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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Nov 02. 2023

015B - 청춘처럼 빛나던 그 시절의 어설픔

[너.들.이 02] 결핍과 제약이 만들어 낸 X세대의 혁신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02 - 015B


[..] 연재의  번째 이야기 선정에는 고민이 있었다. 시대순의 통사적 연재가 의미가 있는지 장르적 분류가 나은지, 그저 복잡스러운 생각들이 타래를 만들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은 '의식의 흐름'대로, 경험적 유의미성을 연결하여  내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번째는  연재를  올릴 때마다 귓가에 맴도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주인공 015B.


015B는 나름 '장수 밴드'다. 1990년 이후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니, 만 33살의 밴드가 되었다. 최근의 활동은 미미하지만, 20세기말의 그들의 영향력은 그저 뮤지션으로서 형성하는 팬덤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한 발 앞선 실험 정신이 그들의 이미지가 되었다. 그래서 이 밴드에게 붙는 대표적인 수식어가 '프로듀서 밴드'일 것이다. 객원 보컬이라는 프로젝트성 TF의 구성은 최근에는 흔한 이야기이지만, 그 실질적 효시를 015B로 본다. (객원 가수의 시초는 아니다. '사랑과 평화'라는 밴드를 보더라도)

정석원, 정호일 (사진=나무위키)


'015B'라는 이름의 의미


015B를 이야기할 때 건너뛸 수 없는 것이 '밴드 이름'에 대해서다. 이 이름에 대하여 풀어내자면 필연적으로 대학가요제 대상 밴드 '무한궤도'를 이야기해야 한다.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팀 무한궤도의 보컬이었던 신해철은 고민 끝에 솔로로 방향을 잡았다. 다른 멤버들은 처음부터 '추억 쌓기'의 동아리 활동이라 생각했기에 학업과 일상에 복귀하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효성, 쌍용가의 재벌 2세들과 의대생 등).


사실 "015B 그 자체"라고 평가되는 정석원은 대학가요제 출전 시 멤버는 아니다. 전업을 부담스러워하던 멤버들이 떠나자 일전 강변가요제에 '실험실'이라는 팀으로 나왔던 정석원을 신해철이 영입한 것. 결과는 아이러니하게 신해철이 떠나고 정석원이 중심이 되었다. 그 이유는 신해철은 학업을 그만두고 대학 자퇴를 결심하면서 전업 뮤지션으로서의 의지가 강했지만, 정석원을 위시한 남은 멤버들은 아직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한궤도 원년 멩버 (사진=나무위키)


결국 중간지대에 있던 키보디스트이자 작곡의 정석원, 베이시스트 조형곤, 드러머 조현찬이 정석원의 형 장호일과 함께 1990년에 밴드 015B를 결성했다. 무한궤도의 소속사였던 대영기획에서 남은 멤버끼리 앨범 1장만 더 내자고 제안하였고 이를 수락하여 팀이 동명 앨범으로 정식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 멤버구성에 보컬이 없고 세션만 있어서 기획사에게 객원보컬을 쓰겠다고 허락을 구하고 한국 최초의 '프로듀서 밴드'가 탄생한 것이다. 엄정난 계획의 도원결의가 아닌, 그저 "한 번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밴드였다.


015B라고 쓰고 한글로 '공일오비'라고 읽는다. 앨범에서 차용하기도 하였지만 한자로 '空一烏飛'를 쓰기도 한다. 정석원의 대학 밴드 이름이 '실험실'이어서 그런지 이 이름에 대한 해석에 외부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가장 유력한 썰이 '무한궤도'의 레거시를 포함했다는 이야기다.  "0=무, 1=한, 5B=Orbit(궤도)"로 해석이 된다는 주장이다. 후일담에 정석원은 U2나 UB40 같은 유명 밴드 이름이 멋있어서 지은 것이라고 했지만, 한자로 '空一烏飛(하늘에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날다)'라고 표지에 쓴 앨범이 나오자 심오한 중의적 의미라는 통념이 고착화되었다.

