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들. 이 04] 짧은 내 사랑 영원히 내 곁에
가객(歌客)이라는 말은 예전에 시조나 창을 잘하던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가객은 동호인 집단을 만들어 서울 주변의 승지를 돌아다니면서 가창을 하기도 하고 사대부나 부호가 주최한 연회에 불려 가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노래하는 손님, 여행자"라는 가객(歌客)이라고 불린 듯하다. 부호나 유지들이 후원자가 되어 가창을 하던 유래에서 풍류의 예인으로 존중받은 것으로 보인다.
시대 흐르면서 이들은 유흥적인 분위기를 주도하였으며, 그들의 생활 자체도 소비적·향락적으로 기울어졌다. 그 결과 흔히 "딴따라"라는 폄하적인 평가의 직업과 인생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가객"이라는 단어는 양가적이다. 노래를 얼마나 잘하면 이곳저곳에서 초빙하는 수요가 많을까 하는 재능에 대한 찬사도 있지만, 반면에 유흥과 향락을 조장하고 그것으로 업을 삼는다는 비난도 있는 것이다.
"가수"라는 직업의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대중음악계에서 노래하는 사람을 흔히 "보컬리스트"라고 이른다. 어미(-ist)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목소리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밴드에서의 역할을 말하는 용어였다. 기타(guitar)를 연주하는 기타리스트(guitar-ist), 베이스(bass)를 연주하는 베이시스트(bass-ist), 보컬(vocal)을 연주하는 보컬리스트(vocal-ist). 그렇지만 실용 예술에 사용되는 용어들이 그러하듯이, 여러모로 모호한 의미로 확장되었다.
보컬리스트는 노래하는 사람을 말한다. 영어의 'singer'라는 단어와 그 쓰임새의 경계가 모호하다. 원래의 뜻인 "밴드의 목소리"라는 의미보다 '솔로 활동을 하는 singer'라는 인식이 강하다. 단독으로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가수"들을 통칭한다. 그러나 "한국의 최고의 보컬리스트는 누구?"라는 질문에는 금방 답을 내기가 쉽지 않다. 그저 "가수"라는 영역에 있다고 '최고의 보컬리스트'라는 수식을 부여하기엔 부족하다. 그때는 본연의 의미인 "목소리가 악기가 되는 사람"으로 국한 지어진다.
한국의 보컬리스트에 대한 평가는 저마다이겠지만, 목소리가 명기가 되는 아티스트로 좁혀 본다. 남자 싱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떠 오르지만, 딱 세 사람을 꼽아 보라 한다면, 임재범과 이승철, 그리고 '영원한 가객'인 김현식을 들고 싶다. 그중 한 명을 들라고 하면 단연 김현식이다. 오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영원한 가객이자 외로운 블루지 록커였던 김현식의 음악인생이다.
겨울; 미완의 명작, 1집 '봄여름가을겨울'
어린 시절 김현식은 외로운 아이였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이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다소 엄격한 가풍으로 당시 시험을 치르러 진학한 보성 중학교에 전체 4등으로 입학하였다.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니라, 아이스하키와 기타 등 다재다능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처음에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다시 공부로 진학을 꿈꾸었으나, 이미 다양한 분야에 신경을 두루 쓰느라 당시 최고 명문이었던 경기고에 낙방하고 방황하고 말았다. 그러자, 기타를 치며 음악으로 자신을 위로하던 그는 곧 명지고에 입학했다.
