. 당시는 악보 검열, 가사 검열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1집의 모든 곡이 심의에 걸렸다. 이유가 퇴폐미가 있고 가사가 너무 슬프다는 이유였다. <아니 벌써>의 경우 가사를 통째로 다시 쓰기도 하였다. 개작 전의 가사가 전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매우 우울하고 비관적인 염세적 가사였다고 김창완은 회고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3집의 <황무지>는 <내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갈아 끼웠다. 김창완이 만든 리마인드 앨범에는 <금지곡>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다. 지금 김창완과 산울림의 몇몇 대표곡을 떠 올린다면 그 곡들이 모두 ‘검열의 필터’를 통과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을지도 모르겠다.


산울림은 1970년대에 아마추어로 시작하여, 다양한 장르로 가요계의 넓고 긴 황무지의 시대를 버틴 존재다.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김현식, 유재하 등이 배출되고 동아기획과 하나뮤직의 성과로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 오버그라운드까지 올라와 대중음악 생태계를 형성하기까지 약 10년간의 한국 록, 포크 음악의 암흑기를 채워준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음악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표절이나 영감의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하는데, 산울림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평론가 박은석 씨의 평가로 기억하는데.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은' 밴드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당시의 기술적 상황이나 환경이 누군가의 영향을 받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기에는 멋스럽거나 쉬운 음악들이 아니었다. 전성기가 한참 지나서 2000년 전후로 유행한 인디 밴드들이 산울림의 영향을 받은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아마추어리즘니 가장 독특한 것을 만들다 (사진=나무위키)


명반으로 꼽히는 2집을 1집 완성 후 4개월 만에 내놓았다. 역시 ‘파격과 혁신의 메아리(임진모 평론)’로 소리를 내지르며 커다란 산울림을 자아냈다. 이 산울림은 2집이 나온 지 6개월 만에 발매된 3집의 ‘그대는 이미 나’로까지 이어졌다. 초기(1~3집)에는 펑크 록 느낌의 디스토션이 강한 공격적인 음향을 자주 보여주었다. 어떤 평들에서 영미 록의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의 장르 영향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사실 잘 들어 보면 어느 족보에도 속하지 않은 독창적인 진행과 구성을 알 수 있다. 어떤 조류나 선대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음악, 굳이 분류하자면 ‘개러지 록’의 얼터너티브 사운드에 가깝다고 할까.


실제로 당시부터 지금까지 만연한 스쿨밴드의 ‘카피 연주’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작곡에 심취하여 자신들의 곡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리고 그들의 부족한 연주실력과 장비도 그 독창성에 한몫하였다. 프로그레시브와 사이키델릭의 중심은 신시사이저라는 전자 건반악기인데 고가의 장비였다. 그리고 삼 형제 중 건반을 다루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한국의 음악은 ‘샘플링’을 버젓이 창작이라고 우기는 추세다. 이들에게 진짜 예술가의 창작이란 무엇인지 되새겨 줄 이야기들이다.


초기의 음악은 ‘록’이 자리 잡았다. 이 산울림이 메아리가 되어 80년대 중반부터의 한국 록 전성기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부족한 연주를 감추기 위한 방법이 이펙터를 세게 쓰는 것인데, 디스토션과 딜레이, 에코를 빵빵하게 주는 음악은 결국 한국 헤비메탈의 시조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21세기 초반의 인디 밴드들의 음악에서 산울림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떤 음악에도 영향받지 않았으나 후대의 록 음악가들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동생들이 군대에 가자, 산울림은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어서 멜랑꼴리한 포크 노래와 드라마 영화, 연극에 쓰였던 주제곡들을 묶어 4집을 내었고, 동생들이 휴가 나온 사이 5집을 만들기도 하였다. 6집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동생들이 제대하고 같이 만든 7집의 <청춘>, 8집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와 같은 대중들 정서에 맞는 히트곡들을 내었다. 실험정신은 조금 걷어 내고 대중성을 얻은 듯하지만, 중기와 후기의 산울림은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음악을 넘나들었다.


초기의 모습 (사진=위키백과)


산울림의 음악은 <산 할아버지>, <개구쟁이> 같은 동심을 부르는 노래부터 <먼 나라 이야기> 같은 세태 비판의 목소리, 그리고 <독수리가 떴네!> 같은 환경 등 민감한 이슈에 대한 노래들이 담겨 있다. 김창완도 <첫사랑 광주야> 같은 노래로 민주주의와 사회의 상식에 대한 메시지를 꾸준히 전하기도 하고, 김창훈의 경우 친일파들과 일제 강점기 부역자들의 시는 노래로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순수’로 가려져 있다고 해서 시대와 타협하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오명은 성급한 판단일 수밖에 없다. 음악으로나 음악의 행보로나, 황무지 같은 시기를 버티고 채워 한국 대중음악의 연보를 이어준 소중한 존재임은 틀림없다.

