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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Nov 06. 2023

신해철 -아직도 꿈꾸는 민물장어의 샤우팅

[너.들.이 03] 천재가 아닌 둔재의 잡화상

난 그의 머릿결 사이에 숨어든 뱀 문신이 좋았다. 짧은 키에 엉성한 가창력, 그리고 재능 가득한 천재가 아닌 노력으로 만든 둔재의 음악은 내게는 음악이 아니었다. 청춘의 동반자가 <공일오비-015B>였다면, 그는 중년까지 걸어온 거리석 같은 존재였다. 혈기 왕성했을 때 광기에 달하는 저항의 분노를 내뿜었고, 나인가 들면서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신의 심지를 고추 세웠다. 그의 "Here I stand for you"라는 샤우팅은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주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마왕' 신해철에 대해서다.


신해철 (사진=KCA엔터테인먼트)


어린 소년 시절 나는 '예비 신학생'이었다. 소위 가톨릭 사제가 되고자 하는 소년들이 미리 준비하는 과정, '성소(성스런 부르심) 모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소년을 유난히 예뻐하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계셨다. 모친보다 연배가 많으신 그분은 늘 "스테파노 넌 좋은 신부님이 될 거야. 널 위해 기도할게."라며 응원과 격려를 주셨다. 그분의 아들의 꿈이 사제였지만, 외동아들이라는 이유와 '마귀 음악'에 빠져 그 꿈을 뒤로했다는 이야기도 거들어 주셨다. 그분은 나의 모친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고, 시간이 지나 군대에 다녀오고서야 그분이 '신해철 모친'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작고 여린 병아리는 알에서 투쟁해 세상으로


신해철은 방송에 나와 "어릴 적 꿈이 신부가 되는 것"이었다고 밝힌 바가 있었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 돌려 읽던 야한 잡지책을 들고 있던 자신을 보며, 이렇게 사악하게 물든 인간은 신학교에 갈 수 없다고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약사 출신 사업가 아버지의 덕으로 유복하게 자랐다. 집은 8 학군 끄트머리 잠실에 있었지만, 'in강남'을 위해 강남 중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더 끄트머리 오륜동에 이사 온 보성고등학교를 나왔다. 이 학창 시절의 인연들이 '무한궤도'와 '015B'로 이어지는 그의 음악 태동기의 리소스가 되었다.


88년 대학가요제 무한궤도 보컬 신해철 (사진=유튜브)


스스로 '수포자'라 인정하였듯, 0점에 가까운 수학 실력에도 서강대 철학과에 진학하였으나, 학사 경고 마지막 한 번을 남기고 잘리기 전에 스스로 명예로운 자퇴를 했다고 전했다. 추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진하였으나 거절한 바가 있다. '선동렬 방어율급 학점'으로 졸업이 불가능했고, 이미 뮤지션으로 자리를 잡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서강대는 '명문대의 스파르타'라는 명성이 자자하게 빡세게 공부시키는 대학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대학 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은 듯하다. 중간의 프로젝트 밴드 그룹명이 '비트겐슈타인'이고, 그의 DJ시절 유명 어록들과 음악들 전반에 걸친 비판과 사유의 바다는 한 권의 철학책 못지않았다. 그뿐 아니라, 사회ㆍ정칙적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넘어서 직접 행동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100분 토론' 출연이 유명한 일례이고, 이라크 파병 반대 1인 시위,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노제와 FTA반대 집회에 "노개런티"로 선동대를 자처하였다. 이는 대학시절 잠시 연을 맺었던 CA(제헌의회파) 운동조직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CA는 Constituent Assembly Group의 준말로 당시 NLPD의 말만 무성한 운동권의 피상주의를 비판하고 급진적인 '파쇼타도 제헌의회주의'를 주창한 운동권 그룹. 고 박종철 열사가 이에 속했으며, 가장 과격한 투쟁을 펼친 행동파들)