명지고는 당시 밴드부가 유명하여 주위에 소문이 자자하게 난 터였다. 이런 이유로 명지고에 입학한 그는 후 바로 밴드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 공식 스쿨밴드는 늘 한계를 지니기 마련인 시대였다. 김현식도 밴드부에서 그의 음악적 욕구를 채우지 못했다. 아무리 노래를 로버트 플랜트처럼 잘하고 기타를 지미 페이지같이 쳐 대도, 1학년이 하는 일은 잔심부름과 숱한 집합뿐이었다. 어느 날 트럼펫을 몰래 불다가 걸려 선배들에게 구타당하다가 주먹다짐으로 번졌다. 그 후 밴드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밴드부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온 집안 몰래 그는 고교를 중퇴했다. 학교 가는 시간에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면서 무명 통기타 가수들과 친분을 쌓았다. 종로에서 통기타 가수로 경험을 쌓다가 명동까지 진출하였다. 이장희의 동생 이승희와 듀엣을 하며 언더그라운드에 제법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승희와 헤어지고 혼자 활동하던 중 김동환이 찾아와 듀엣을 제안했다. 진짜 음악을 하자는 것이었다. 둘의 듀엣도 금세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사촌 형의 소개로 당시 유명 DJ 앞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 DJ가 개그맨의 시조새 전유성이었다. 전유성은 그의 노래를 듣고 음악다방에만 머무르기에는 아까우니 전업 가수가 되라고 강권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떠돌며 가수로서 길을 내려고 노력했다. 이미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 한영애 등 선배 보컬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내었다. 검은 나비, 동방의 빛, 신촌블루스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쯤 이장희가 진행하던 최고의 인기프로그램 <0시의 다이얼>에 초대가수로 출연하여 그들의 노래를 불러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방송에 소개되는 등 유명해지기 시작해 1978년 정식 데뷔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현식은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8개월간의 옥살이 시련 이후 그는 다시 무대에 서면서 더욱 열심히 노래하겠다 다짐의 다짐을 했다. 이때부터 자신만의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매일밤 곡을 다듬고 정리하며 음악에 빠져 살았다. 김현식이 작곡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이장희가 서라벌레코드사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장희도 대마초 사건으로 가수 생활이 전면으로 막혀 후진의 양성을 위해 여러 재목들을 찾던 중이었다.
음반 리코딩을 다 끝마치고도 앨범이 바로 나오지 못했다. 음반사 측이 대마초 사건의 여파 등을 염려해 발매 시기를 늦추고 늦추다가 2년이 지나서야 정식 발매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당신의 모습>을 타이틀로 한 "김현식 1집"이다. 그러나 그의 데뷔 앨범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못했다. 의욕은 넘쳐 있지만, 그 의욕만큼 완성도가 나오지 못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1집 앨범을 발표하고 영일레븐 등 몇 번의 방송 출연을 하고 또 서라벌 소속 가수들과 군위문공연과 해변공연 등을 다니면서 가수로서 활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야간통행금지로 업소등 가수들의 무대가 축소되면서 김현식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게 되었다.
80년 12월에 발매(정식 발매는 81년 5월)된 1집 앨범에는 김현식이라는 뮤지션에 대한 상징적인 곡이 있다. 바로 <봄여름가을겨울>이다. 들어 보면 다 알만 한 이 노래는 김현식이라는 개인 뮤지션은 물론, 한국 대중음악사적으로도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곡이 된다. 펑키 스타일의 이 곡은 한국 대중음악 밴드의 선구자였던 70년대 "사랑과 평화"의 디스코 펑키를 이으면서도 80년대부터 90년대 까지 정점을 찍는 팝스타일의 가요를 존재하게 해 준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지금 들어도 그 스케일과 진행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의 1집의 타이틀이 되는 뛰어난 음악이었지만, 그만큼 연주가 참 힘든 곡이다. 이 곡을 제대로 완주할 수 있는 음악 그룹은 당시 최고의 세션들이 모인 "사랑과 평화"가 유일하였다. 리코딩 시 그들이 세션을 맡아 주었지만, 정작 20대 초반의 김현식은 그 기에 눌려 본래의 매력을 발산하지 못한 채로 리코딩이 되었다. 그래서 1집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어설픈 미완성품이 되었다.