015B 1집, 2집 (사진=소울라이브)


015B의 1집 작업 당시 소속 기획사의 기대와 지원이 부족했다. 인기 많은 밴드 프런트맨인 신해철이 빠져나갔기에 계약 이행 정도 생각한 듯하다. 일례로 밴드 이름을 제대로 기억해 부르지도 못해 기획사 녹음실 식구들 사이에서는 "궤도이탈"로 불렸다고 한다. 멤버들은 당시를 회상할 때 섭섭함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전업 음악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희박해서 당시 대학 스쿨밴드들이 그래왔듯이 졸업 기념 앨범 하나 남기자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나 어떡해>로 유명한 서울대 농생대 샌드페블즈가 그런 경우였으니 당시로서는 당연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정석원의 친형인 장호일의 본명은 정기원이다. 당시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광고기획사에 다니던 중이었다. 대구 MBC 중역이었던 부친의 반대도 있고, 당시 투잡이 노출되는 부담이 있어 사촌의 이름인 '장호일'을 빌려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015B라는 밴드는 음악계의 메이저 씬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것이 이들 음악의 DNA가 되었고, 레거시로 자리를 잡았다. 바로 좋은 말로 '아마츄어리즘의 실험정신'이고 속된 말로 '어설픈 선무당'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의 첫 번째 타이틀곡 <텅 빈 거리에서>가 입소문을 타고 작은 역주행을 하며 30만 장의 판매를 올리게 된다. 진짜 뮤지션 015B가 소환된 것이었다.


설익어도  익어도 맛있는 대추 같은 음악


015B의 활동은 미디어 매체에서 쉽게 볼 수는 없었다. 한창 활동을 하던 그 시절에도 "보여줄 것이 없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콘서트를 제외하고 TV 예능이나 음악방송에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 <불타는 청춘>으로 예능과 친숙한 형 장호일과 달리 정석원의 모습은 미디어에서 희귀하다 싶을 정도이다. 외모에 대한 자신감 부족일 수도 있고, 음악에 대한 확고한 철학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1992 내일은 늦으리'라는 광고면과 몇 건의 토크쇼와 음악방송이 전부다이다. 그리고 빼빼로 CF정도가 있다(장호일이 다니던 회사가 광고제작사라는 후문이 있다).

015B 조형곤, 정원삭, 장호일, 전현찬 (사진=소울라이브)


015B는 객원가수들의 면면으로도 유명하다. 지금 '미스틱'이라는 중대형 기획사의 수장 윤종신을 잉태했다. 밴드 객원 이후에도 그의 솔로 앨범에 꾸준히 협업하면서 음악적 동반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신인류의 사랑>과 <슬픈 인연>을 부른 김돈규도 015B의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미의 원곡보다 김돈규의 <슬픈 인연>이 더 유명한 만큼 스테디 한 히트곡이 되었다. 그리고 목사가 된 대히트곡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김태우도 있다. 윤종신이 부재중이어서 데모를 부른 인연이 대표 히트곡이 되었다.

객원가수들 (사진=네이트TV)


<훈련소 가는 길>의 이장우는 물론, 이승환, 박정현, 요조, 다이내믹 듀오, 김형중, 버벌진트, 조규찬, 박선주, 아이유 같은 기성 보컬들은 물론 황치열의 초창기 '치열'의 목소리도 있고, 1집의 <때늦은 비는>, <슬픈 듯 흐르는 시간 속에>의 아련한 최기식의 목소리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왕 신해철'이 이들의 역사 가운데에 있다. 1집 <난 그대만을>, <슬픈 이별>을 작사하고 직접 부르기도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정석원과 멀어져 협업은 더 이상 없었다.


이렇듯, 015B는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의 밴드였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기획된 산물이 아니라는 것은 많은 의미를 준다. 결핍과 제약이 만들어 낸 궁여지책이 '혁신'의 결과물을 내었다고 할까. 부족하고 어설픈 한계가 오히려 무한한 확장의 여지를 준 것이다. 사실 그들의 초기 음악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특히 1992년 63 빌딩 라이브 공연을 여과 없이 용기 있게 낸 두장의 앨범은 음악적 NG가 넘쳐 난다.

1992년 러이브 앨범 (사진=예스24)


신해철과 윤종신의 보컬은 반음 떨어진 플랫이 되기 십상에 박자를 놓치기 일쑤이고, 기타는 이팩터 어렌지먼트가 설익은 수준이라 "깽깽, 좌우지 장지지"를 연발한다. 그리고 엔지니어들도 한계가 있어 리코딩 품질도 애처롭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앨범이 최애 넘버이다.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울컥 올라온다. 내 젊고 어설펐던 시절의 플레이 버튼을 자동 재생해 준다. 스튜디오는 언감생심이라 다락방의 벽에 계란판을 붙이고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던 시절. 키보디스트로 꼬셔온 성당 올겐 후배가 오빠들 발냄새에 울음을 터뜨린 시간들이 떠 올랐다. 어설프지만 싱그러웠던, 그 음악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같았다.