이라크 파병 반대 1인 시위 (시진=오마이뉴스)


신해철이 익숙한 누군가가  이유  하나는 그의 '음악도시' '고스트 스테이션' DJ활동이 크게 작용한다. 그야말로 파격,  자체였던 그의 라디오 전파는 심야 방송이라는 한계에도 수험 청소년들  아니라 2030 청년들에게도 어필되는 방송이 되었다. 그의 방송 청취 때문에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존다는 불평이 현직 교사의 사연으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40분짜리 <삼태기 메들리> 틀기도 하고, 같은 노래를 여러  들으면  된다는 밥이 어디 있냐며 7 연속 들려준 적도 있다. 방송 내내 '장기하와 얼굴들' <싸구려 커피> 대한 비평을 하며,  노래만   내보낸 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는 인디밴드의 대부이자 열혈 지원자였다. 그가 큰돈을 모으지 못한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다. 라디오 DJ 시절, 그는 소위 말하는 '유행가'는 틀지 않았다. 주로 해외 뮤지션과 인디음악을 틀었고, 일주일에 한 번 '인디차트'라는 것을 자체 발표하여, 인디밴드들은 그 차트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가 되기도 하였다. '무붕콘서트'라는 립싱크 반대 행사나 '밤차 끊기고 첫차 다닐 때까지' 홍대에서 인디밴드들과 그의 그룹 넥스트가 번개 콘서트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뉴테크-뉴미디어의 개척자이자 얼리 어댑터이기도 했다. 단지 음악의 영역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신해철 닷컴'이라는 일종의 개인 미디어 포털을 만들어 그곳에서 병행하여 음악 방송을 내 보냈다. 예전에는 심야 시간에 한 달에 한 번, '전파 점검 시간'이 있어 방송 중단이 되었는데, 이때는 청취자들을 자신의 인터넷 방송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다른 인터넷 방송자들의 녹음본을 라디오에서 틀어 주기도 하는 등 팟캐스트의 효시를 알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주류 방송계가 장비와 자본만 믿다가 결국 다양한 개인의 미디어가 방송을 점유할 것이라는 노스트라 다무스 급의 예언도 하기도 했다. 지금 파편화된 미디어- 유튜브, OTT, 팟캐스트 등-를 보면, 그의 통찰과 인사이트가 놀랍기만 하다.


SBS라디오 고스트 스테이션 (사진=나무위키)



못다 이룬 바다로 가는 민물장어의 꿈


신해철의 가장 큰 인간으로서의 장점은 '공감과 수긍'이다. 반대 의견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실책과 예측 실패를 인정하곤 했다. 대마초 사범으로 사법 집행을 받은 뒤, 그는 "대마초는 언젠가 합법화가 되겠지만, 자신은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고 주위에도 권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창작에 도움 된다는 이야기는 경험상 거짓이고, 그저 술 취한 사람이 주변에 끼치는 해로움이 존재하기에 그것이 싫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유명한 '신해철 닷컴 폐쇄 사건'이 있다. 2011년 5월 15일에 신해철 닷컴에 다수의 여성 사진을 올려놓고 외모를 비하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해철은 즉각 그 회원의 행동을 "강간범이나 다름없는 짓을 저질렀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 범죄의 장소가 다름 아닌 '내 집'이라는 것에 슬퍼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없다고 했다. 바로 피해자가 된 8명의 소녀들과 가족에 대한 사과 표시로 48시간 후 신해철 닷컴의 폐쇄를 했다.


신해철은 2009년에 모 방송 다이어트 프로그램 때문에 몇 년 후 사고가 날 서울스카이병원에서 위밴드 시술을 받았다. 2014년 10월 17일 신해철은 위밴드에 문제가 생겨, 장협착증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 이후 혼수상태에 빠졌고, 2014년 10월 26일 사망했다. 당시 신해철 주치의는 위축소 수술을 환자 본인이나 신해철 가족의 동의 없이 진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과수 부검 발표 결과 심낭에 생긴 0.3cm의 천공 그리고 위장 외벽부위를 15cm가량 봉합한 흔적을 발견했고, 이런 부검 결과를 바탕으로 검찰은 "신해철의 사인은 의료 과실이다"라며 해당 집도의를 기소하였다.