그러나, 김현식에게는 이 아픈 손가락이 골든 핑거가 되었다. 바로 "밴드 음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2집을 준비하면서 그는 밴드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2집 성공 후 라이브 레퍼토리의 하이라이트에 이곡을 넣으면서 스스로 완성시켰다. 그에게 이 노래는 그의 음악을 대표하는 거대한 팡파르가 되었고, 그가 결성한 빅밴드의 이름마저 "봄 여름 가을 겨울"이었다. 그 밴드의 기타 세션이었던 김종진이 분가한 밴드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로 유명한 김종진, 고 전태관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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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강산에 꽃이 피고
여름이면 꽃들이 만발하네
가을이면 강산에 단풍 들고
겨울 오면 아이들의 눈 장난
김현식은 1집의 실패로 심한 허탈감과 외로움으로 지쳐갔다. 1982년 우연히 들른 신촌의 옷가게에서 부인을 만나고 아들을 낳으며 새로운 의지로 안정을 찾았다.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피자가게를 열어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이내 곧 프랜차이즈들의 공습으로 투자금조차 건지지 못했다. 그는 밤무대를 도는 뺑뺑이 가수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절이 아주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피자 장사 시절은 가족과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세종호텔, 하얏트호텔 나이트 등에 서면서 그는 서서히 그룹사운드, 밴드 음악에 대해 갈망하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사운드를 내는 유기체인 밴드는 음악을 해 본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또한 호흡을 맞추게 되었을 때 음악과 노래는 더욱 완성도를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힘든 상황이지만 김현식의 음악적 성숙이 더해가고 있던 시절 전설의 동아기획 김영 사장이 영입을 했다. 1984년 10월 기획사의 지원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펼치겠다는 생각으로 2집 '사랑했어요'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해 대중들에게 타이틀곡 <사랑했어요>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앨범 발매 1년쯤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역주행으로 앨범 판매까지 이어졌다.
1985년 당시 최고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에 초대되었을 때 <사랑했어요>와 <바람인 줄 알았는데>와 같은 노래들이 전파를 탔다. 이종환은 그를 가장 실력이 있으며, 특히 라이브에 강한 가수라고 치켜 소개해 주었다. 당시 라디오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후 빠르게 이름의 인지도가 상승되고 점차 대중들이 그의 음악과 목소리를 찾아 듣고 기억하게 되었다.
1집이 가수로서 음반을 내고 데뷔하는데 의미를 뒀다면, 2집은 한 명의 가수로서 이제 자신의 음악을 펼쳐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무척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음반은 그때까지도 별반 방송에는 관심이 없었던 내가 가장 선호하는 팬과 만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김현식의 넋두리 자서전 1990.7-
김현식의 인터뷰처럼 2집은 여러모로 그에게 매우 중요했다. 가정에서는 사업 실패한 아들을 둔 한가정의 가장이었고, 음악에서는 1집의 좌절과 4여 년의 공백을 딛고 극복해야 하는 도전이 남아 있었다. 당시 "팝 음악"이 적극 이식되면서 방송출연이 중요해지기 시작하였지만, 그는 방송이 자신과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일한 수단인 앨범의 성공이 절실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쏟아 내었다. 한곡을 제외한 모든 곡을 작곡하였다. 장르와 스타일도 다양하고 폭넓은 구성으로 채웠다. 벌판다방의 무명 통기타 가수 시절부터 당시까지의 그동안의 음악 경력과 영감을 쏟아부었다.
2집 앨범은 장르가 "백화점"이었다. 트로트, 블루스, 이장희 식의 발라드, 소울, 팝, 펑키 등 당시 음악 시장에서 통용되는 모든 스타일의 음악이 담겨 있었다. 트로트 스타일의 <사랑했어요>, <회상>은 세속적인 "흥행"을 위한 필살기였다. 팝스타일의 <너를 기다리며'> 블루스-소울스타일의 <바람인 줄 알았는데>, <어둠 그 별빛>, 통기타 포크스타일의 <당신의 모습>, <떠나기 전에>, 정통 블루스 스타일의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요>, 펑키스타일의 <변덕쟁이'> 80년대 초의 가요댄스풍의 <그대 외로워지면>등 당시 음악의 총체가 담겼다. 지금 들어도 어느 한곡을 뽑아내기 힘들 정도로 음반 자체가 명품이다.