015B의 음악은 마냥 설익어 있지 않았다. 앨범이 거듭되면서 스스로를 숙성시켰다. 마치 대추가 설익어도 상쾌한 맛을 내고, 다 익어 주름이 제도 농익은 맛이 나듯이 말이다. 진하지 않은 단맛에 쉽게 손이 가게 된다. 밴드의 중심은 정석원이라는 천재과의 프로듀서가 지켰다. 그 덕에 형 장호일은 숟가락 얻는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프로듀싱에서는 큰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앨범의 전체적 구성, 방향, 그리고 마케팅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소구할 수 있는 목소리인 윤종신, 김돈규, 이장우 등의 객원 보컬 발굴을 담당했다. 이후에도 바이브, 솔리드, 황치열 등을 발굴한 것으로 보아 촉하나는 특출했던 것 같다.


반면 정석원은 '015B 그 자체'로 인식된다. 거의 모든 곡의 작곡, 작사, 편곡을 혼자서 해 내었다. 그는 공대생(서울대 컴퓨터공학)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장르의 작곡을 훌륭한 수준으로 뽑아내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 그가 작사한 가사는 새로운 센세이션이기도 했다. "야윈 두 손엔 동전 두 개뿐(텅 빈 거리에서)"이라며 실연에 절규하기도 하고,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아주 오래된 연인들)"라고 덤덤하게 냉소의 이야기를 던진다. 일상의 언어와 문학의 시어를 넘나드는 가사는 볼수록 셈을 야기한다.

라이브 콘서트 준비하는 정석원 (사진=나무위키)


그는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최고의 키보디스트라고 이야기된다. "개떡 같이 불러도 찰떡 같이 반주로 채운다"는 신해철의 평가가 대변해 주듯, 변조와 싱코페이션, 그리고 텐션의 변주가 자유자재인 '천재'이다. 그 천재적 성품이 외골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음악을 전공한 유희열의 로망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야기를 대신할 수 있다. 또한 음악적 논란에 매우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대처하기로 유명하다. 표절 논란이 일자 표절과 레퍼런스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기 위해 레니 크레비츠를 모방한 <시간>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고, 해외 트렌드 추종이라는 비판에는 대중음악은 외래의 이식이라는 주장으로 자신의 가지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X세대의 발라드(서사)


1992년 서태지의 등장으로 대한민국의 음악 판이 대전환되었다고들 한다. 엄밀히 그 시절의 10대들부터 그 수혜자가 되었다. 당시의 청춘인 20대들은 그 야말로 '낀세대',  X세대의 코어였다. 그리고 나도 X세대였다.

나? X세대! (사진=예스24)


유신정권 말기에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전두환, 노태우 쿠데타 정권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87년 민주화 항쟁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태동의 시기에 대학생활과 성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청소년기에 지켜보았고, ‘서른 즈음에’라는 노랫말을 곱씹어 생각하기에도 버거운 2002년 월드컵 때에 서른을 맞이하였다. 군복무 시기에 김일성 사망을 겪고, 졸업시기에 IMF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월 10만 원 교통비와 50만 원 정부보조금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뿐인가? 교복을 한 번도 못 입어 보았고 (물론 사립초등학교를 다닌 친구나, 사립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예외지만), 살짝 한 펌은 허용이 되는 두발자율화의 세대였으며, 보습학원이나 대학생과외 등이 전면 금지된 사교육 금지세대였다.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의 전성기에 전교조 선생님들을 만나 한번 버티기도 하고, 단체행동으로 학교 처벌을 받기도 하였던 세대였다. 엄청난 대학입시 경쟁률을 자랑하던 세대였으며 (재수학원 경쟁률도 매우 높았던), 재수 삼수의 시기가 애매한 경우 일본식 학력고사와 미국식 수학능력시험을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고, 선 시험 후 지원과 선지원 후시험을 모두 치러 볼 기회도 있었던 세대였다.


문화의 현상에서는 개방과 물질, 기술의 발달로 급격하게 팽창되는 모습을 목도하던 최초로 나타난 '주요 소비계층'이기도 하였다. 이전 성인 중심의 가요와 청년세대 중심의 포크, 록 문화에서 발달하여, 소위 말하는 ‘대중가요의 시대’를 만든 세대다. ‘별이 빛나는 밤에’등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성행하였고, LP판의 유통을 주도하였고 그로 인하여 가격폭등으로 인한 곤욕도 겪은 세대였다.