이후 긴 법정 공방 끝에 집도의는 1년의 실형과 의사면허 취소 처분이 되었고, 최종 11억 8,700만 원의 민사 책임도 지게 되었다. 신해철의 의료사고를 계기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의료사고전담수사팀을 설치하였다. 결과가 중하거나 사회 이목이 집중된 주요 사건을 직접 수사하는 한편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의료법 위반 등 추가 불법 행위를 추적해 형사처벌하기 위해서였다.


집도의 의료사고 (사진=mbc)


편성 이후 검시조사관이 옆에서 수시로 조언해 주는 데다 보건복지부와 각종 의학회, 의대 교수 등과 연계해 체계적으로 자문할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이후  지방청에서도 의료수사팀이 신설되었다. 이후 집도의의 여죄를 파악하여 구속영장을 청구를 하였고,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집단 사망 사건  여러 의료사고 수사에 투입되어 피해자의 한을 풀어 주었다. 또한 강력범죄수사대로 개편 이후 현재까지도 존속되어 있다. 대부분의 의료사고가 '전문성' 이유로 기껏해야 과실치사로 덮이는 현실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이제야 말이다. 신해철은 죽어서도 사회에 의미를 선물처럼 던져 주었다.


신해철의 음악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의 46년 간의 인생을 되짚어 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그런 뒤 그의 음악을 들추어 본다면, 이전에 이해할 수 없었고 작고 크게 오해했던 음악이 어느새 귀에 꽂혀 들어오게 된다. 그는 뮤지션이면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진정한 인플루언서였다. 실수도 있었고, 방황도 했으며, 아집과 답답한 면도 지니고 있었지만, 그처럼 사회와 진심으로 소통한 셀럽은 아직도 찾기 힘들다.



천재가 아닌 둔재의 잡화상


신해철의 음악을 굳이 분류하자면 '록' 음악이다. 밴드로 시작한 가수들이 그러하듯 그의 음악적 기반에는 록 스피릿이 묻어 있다. 온갖 록 음악은 물론, 일렉트로니카(테크노), 재즈, 국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했다. 유학을 다녀온 후 '원 맨 밴드' 음악을 선보이며, 대한민국 컴퓨터 음악(소위 미디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승환, 싸이, 서태지, 이현도 등도 신해철에게 샘플러를 비롯하여 각종 미디음악 장비 사용법 등을 배웠다는 후문이 있다.


대학 중퇴자이지만 그의 가사에슨 철학적 노랫말이 스며들어 있다. 흔하디 흔한 사랑, 이별 타령이 아닌 자신의 성찰과 염세주의적 세상비판을 가감 없이 쏟아 내었다. 작사, 작곡, 편곡, 악기 연주는 물론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링 및 음악 작업을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까지 한 만능의 뮤지션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결과로 그는 대중적 팬덤을 두텁게 형성하는 한편 평단에서도 호평을 부르는 뮤지션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의 창밥은 "열창"이다 (시진=네이트뉴스)


지난  기억이 있다. 이문세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던 밤에> 연례행사로 ' 콘서트'라는 싱어들이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해 콘서트를 하는 기획이 있었다. 어느  신해철은  콘서트의 '1st 기타' 자청했다. 퍼스트 기타는 주요 리프와 간주 솔로 등을 담당하는 밴드의 코어이자 프런트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이문세와 윤상 등 선배들이 말렸다. 기타 실력이 연주자 급이 안되어 라이브는 무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던 신해철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비틀스의 <Hey Jude>의 리프와 후주까지 완벽 마스터해 왔다. 선배들이 놀라며 비결을 묻자, 수험생 공부하는 심정으로 레퍼런스를 외우고 또 외웠다고 한다. 그의 뮤지션이라는 명패 뒤에는 천재와 싸워 이기려는 부단한 노력이 숨어 있었다.