이 앨범의 기념비적 성과는 "편곡"에도 있었다. 앨범 편곡자는 김명곤이었다. 김명곤은 김현식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영감과 사운드를 가장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 펼쳐진 다양한 장르에 김현식이 추구하는 근본 깊은 음악 세계를 매끄럽게 대중의 귀에 안착시켰다. 당시까지만 해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김명곤은 85년 초 나미의 '빙글빙글', 정수라의 '도시의 거리'의 성공을 시키는 등 가장 바쁘고 몸값 비싼 편곡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2집 타이틀곡 <사랑했어요>는 뽕짝이다. 곡의 작법과 코드 진행은 물론 가사의 서정성까지 한국의 전통가요 트롯의 문법을 따른 곡이다. 당시만 해도 트롯은 한국 대중가요의 중대한 타워였다. 김현식은 아마 "흥행"을 고민했을 것이다. 가장으로서 노래하는 보컬리스트로서 돈이 되는 음악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묘수가 트롯을 부르는 것인데, 이 곡이 묘하게 뽑아졌다. 트롯인데 블루지하다. 그 덕에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대표 흥행곡이 되었다. 유작 미완성 6집에도 수록되었다. 김현식의 미성과 탁성을 비교해 듣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의 인생이 목소리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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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 눈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1985년 <사랑했어요>은 대성공이었다. 음악으로 밥벌이가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김현식은 본격적이 "그룹사운드"를 실현하고 싶어졌다. 자신의 음악적인 진화와 완성을 위해서는 밴드 그룹이 필요하다고 밤무대를 거치면서 더 절실해졌다. 그러나 1집 당시 기성 그룹 "사랑과 평화"와의 경험이 작용했는지 젊고 새로운 인적 구성도 필수적ㅇ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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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김현식은 자신의 1집 노래제목을 딴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멤버 성원 없이 그룹 이름을 먼저 지은 것만 보더라도 그의 염원이 가늠해진다. 주위를 살피며 숨은 실력자들을 찾고 있었다. 그가 소속된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은 뮤지션의 방향성을 존중하고 스스로의 발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 결실로 김현식 등 소속 뮤지션들은 하고 싶은 음악을 펼칠 수 있었단 것이다.
그리고 그의 2집 성공을 통해 언더그라운드의 젊은 뮤지션들에게 음악적 깊이와 다양성이 소문이나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주변으로 실력자들이 모여들었다. 방배동 카페거리에서 연주를 하던 당시 고려대 재학생인 김종진을 캐스팅하고, 그의 추천으로 전태관을 영입했다. 그리고 소문난 조용필 밴드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 유재하와 3집 리코딩을 위해 접촉한 베이시스트 장기호 까지 모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86년의 김종진(기타), 전태관(드럼), 유재하(건반), 장기호(베이스)와의 "봄여름가을겨울>"이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함께 활동하며 3집 앨범을 열심히 준비하였다. 특히 김현식은 유재하에게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 그의 천재적인 풍부한 음악성을 보았으며 시대를 타지 않는 섬세한 감각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그에게서 보고 배우는데 이르렀다. 아끼던 동생 유재하가 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을 탈퇴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음악에 대한 방향성"이 간극을 벌렸다. 김현식 3집의 음악스타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에 밴드를 떠나고 말았다.