팝송과 가요가 공존하던 세대에서 가요로의 무게 중심이 이동시킨 세대였으며, 장르에서도 발라드와 댄스의 양대 산맥을 형성시킨 소비자들이었다. ‘유재하’, ‘어떤날’을 가슴에 묻고 '서태지'를 받아들인 세대였다. 본격적인 프로 스포츠의 태동기에 어린이 팬으로 함께 시작한 세대였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가장 순수한 입장으로 받아들인 세대이기도 하다. 비디오 시장의 주요 고객에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하였고, 공연이라는 문화상품이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 세대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워크맨의 최대 사용자였으며, 성년이 되면서 삐삐, 모바일폰의 얼리 어댑터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세대. 손으로 쓰던 리포트에서 워드프로세서로 프린트하던 변화하던 중간에 서 있던 세대였으며, 인터넷 통신부터 인터넷 태동기까지 정보통신 기술의 본격적인 시작에 함께 하였다. 그뿐 아니라, 현재 한국 IT산업 종사자 관리자 중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세대이면서, 그 IT시장의 영욕을 함께 하였던 세대이기도 하다. 해외여행 자율화 시대를 맞이하여 어학연수, 배낭여행의 선봉에 서 있었고, 주 5일 근무시대에서 소위 레저 여가의 주요 소비자로 등극하였다.

X세대의 "발라드(서사)" (사진=싱글리스트)


하룻밤 사이 세상이 변하던 시기에 경쟁에 치여 막상 물질의 호황을 체감하기 힘들었다. 드센 선배 세대에 눌려 쪽수는 가장 많은데도 쉽게 대들지 못했다. 386에겐 속물들이라 손가락질받고 그 단물은 그들이 다 빨아먹는 것을 구경만 했다. 시간이 지나니 특색 없는 세대라 정치권도 '잡은 고기' 취급하기 일쑤이고, 급격해진 다음 세대론에 밀려 '젊은 꼰대' 되었다. 애써 이룬 경험이 "라떼-"라는 일반화에 모두 폄하되는 수모도 겪고 있다.


여전히 이 사회에서 들보처럼 버티고 있는 세대인 것은 틀림없다. 여전히 이 사회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리소스로서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세대이다. 조세 부담이 소득대비 가장 많은 세대이며, 아이러니하게 조세저항이 가장 적은 세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이 또 변할 것인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오롯한 ‘나’의 가치는 묻혀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이 세상도 나의 세대에게 기회와 배려의 손길을 잊어버렸다. ‘87년 체제’의 주역으로 불리는 선배들은 그저 나의 세대를 효율성 좋은 리소스로 활용하려 하고, 후배 세대들은 딱히 두드러지게 설명하기 힘든 나의 세대를 건너뛰어 윗 세대와 소통하려 한다. 나의 세대는 스스로의 소극적인 모습과 함께, 위아래 세대에게서 철저히 무시되는 그런 세대인 것이다.

지금도 함께 걷는다, 2019년 공연 (사진=부산일보)


정말 변화의 물살 한가운데 놓여 있었던 세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급격한 변화는 나의 세대에게 탁월한 적응력을 우성인자로 새기어 놓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무한경쟁으로 인한 강한 개인주의적 세계관으로의 전향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그런 나에게 위로와 응원을 주던, 함께 나이 들고 낡아 가는 음악이 015B의 음악이었다.


포크록에서 해비메털 까지 록이라는 록 장르는 다 품어내고, 일렉트로닉, 인더스트리얼, 테크노에 재즈까지, 그리고 조용필과 나미에 대한 헌정으로 세미트롯과 컨탬포러리 팝까지 아우르고 있다. 시대를 타지 않는 데이비드 포스터 식의 편곡 발라드 넘버를 빼어 놓으면 섭섭할 일이다. 전부 다 한다는 이야기는 자칫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되기도 하다. 특색이 없이 이것저것 다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마치 내가 살아낸 시간들을 닮아 있다. 우리들, X세대의 대변이 되는 주제곡들이 015B의 음악이다.