지난 시간 소개한 015B의 정석원은 그야말로 '천재과'다. 그러나, 신해철은 사뭇 달랐다. 그의 초창기 음악은 솔직히 정석원의 날 것보다 더 엉성한 아마츄어리즘이 있었다. 특히 빠른 음악계로의 진입을 위해 그의 처음 모습은 아이돌 가수였다. <슬픈 표정 짓지 말아요>와 <재즈카페>로 히트를 치고 그는 당시 청소년들 팬을 보유한 아이돌이 되었다.


흑역사 "솔로 1집" (사진=나무위키)


하지만, 그는 이때를 흑역사라고 칭하였다. 밴드음악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만, 솔로를 고집하는 당시 연예 매니지먼트 관행과 복잡한 배분구조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혼자서 작곡, 작사, 편곡, 연주를 한 2집 앨범 <Myself>를 흥행과 작품성으로 증명한 후에야 기획사에서 밴드 결성을 허락하였고, 그 밴드가 전설의 'N.EX.T'인 것이다.



90년대 록의 선장 - New EXperiment Team


팀 이름이 '새로운 실험'이다. 신해철을 주축으로 1991년에 결성되었고 1997년 해체한다. 다시 2002년 재결성되어 2019년까지 활동하였다. 특히, 2014년 이후 N.EX.T United라는 이름으로 중견급 음악창작 영리 집단으로 활동했다. 일종의 힙합 레이블 같이 음악창작에 대한 집단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최근까지 활동하며, 밀레니엄을 건너온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록밴드로 평가하고 싶다. (또 한 팀은 YB)


이런 이야기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곤 하는데, 신해철과 N.EX.T는 서태지와 서태지와 아이들만큼이나 흥행과 영향력에서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가수 및 밴드 중 하나라는 이야기다. 두 밴드들이 해체하는 1996년, 1997년까지의 평가를 '형들은 N.EX.T에 열광하고, 동생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했던 시대'라고 표현하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콘서트에서나 볼 수 있었던 넥스트의 음악은 서태지의 방송계의 서포트와 비교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나중에 서로 6촌 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두 프런트맨의 입지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넥스트 재결합 (출처=동아일보)


중간의 해체 휴지기에 영국 유학길에 결성한 '비트겐슈타인'과 프로듀서 크리스 상그리디와 함께 '모노크롬'이라는 프로젝트 그룹 활동도 했었다. 모노크롬의 음악은 추후 전설의 록 밴드 주다스 피리스트와의 표절 쟁송도 있었다. 특이한 점은 표절의 양상이 반대였다는 점이다. 신해철(모노크롬)의 <Machine Messiah>를 주다스 프리스트가 가져가 <Metal Messiah>라는 표절곡을 내어 놓았고, 그 가운데에 믿었던 크리스 상그리디의 장난질이 있었던 것이 추후에 밝혀지기도 했다.


신해철은 자신의 밴드가 '신해철과 넥스트'로 알려지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고 한다. '윤도현 밴드' 같은 유명한 프런트맨을 앞세운 홍보였지만, 밴드들의 구성원이 묻혀 마치 세션맨으로 취급받는 문화에 반감이 있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넥스트 유나이티드'로 자신과 음악 실험을 하는 모든 구성원이 주인공이 되는 음악창작집단을 2014년에 결성했다. 20명의 인원들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팀을 조합하여 창작, 공연한다는 구조였다. 그러나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그 실험은 그저 시도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실험은 허무하게도 미완으로 남아 버렸다.



마왕이여, Save Us!