재하는 어느 날 우리 팀을 떠났다. '형, 미안해요. 하지만 형에게 암만 혼나더라도 이 그룹을 떠나야만 하겠어요'라고 말하고 그는 악기를 챙겨서 연습장을 나갔다. 지금도 그때 그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김현식의 넋두리 자서전 1990.7-
다른 밴드의 이별과 달리 그룹 탈퇴 후에도 김현식과 유재하는 좋은 형동생으로 남았다. 유재하의 솔로 앨범에도 있는 명곡 <가리어진 길>은 김현식 3집에 먼저 수록되어 김현식 목소리로 먼저 선보였다. 그리고 3집 발매 후 우여곡절 끝에 가진 홍대 앞 라이브 공연에 "환절기 멤버(소위 객원 멤버)"로 연주를 함께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재하의 빈자리에 건반 주자 박성식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새옹지마 격이 되었다. 바로 3집의 히트곡 <비처럼 음악처럼>의 작사, 작곡자였기 때문이다. 박성식은 후에 장기호와 팀을 떠나 "빛과 소금"이라는 퓨전 재즈 그룹을 결성한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1986년 12월 3집 "비처럼 음악처럼"을 발표한다. 2집은 생의 마지막처럼 모든 것을 쏟아내 다양한 음악 스타일로 그의 특유의 블루지한 창법의 각종 발라드들을 담았었다. 3집은 그와 결이 사뭇 달랐다. 젊고 새로운 멤버들과 세련미를 더하고 당시의 세계 음악적 트렌드를 차용해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김현식의 팝적인 발라드는 이후의 가요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련된 밴드 세션에 감각을 얹은 것이 한국 대중가요의 주류 "발라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후대의 뮤지션들이 김현식을 넘지 못하는 것 하나는 "블루스의 감수성"이었다. 그의 노래에는 슬픔과 외로움, 허망과 애절이 녹아 있었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러나 밴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시한부 같은 모태적 한계가 있었다. 당시 글로벌 음악, 특히 미국에서는 "퓨전재즈"가 대유행이었다. 후배들은 김현식과 함께 퓨전재즈가 가미된 펑키와 팝 음악을 원했지만, 김현식의 음악은 본성이 "블루스"였기에 갈등이 있었다. 유재하가 가장 처음 팀을 이탈했고 나머지 멤버들도 하나둘씩 자신만의 음악을 위해 각자의 길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 김현식은 3집 앨범에서 서로 간에는 음악성향의 접점을 찾으려 애썼다. 퓨전재즈식의 연주를 하되 블루스적인 감성을 유지하는 사운드를 만드는 절충도 보인다. 김종진이 작곡한 <쓸쓸한 오후>와 장기호의 <그대와 둘이서>가 그 대표적인 곡이다. 사운드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는 김현식이 추구하는 소리가 나왔기에 그들을 포기사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대로 정통 블루스 스케일의 연주가 버거웠던 김종진도 최선을 다해 <비처럼 음악처럼>의 블루지한 기타 솔로를 뽑아내며 선배를 존중했다. 3집은 이처럼 "타협의 결과"이지만 음악과 사운드의 완성도에서는 최고의 결과를 내었다. 지금 들어도 뒤처지지 않는 연주와 사운드 메이킹에 감탄이 나온다.
한국은 미국식 대중음악 장르를 스펀지처럼 흡수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정착시키는 음악의 민족이다. 그러나 딱 하나의 장르가 불모지였다. 바로 정통 블루스가 그러하였다. 처음 블루스 그룹사운드를 추구하다가도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1985년 이미 조용필과 들국화는 팝스타일의 록음악으로 새로운 감성을 제시했다. 당시로 보아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찬가이자 입장곡이 되었다. 그 결과 흥행에 대성공하게 된다. 김현식의 3집은 반대였다.
1986년 12월에 선보인 김현식 3집은 80년대의 감수성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 음악의 주제도 그때의 전유물이었던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기저에 깊은 블루스의 서정을 깔아 놓았다. 누가 보아도 "옛날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의 친밀하지만 격정을 누르는 목소리와 그것을 받쳐주는 세련된 연주와 사운드는 사람들의 본능적 감성을 자극하였다. 옛것으로 치부되던 사랑노래의 귀환이었다. 방송 출연 없이 3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김현식은 공연과 창작 작업에 몰두하며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는 늘 외로운 사람이었다. 음반이 잘되고 활동이 늘어나면 날 수록 외로움은 커져만 갔다. 의기투합했던 후배들은 음악을 이유로 그를 떠났고, 모친과 누이도 캐나다 이민을 가고, 부인도 아들을 데리고 별거에 들어갔다. 결국 다시 대마초에 손을 대고 87년 다시 사법 처벌을 받았다. 1년 여가 지나고 1988년 2월 63 빌딩에서 사죄의 "삭발 콘서트"를 진행했다. 그 공연에 힘입어 김현식은 다시 "재기"의 발판을 위해 노력하며 4집을 낸다. <언제나 그대 내 곁에, <사랑할 수 없어> 등 팝발라드로 채워진 이 앨범은 숨은 명반이다. 그러나 감각적이고 세련됨 보다 짙은 외로움의 어둠이 그의 음악을 덮고 말았다.