끝까지 써내려 가는 일기장


지난번 소개한 '어떤날'이 인생의 주름을 담은 자화상이라면, '015B'의 음악은 매일 빠짐없이 써내러 간 일기장이다. 처음 그 어설프고 갑작스러운 음악의 시작은 이내 일상의 고달픔과 인생의 과대망상을 일깨워 주는 노동요가 되었다. 사랑, 희망, 젊음, 좌절, 고뇌, 비판, 그리고 분노를 담은 어느 하나 강조하거나 무엇 히나 누락하지 않는 날 것의 기록이 되었다. 아직도 쓰고 있는 015B의 음악을 좀 더 찾아들어야겠다는 작은 약속을 하며 그 시절의 노래들을 추천해 본다.



1.   거리에서 (feat. 윤종신)


유리창 사이로 비치는 초라한 모습은
오늘도 변함없지만 오늘은 꼭 듣고만 싶어


공중전화라는 것이 있었지. 그 시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자 긴 줄을 기다리기도 했고, 전자식 전화가 나오기 전의 3분 한 통화의 가격은 20원이었다. 빈 수화기에 대고 "너를 사랑해"라고 절규하지만, 초라하고 야원 두 손에는 통화 불능으로 반환된 동전 두 개만 있을 뿐이다. 그때의 사랑과 이별은 지금보다 덜 연결된 관계망이라 더 애처롭다. 20대 윤종신의 미성이 미간을 지나 정수를 찌른다.


https://youtu.be/KF1FDZPthYI​​



2.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feat. 장호일)


넌 이게 사랑일까 의심하지만
사랑이란 건 네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렵고 대단한 게 아냐
동화 속의 왕자님은 현실엔 없는 거야


당시 "랩인가 내레이션인가"하는 논란과 장호일의 숨기기 어려운 대구 억양이 고스란히 들리지만 기념비적 음악이다. "가사"가 주인공이던 시대를 대변하듯 또박또박 읽어 내리듯 쏟아 내는 노랫말에는 당시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그리고 쿨한 척 떠난 연인에게 사랑에는 자존심이 없으니 마음 한구석을 단장하고 현재의 그에게 충실하라고 조언한다. 사실은 자신에게 하는 반사일지도 모르겠다. 인트로의 코러스가 맴도는 노래.


https://youtu.be/MLOGeJKV-yo​​



3. 아주 오래된 연인들 (feat. 김태우)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고는 하지


"015B 노래의 으뜸 매력은 참신한 서정성"이라고 한동윤 평론가가 이야기했다. 소재는 사랑이더라도 가사의 전개가 평범하거나 뻔하지 않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이야기는 자꾸 곱씹게 되는 매력이 있다. 단순 비트의 전개임에도 몸이 들썩여지는 음악 속에 촌철살인이 숨겨져 있다고 할까. 도입부가 참 유명한 노래. (MV에 정석원이 나온다)


https://youtu.be/S_S0jKvsP50​​



4. 4210301


우리를 감싸던 별빛마저
안타까이 멀리 떠나 버리고
짙은 안개와 흐린 물속에
우린 모두 사라지지


제목 <4210301>은 전화번호다. 당시 잠실에 있던 '환경부(1991년 당시 환경처)'의 실제 대표번호이다. 가사는 사랑 이야기 같지만 사실 환경 문제를 다루고 있다. 푸르렀던 날도 멀리 떠나가고 탁한 소음과 진한 회색비 속에 너의 야원 모습처럼 다 사라져 간다는 경고이다. 뒤를 너무 생각하지 않는 인류에 대한 비판이다. 3집의 '적(敵) 녹색인생'에서 다시 한번 환경 문제를 노래했다. 딱딱하지 않고 몰아붙이지 않는 비유적 가사가 인상적이다.


https://youtu.be/FmDb4t0Pw9M​​



5. 잠시 길을 잃다 (feat. 신보경)


잠시 길을 잃었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어 난 늘 너란 길만 걸었으니까


잠시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목적이 사라지던지, 목표의 달성이 좌절되던지 어떤 이유가 방향감각을 빼앗아 버리고 만 것이다. 떠난 연인에 대한 노래이지만 015B의 후회송은 단지 '사랑'이라는 의미에 한정 지어지지는 않는다.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찌 이성만을 사랑하겠는가. 사랑했던 모든 것에 대한 상실이 주는 난감이란 쉽지 않다. 그래도 아주 '잠시' 잃었다고 보듬으며 방향을 찾아내기 위한 응원의 노래. 지금 나의 주제가. 한때 실용음악과 실기 금지곡이었다 (하도 많이 불러서).


https://youtu.be/5DDP1mYxcbI​​


• 참고
[공일오비 스토리] 정석원 저
[처음 음악을 시작하던 시절] 신해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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