솔로 시절 발라드와 하우스 댄스, 밴드 초기(1~3집)에는 일렉트로이카 테크노, 국악의 접목 등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해체 이전 4집에서는 바로크 팝, 심포닉 메탈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재결성 이후에도 오케스트라 세션샘플링과 극단적 음향 효과들을 통한 인트로 피크 등 실험을 하기도 했다.


보통 앨범에서 장르를 너무 많이 담기를 꺼려했지만, 신해철은 한 앨범 내에서 음악적인 경계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담아내었다. 이러한 구성을 백화점식, 잡화점식 구성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물론 현재에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혼재된 장르가 어수선함도 주지만, 다 잘해 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날, 015B와 이어지는 음악적 자신감과 용기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평단에서는 이런 구성을 '중구난방'이라고 비판도 했다. 앨범이란 자고로 '유기적 결성체'여야 한다는 고지식의 반론이었다. 정작 그런 본인들의 음악은 신해철에겐 조적지혈일 뿐인 결과만 내면서 말이다. (대표적으로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


마왕이여 사진=더피알)


90년대로 진입하면서, 록음악은 '얼터너티브'라는 아마츄어리즘의 변명에 열광하고 있었다. 개러지 밴드니 펑크 밴드니 하면서 스케일과 토닉도 깨우치지 못한 기타 세션과 리프도 아닌 백킹만 가득한 그저 고함 덩어리들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따라 쟁이들은 본고장 미국의 그들이 얼마나 기본에 충실한 후에 실험하였는지 알지 못했다. 익스트림이나 라디오 헤드, 그리고 너바나의 기본기가 탄탄한 정통 블루스에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한국 록 음악의 긴 암흑기의 시작이 되었다.


혈기 왕성하던 록 음악 애호가 시절, 일본을 부러워했다. 특히 'X-Japan'같은 글로벌 스케일의 대형 밴드가 참 부러웠다. 누군가는 비주얼 록과 글램 록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음악에는 탄탄한 기본기가 있었다. 그 레거시가 이어져 일본의 밴드 음악은 아직도 주류의 한 타워로 우뚝 서있다. 한국에서 넥스트가 그런 역할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실험이 미완으로 끝나자, '실용음악'으로 포장된 록 음악은 실종되어 버렸다. 방송에 나오는 아이돌 밴드들은 소리도 나지 않는 에어 기타와 에어 드럼을 치며 립싱크, 핸드싱크 하기 바쁘고, 인디밴드들은 그저 '특이한 힙한 것'에 꽂혀 근본을 있었다. 바로 록 스피릿 - 세상에 고함치며 나를 외치는 그 정신은 사라져 버렸다.


고교 시절 축제 시즌에 근처 학교를 돌며 공연을 했다. 보통 1~2곡의 시간이 다이기에 최대한 긴 곡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호응이 좋으면 기습 앙코르를 던졌다. 그때 앙코르의 레퍼토리는 신해철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멜로디언으로 작곡했다는 마성의 전주가 시작되는 <그대에게>였다. 그 전주와 리프에 환호하는 십 대들을 말릴 수 없으니 앙코르는 진행되었다. "The show must go on"이 된 것이다. 끝나고 나서 다른 밴드들과 뒤에서 멱살 드잡고 주먹다짐을 한 것은 추억의 덤이 되었다.


그의 정신이 남기를 (사진=한겨레)


한국 대중음악이 K-pop이니 하며 위상이 높아졌다 한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아이돌 그룹들의 상품화가 성공한 것이다.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그 음악들의 기둥을 찾아내야 한다. 안타깝지만 그 기둥은 없다. 미디와 프로그래밍으로 음악을 찍어 내는 세상이다. 기계의 조력이 반 이상인 결과를 "창작물"이라 내어 놓고 부끄럽지 않은 세상이다. 그러나 팝음악의 본고장의 음악 시장의 다양화는 어찌 바라보아야 할까. 비주얼 아이콘 레이디 가가의 토니 베넷과의 블루스 재즈 퍼포먼스를 보며 아쉬움이 커졌다. 그래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제2의 신해철을 기대하며, 마왕의 구원을 기도해 본다.