1988년 6월 그의 밴드멤버였던 김종진, 전태관의 "봄여름가을겨울"이 1집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를 발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현식의 세련된 사운드를 레거시로 퓨전재즈라는 트렌드를 입혀 김현식의 팬층까지 유입했다. 그리고 그해 변진섭, 이승철이라는 발라더들이 주류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사 효과로 김현식의 음악은 세련된 사운드라는 것보다 "우울한 음악"으로 기억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 세대에게는 그저 호소력 있는 감성만 남은 가수로 분류되고 말았다.
3집의 히트곡이자 지금도 연주되는 <비처럼 음악처럼>은 유재하의 후임으로 들어온 박성식의 곡이다. 박성식은 이 노래를 군악대에 복무하던 시절에 만들었다고 한다.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확실한 곡 전개의 하이라이트는 후반의 블루지한 하울링 스캣과 뒤 따라오는 기타 솔로이다. 김종진이 버거워했던 이유는 스킬이 아니라 이 블루스 토닉 스케일의 무거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비 오는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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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음악 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대한민국의 음악사에서 포크 뮤직, 통기타 뮤직은 아픈 손가락이다. 대학가요제에는 늘 포크 음악이 수상에 오르기 일쑤였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포크 음악은 힘을 잃는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포크 뮤직=저항 음악"이라는 인식이 짙어지며 정권의 노골적인 억압도 큰 이유가 되었다. 그러다가 80년대 중반에 이들은 새로운 방향을 잡아갔다. 바로 포크 록음악, 그룹사운드와의 결합이었다. 들국화도 처음 포크 음악을 하다가 팝적인 그룹을 선보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본으로 돌아가 블루스를 목표로 삼았다. 한영애와 이정선이 그 선봉에 섰다. 그리고 "신촌블루스"가 세상에 선을 보였다.
신촌블루스는 블루스 스타일을 좋아하던 통기타 계열 음악인들이 이정선을 중심으로 만든 밴드였다. 엄인호, 한영애, 정서용 등이 연대 앞에 위치한 'Led Zeppelin'에 모여 잼 형식의 공연을 가지면서 밴드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사실 의기투합한 팀이라기보다 블루스를 좋아하던 음악인들이 모여 일종의 자유로운 잼 콘서트를 하던 것이었다.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지자 동아기획에서 1988년 1월 '신촌 BLUES'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내었다. 이 앨범은 옴니버스 형식의 앨범이었다. 대부분 이전에 부르던 노래들을 새롭게 편곡하여 수록하였다. 이 앨범의 박인수의 <봄비>와 정서용의 <아쉬움>은 지금까지 잘 알려진 넘버이다.