   


새는 알을 깨기 위해 투쟁한다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사랑 타령은 아니다. 건반 주자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풍금 소리처럼 또박거리며 한음 씨 짚어 준다. 일그러지고 뭉개진 기타의 톤과 엄청나게 증폭된 극적인 사운드는 심장의 우심실과 좌심방을 자극한다. 가장 어렵다는 변박이 없는 드럼의 전진은 마치 수도자의 정진과 같고, 묵직하지만 유연한 베이스는 정직한 드럼 박자에 그루브를 더한다. 산울림의 정수를 경험하고 싶다면 1집 앨범을 추천한다. 산울림의 도입부는 지금의 음악들이 포기한 정서의 빌드업이 있고, 지금 샘플링되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구성이다.


산울림의 음악은 포크 음악의 구도와 명상에 대한 강박과 신화가 되고픈 록 음악 혁명의 아집을 벗어던졌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새롭다. 새롭고 독특한 것을 하겠다는 의도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모순도 아니다. 지금 우리의 음악이 앞부분의 1분에 너무 많은 전략과 욕심을 쏟아 놓아 나머지 3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음악들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후반의 3분이 아닌 진짜 음악일지도 모른다.


'산울림이 전설? 전설이 되기 참 쉽네요. 하하하." (사진, 인터뷰=엑스포츠 뉴스)



1.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예쁜 촛불로 그대를 맞으리
향그러운 꽃길로 가면 나는 나비가 되어
그대 마음에 날아가 앉으리


지금 세대에게는 ‘주단’이라는 말도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어머니 손을 잡고 시장통에 가면 ‘주단 집’에 들려 설빔과 예단을 맞추던 시절이 떠오른다. 4개월 만에 내놓은 2집의 대표곡이자, 산울림의 대표곡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도입부의 전주는 단순한 반복이 설렘을 준다. 그 전주가 마치 주단을 깔아 노래를 맞이해 주는 느낌이랄까.


https://www.youtube.com/watch?v=Od2zhI92gug



2. 청춘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응답하라 1988>에 김필이 불러서 다시 유행시켰다. 이 노래는 구슬픈 포크 곡이다. 그 구슬픔 끝에 묘한 결심이 선다. 아련함의 끝에는 무언가 모를 또렷한 결심이 서는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는 이 노래는 1981년 7집에 수록되었다. 청춘이 지나야 청춘을 귀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시간의 이치가 아닐까.


https://www.youtube.com/watch?v=cg6gfsdlzBQ



3. 내 마음 (내 마음은 황무지)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놓은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3집에 수록된 곡이다. 제목 때문에 검열에 걸리고 가사를 많이 덜어내었다. 황무지를 사랑으로 곱게 만들었다는 가사인데, 황무지라는 가사 자체가 군부에는 마음이 들지 않았나 보다. 1998년에 신해철이 영화 <정글 스토리>에 리메이크하여 사용하였다. 단 이 리메이크곡의 도입부는 원곡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그 이유는 아무리 연주해도 이 느낌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황무지에 꽃을 피우려는 마음으로 음악을 나누어 본다.


https://youtu.be/ujyKkXmtrRQ



4. 너의 의미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슬픔은 간이역에 코스모스로 피고
스쳐 불어온 넌 향긋한 바람
나 이제 뭉게구름 위에 성을 짓고
널 향해 창을 내려 바람 드는 창을 접기


이른바 ‘히트곡’이다. 아이유가 리메이크하여 한 번 더 히트되었다. 노랫말이 참 예쁜 노래인데, 사실상 두 동생이 참여하지 않은 김창완 솔로의 앨범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간절한 마음과 함께 움트는 의구심들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수수께끼로 와서 숙제가 되니까.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는 김창완 아저씨에게도 그런 날은 있었다.


https://youtu.be/0TAY6q_L5Iw


  


5.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에 옛 향기가 난다니. 참 셈나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아련한 추억과 힘겨운 기억은 공존하는 것. 그런 날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은 잘못도 후회도 아니다. 그저 어렴풋이 옛 생각의 향기가 찾아들 뿐이지. 그런 노래 함께 들어 본다.


https://youtu.be/9QmSr0DUvM0


· 참조:
* 대중음악 100대 명반, 5위 산울림 ‘산울림 1집’ - 박은석/ 경향신문
* 산울림 - 임진모/ 네오뮤직 커뮤니티
* 황무지에 울려 퍼진 산울림, 또는 산울림의 독백 - 김창훈 인터뷰/ 웹진 Weiv
* 그리고,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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