영원한 인생의 질문, 답을 찾아 살아 낸다


신해철은 지금 내 나이보다 어린 마흔여섯에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내게 어른으로 다가온다. 내게 이야기를 건네며 위로하고 다그치기도 한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에 내 소년 시절의 파랗던 꿈'이 떠오른다. 그러나 세상이 변해가듯 같이 닮아가는 내 모습에 때론 실망하며 때로는 변명도 해 본다. 산다는 게 그런 것이라며 합리화한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대답을 찾기 위해 홀로 걸어왔던 것일까.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을까. 지나간 세월에 후회 없었다고 말이다. 그 대답을 위해 지금 살아 내야 하는 오늘이다. 그래서 신해철은 아직도 유효하다. 오늘은 그의 곡 중 고르고 골라 일곱 곡을 올린다.



1.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고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회 없노라고


신해철의 '유지' 같은 일성이다. 시간이 흘러 변해 버린 모습에 어쩔  없다고 변명하는 자신에게 "후회 없니?"라고 묻는 질문에 답할  있을까. 그의 스물한두 살이었던 <무한궤도 1> 수록곡이다.  어리고 젊은 날에  미래의 닳고 닳은 자신에게 보내는 타임캡슐이 되었는지, 그도 원형 그대로 리메이크로 그의 수많은 디스코 그래피 곳곳에서 찾을  있다.


https://youtu.be/tQFbMlYoN2o



2. 날아라 병아리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굿바이 얄리
너의 조그만 무덤가엔 올해도 꽃은 피는지


신해철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유소년 기를 보냈다. 유독 병아리 장사들이 많았던 단지에 병아리  마리 키운  없는 아이들이 드물었다.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거나, 이내 벼슬이 나고 무서운 존재가 되기까지 애지 중지하곤 하였다. 그때의 기억을 담은 "생애  죽음 목격" 대한 노래다. 하지만 동기는 동심을 깬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오는 노래가 이승환의 <프랜다스의 >였는데, 무슨 개로 노래를 만드냐는 생각 끝에 자신도 동물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있던 패스트푸드점이 'KFC'였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마왕을 보내는 송별가다. 하늘에서   노래하는 그의 무덤가엔 올해도 꽃은 피겠지.


https://youtu.be/-X41UVzR1qI



3. 아버지와 나 Part 1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처음 이곡을 듣고 잠시 정신을 놓았었다. 015B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연애에 대한 무겁지 않은 세태 풍자라면,  곡은 묵직한 진혼곡 같았다.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다  나이 열아홉에 쓰러져 고스란히 가장의 무게를  그가 미웠다. 그런데  노래를 듣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었다. 모친에게 들은 푸념의 필터로 전해 들은 그의 사랑이 퇴색되었다. 건강 이유로 일찍 돌아  유학 귀국길에 아파트 입구에서 보이는 2층의 베란다에는 울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보고  눈물을 보이신 아버지는 결국 영어의 몸이  나를 요양병원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세상에 복귀하고 찾아뵌 다음날 소천하셨다.  아직도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Part 1 피아노 반주에 내레이션이 그리고 이어지는 Part 2에는 가슴을 후벼 파는 기타 솔로가 하늘의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 준다. 참고로 기타 솔로는 '정기송 버전' 추천해 본다.(아래)


https://youtu.be/16bLe-aYsSE



4. Friends


오늘 하루는 그 모든 근심들을 버리자
추억의 향기로 취하기 전에 그 술잔을 들어라


'비트겐슈타인' 넥스트 해체 휴지기에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체류  만든 그룹이다. 알바를 뛰던 기타리스트 데빈 리의 기타를 발견하고, 그를 트레이닝시킨  키보디스트 임형빈과 드러머 남궁연을 미국에 불러들여 앨범을 내었다.  당시의 음악적 정수가 <일상으로의 초대> 고스란히 앉아 있다. 서로가 조응하는 형제 같은 곡이다. 임형빈과 함께 부른  노래는 오버하지 않는 우정찬가다. 영원한 친구란 없겠지만, 지금 가장 소중한 친구는 있기 마련이다. 떠나간 친구든 지금 절친이든 그들을 위해 잔을 들어라.