이정선과 한영애는 1986년 말 김현식의 3집 앨범 발매 직후 가졌던 홍대 앞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후 김현식은 이정선, 한영애, 엄인호 등과 더욱 많은 시간을 갖게 되며 본격적인 블루스 음악을 하게 되었다. 김현식은 자신의 고향을 찾아 간 듯 서로 공감하기 시작했다. 봄여름가을겨을의 멤버가 떠나고 가족들마저 모두 떠난 상황에서 김현식에게는 마지막 준거가 되는 둥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김현식은 "신촌 블루스"의 김현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김현식은 자신의 4집 앨범 이후 이들과 계속 라이브에 함께 하더니 결국 앨범에까지 참여했다. 1989년 1월에 신촌블루스 2집 앨범 '신촌 BLUES '가 발표되었다. 이 앨범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가수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015B보다 앞선 객원가수의 시스템이 녹아 있었다. <골목길>, <황혼>, <빗속에 서있는 여자>등 블루스 명곡들이 리메이크되었다. 이 앨범으로 사람들은 신촌블루스를 하나의 그룹 밴드로 인식했지만, 사실은 느슨하게 연결된 음악 활동 집단이었다. 그럼에도 이 음반은 한국 블루스의 유일무이한 집대성이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정통 블루스의 흥행이었다. 그리고 송병준, 이영훈 같은 대작곡가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자마자 신촌블루스 멤버는 각자 솔로로서 갈길을 가기 시작하면서 해체되었다. 신촌블루스도 잼형식의 프로젝트 그룹이 아닌 엄인호의 사단으로 재구성되면서 그 음악의 결기도 흐릿해졌다. 김현식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가끔 상상을 해 본다. 신촌블루스가 김현식을 중심으로 지속되었다면 김현식은 "히든싱어"에 직접 출연하는 레전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골목길>은 김현식의 외로운 고백이었다. 함께 하자는 고백을 하지도 못한 채 말없이 돌아 서는 쓸쓸한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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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김현식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음악" 뿐이었다. 그는 다시 "재기"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단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총체적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문제는 술이었다. 주위의 걱정과 충고에도 불구 그는 술과 음악에 빠져 들었다. 건강이 버티지 못할 정도가 되어도 1989년 신형원, 권인하, 강인원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앨범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내었다. 영화보다 음악이 더 유명해지는 진귀한 현상도 맛보았다.
술과 병과 외로움과 싸우면서도 5집 앨범 '넋두리'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앨범의 타이틀이 말하듯 그의 음악과 인생을 반추하는 자전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당시 그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몸은 복수가 차 올라 올챙이 배를 보고 살쪘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미 간의 기능은 10% 정도만 남은 상태였다. 당시 그의 주치의는 술을 한방물만 더 막어도 죽는다고 경고하였지만, 그는 약보다 술에 의지하였다.
모든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6집을 준비하였다. 병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다가 주위의 항의를 받은 것은 다반사였고, 데모와 가이드 녹음 및 연습을 위해 병원에서 링거를 뽑고 도망친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는 앨범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90년 11월 1일 세른넷의 나이로 자신의 동부이촌동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6집은 미완이자 유작으로 남았다. 한 때 이 당시 가이드 테이프가 음악 동호인 사이에서 암암리에 돌았던 적이 있었다. 한곡을 미쳐 다 듣기도 전에 스톱 버튼을 누르곤 했다. 노래가 아니라 절규였다. 마치 늙어 외롭게 죽어 가는 맹수의 하울링 같았다. 병마의 고통, 마음의 외로움과 싸우며 마지막으로 남기고자 했던 노래는 그의 비명이자 아우성이 되었다.
그날에도 퇴원해서 녹음해야 한다고 말하고 아들 완제 걱정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서른넷 젊은 나이에 남긴 마지막 유언은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이정표로 남았다. 그 유작이 <내 사랑 내 곁에>를 타이틀로 담은 김현식 6집이다. 이 유작 앨범은 91년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을 받았다. 단지 완성도와 의미만이 유명을 떨친 것은 아니었다. 흥행도 그의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큰 성공이었다. 그해 말 크리스마스 캐럴보다 더 많이 울려 퍼졌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팝 포크 록의 전형적인 문법임에도 독특하고 특별했다. 익숙한 멜로디에 그의 마지막 호소 같은 보컬이 앉혀진 이 노래는 다시 "가객 김현식"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호출해 내었다. 다시 그의 음악들이 재조명받으며 숨겨진 명곡들이 다시 세상에 울려 퍼졌다. 그가 속한 동아기획의 마지막 히트작이 이 앨범이었다. 팝스타일의 다양한 음악 세계로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동아기획은 이 앨범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다음 해인 1992년 서태지가 등장한 것이었다. 가요계의 모든 흐름은 뒤집어져 버렸다.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는 80년대의 다양한 음악, 그리고 장인 정신의 마침표가 되었다. 이제 대중 가요계는 "작품"에서 "상품"이 대세가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듣는다면 그의 6집을 들어라. 끊어지는 호흡마다 이 긴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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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곳은 어디에
하늘에 있는 신에게는 천사들이라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 존재로 그저 신을 보필하는 임무만이 존재의 이유가 된다. 주품, 좌품, 우품 천사들, 케루빔과 세라핌들은 신을 경배하며 합창을 한다. 그들 중 신의 눈밖에 나거나 뜻을 거역하는 존재들은 날개를 꺾여 버리고 세상으로 추락해 버린다. 그들이 가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면 아마도 예술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김현식은 타고났던지 연습의 결과인지 몰라도 최고의 보컬리스트인 것은 틀림없다. 단지 음역대의 폭과 열창의 스킬이 최고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우주를 품어 내는 진정성과 섬세한 감성이 있어야 한다. 그의 음악 이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재기"이다. 쓰러져도 포기란 없이 일어 나서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외로움과 고뇌에 다시 쓰러진다. 날개를 잃은 천사의 비얘랄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외로움에서는 날아오를 수는 없었다.