https://youtu.be/FRdyMXc3TMI



5. 일상으로의 초대


해가 저물면 둘이 나란히
지친 몸을 서로에 기대며
그날의 일과 주변일들을 얘기하다
조용히 잠들고 싶어


1998 발표된 <Crom's Techno Works> 수록곡  가장  알려진 노래다. 일렉트로니카 테크노 장르인데도 가사가 주는 영향력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는 일상을 떠나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중한 일상으로 너를 초대해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사랑해" 한마디 없지만 진솔한 사랑 고백이 아닐  없다.  고백이 '너일 수도 있지만, 아직 내면에 잠자고 있는 '자아' 대한 호출일 수도 있다. 일상주의자로서의 주제가.


https://youtu.be/QTkLBhd-hQ8



6. 민물장어의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신해철이 장례식장에서 틀어 달라고 주문한  곡이다. 노무현 대통령 장례 노제에서 부른 노래다. 가사는 신해철  정신의 덩어리가 그대로 녹아 있다. 자신을 작게 깎아 내어 작은 문으로 들어가야 성숙된 자아가 된다는 성찰이다. 민물장어가  강물이 모여드는  성난 파도 아래  번만이라도 다다르는 꿈을 버리지 않고 마지막 숨까지 다하겠다는 다짐의 노래다. <거위의 >, < 수염 고래>, <거꾸로... 연어들처럼> 상호 텍스트하는 노랫말이 가슴에 남는다. "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라는 마지막 구절의 질문에 신해철은 하늘에서 어떤 답을 하고 있을까.


https://youtu.be/zzPP-FDPuk4



7. Here I stand for you


난 바보처럼 요즘 세상에도
운명이라는 말을 믿어
그저 지쳐서 필요로 만나고
생활을 위해 살기는 싫어
하지만 익숙해진 이 고독과
똑같은 일상도 한 해
또 한 해 지날수록 더욱 힘들어
등불을 들고 여기 서 있을께
먼 곳에서라도 나를 찾아와
인파 속에 날 지나칠 때
단 한 번만 내 눈을 바라봐
난 너를 알아볼 수 있어 단 한순간에
Cause Here, I stand for you
난 나를 지켜가겠어 언젠간 만날 너를 위해
세상과 싸워 나가며 너의 자릴 마련하겠어
하지만 기다림에 늙고 지쳐 쓰러지지 않게
어서 나타나줘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이 낱말들을 난 아직 믿습니다.
영원히...


신해철의 장례식에서는 <민물장어의 > 아니라 실제 이곡이 내내 울렸다. 유족의 뜻이었다. 앞선 곡이 신해철이 우리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라면,  노래는 우리가 다짐하는 노래다. 당신의 음악과 정신을 잊지 않고 당신 옆에 서겠노라는. 웅장한 심포닉 메탈의 대곡은 자랑스러움까지 주었다. 언젠가 무대에 다시 서면  마지막 엔딩 레퍼토리에 넣고 싶은 노래.


https://youtu.be/5LQcFIRfXBw


*참고:
<신해철의 쾌변독설> , 부엔리브로
<마왕 신해철>, 문학동네
권유리야 外 다수 <인간 신해철과 넥스트 시티>, 문화다북스
고종석 外 다수 <신해철 다시 읽기>
강헌 < 신해철(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 >, 돌베개
지승호 <아, 신해철!>
그리고, 나무위키


출처=자스설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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