김현식의 마지막 모습을 이런저런 경로로 듣게 되었다. 하얀 목폴라 니트를 입은 그의 부푼 배가 내가 본 마지막 그의 공연이었다. 호흡이 끊어지고 미성이었던 목소리는 탁성의 끝단에 와 있었다. 언제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던 그의 표정은 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검붉어진 그의 안색에도 불구 빛나고 있었다. 171Cm의 크지 않은 그의 모습은 무대에서 항상 거인이었다. 곡을 일일이 소개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음악적으로 완성도 높은 곡들 중 몇 곡만 더 거들어 보면서 그의 짧은 인생, 긴 음악의 이야기를 마친다.
김현식의 콘서트 레퍼토리에 단골이다. 김현식의 우주가 그대로 담겨 있는 노래. 자신의 우주를 책임 진 사람은 늘 나보다 어른인 것이다.
1집에 있던 미완의 곡을 3집에서 다시 매만져 수록했다. 후반의 후렴구가 제법 중독적이다. 지금의 작법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서사의 빌드업보다 본론이 부각되는.
한때 영화음악의 거물 송병준이 무명 시절 만든 노래이다. 노래에 서사가 있는 이유는 오롯이 김현식의 덕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이정선의 기타 교실"에 수록되어 한 때 스쿨밴드 레퍼토리가 되었다.
"윤상이 거기서 왜 나와?"라고 하겠지만, 윤상은 한 때 그룹 밴드에 들어 가려 무던히 애썼다고 한다. 그러나 무서워서 그만두기가 일쑤였다.
김현식의 유서와 같은 노래. 외로움을 걸러 내지 않고 호소한다. 극도의 슬픔은 외로움이다. 그냥 들으면 알게 되는 노래.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가 생각난다. 아마 습작이라 생각된다. 하모니카는 제약이 많다. 음역이 매우 좁다. 그리고 각 키와 장단조에 따라 악기가 별도로 존재한다. 그 안에서 조합을 이끌어 내는 선율이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김현식의 다재다능을 엿볼 수 있다.
1960년 동영 영화의 주제곡으로 유성기 녹음이 된 노래이다. 당시 전통 트롯에서 탈피한 블루스가 진한 곡이다. 1990년에 발매된 신촌블루스 3집에 김현식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가 수록되게 된다. 노래를 녹음했을 당시 김현식은 독한 양주 반 병을 마시고 1절을 녹음했는데, 힘에 겨워서 1절을 부르고 30분 정도 쉬다가 남은 양주를 다 마시고 노래의 녹음을 끝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2절 부분에서 술기운이 느껴진다. 그와 술, 그리고 외로움
*참고:
- 94년 여성동아 5월호 - 가수 '대장' 김영이 알고 있는 김현식 http://www.idongamusic.com/Star_Site/Kimhs/
-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김현식의 넋두리 자서전 19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