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들.이 09] 그것만이 내 세상
누구나 ‘많이 부른 노래’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조회 시간 내내 부른 애국가와 교가를 제외한다면 어떤 노래들이 있을까? 소위 ‘18번’이라고 하는 노래방 최애 레퍼토리일 수도 있겠고, 성실한 신앙인이라면 교회나 성당에서 부르는 찬송, 성가일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일종의 축복 송이다. 크게 치닫는 음표도 없이 읊조리듯 내뱉는 잔잔한 노래를 참 많이 불렀다. 어떤 이들의 환영을 위해 누군가의 환송을 향해, 그리고 생일과 기념일, 또한 서로 만남과 헤어짐의 마침표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다행히 코드 진행도 아주 쉬워서 잊을 수 없는 레퍼토리가 된 노래는 ‘들국화’의 <축복합니다>였다.
그룹 ‘들국화’를 이야기하자면 프론트맨인 사자 머리의 전인권이 떠 오른다. 그 이유인지 몰라도 들국화는 우리에게 ‘록 밴드’로 깊게 인식되어 있다. 그럴만한 것이 그들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그것만이 내 세상>이나 <행진>, <사랑한 후에>는 풍성한 사운드의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형을 띄고 있고, 공간을 꽉 채운 기타 리프나 후주의 기타 독주에서는 록 스피릿을 그대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들국화는 ‘포크 음악’을 하는 밴드다. 그들을 굳이 서구권의 밴드에 비유하자면, 감히 ‘비틀스’를 이야기하고 싶다. 비틀스의 그 시작은 물론 깊은 음악적 뼈대에는 ‘포크의 정서’가 깊게 흐르고 있으니까. 오늘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 ‘들국화’를 이야기해 본다.
밴드 들국화의 탄생은 기록하는 시점이나 기억하여 인터뷰하는 화자에 따라 말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음악 밴드 그룹의 흥망성쇠에 늘 있었던 서로 간의 애증과 갈등이 기억을 자신의 시점에서 조금씩 틀어 놓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흔히 전인권, 최성원, 허성욱 셋이 도원결의를 해서 이루어진 팀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 시작에는 ‘2+1의 합심’이 있었다. 들국화의 주축이 되는 전인권, 허성욱과 최성원은 당시 따로 활동을 하던 무명 음악가들이었다.
들국화는 1982년 8월에 이촌동 ‘까스등’에서 전인권과 허성욱이 함께 공연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정설과 양병집이 만든 신촌 ‘모노’에서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갈린다. 어찌 되었든 당시 전인권은 이주원이 이끄는 ‘따로 또 같이 1집’(1979)에 참여한 이후 솔로 독립을 한 상태였고, 비공식 앨범 두 장을 79년과 80년에 각기 발표했었다. ‘까스등’ 공연 전에도 전인권은 ‘조·이’라는 듀엣으로 활동하던 조덕환, 특별한 음악 경력이 없었던 허성욱과 함께 강릉에 있는 나이트클럽 등에서 노래하곤 했다. 최성욱은 이들의 이전 이력을 이야기하며 ‘밤일’을 하던 음악가들이라 이야기하곤 했다. 아마도 고려대 물리학과 73학번으로 ‘가방끈’에 대한 일종의 작은 우월감과 더불어 부친이 유명한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 작곡가였기에 무언가 기존의 ‘딴따라’들과 선을 긋고 싶어 한 듯하다. 이는 밴드의 위태위태한 긴장감으로 지속되었다.
이영재, 이승희와 함께 트리오로 앨범(1980)을 발표한 최성원을 82년 말에 만나게 된다. 이듬해 4월의 이태원 ‘뮤직라보’ 공연부터는 최성원도 참여하여 3인조 체제가 되었다. 당시 어쿠스틱 기타를 다루던 전인권, 건반의 허성욱이 있었기에 최성원은 한 번도 쳐 본 적이 없었던 베이스를 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초기 음반의 합주는 사실 아마추어의 티가 여실하고, 리코딩을 위해 세션을 도움을 받게 되었다. 드럼이 없는 것은 생계를 위해 ‘밤일’을 나가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수월한 이점이 되기도 했다.
최성원이 팀명 후보로 ‘코스모스’ ‘들장미’ ‘들국화’ 등의 이름을 제시한 것 가운데 ‘들국화’를 선택했다고 한다. 탁월한 선택이 아닌가 싶다. ‘들장미’로 정했다면 지금의 그들의 노래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사실 상상이 잘 안되는 지점이다. 들국화라는 팀명으로 공연을 한 것은 83년 11월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옆 ‘에스엠’ 공연부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덕환이 참여함으로써 완벽한 라인업이 형성되었고, 85년 9월에 ‘역사적인’ 데뷔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이 앨범은 우여곡절의 끝에 나온 난산이었다. 나이트클럽 등에서 팝송 카피를 연주하며 밤일하던 주에 어떤 독지가가 800만 원을 지원하겠다며 앨범을 내자고 찾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연습실 겸 합숙소를 얻어 앨범 준비를 시작했는데 전인권과 최성원이 크게 싸우고 틀어졌다. 전인권은 조덕환을 영입해서 허성욱과 3인조로 활동을 따로 하게 되고, 최성원은 솔로와 함께 ‘우리 노래 전시회’라는 포크 옴니버스 프로젝트 앨범을 제작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에스엠’ 콘서트에 갑자기 합류하여 서게 되자 이들은 정식 팀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들국화’라는 이름은 당시 껌 이름이기도 하였고, 선배이자 멘토 격이었던 조동진이 ‘오까마- 유니 섹슈얼’한 이름 같다고 하여 사실 팀 내에서 반대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성욱이 이름을 밀어붙였다. 한동안 그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아끼다가 최성원이 말한 작명의 이유는 ‘전인권’이었다. 당시 전인권이 ‘스카이라크(Skylark)’의 를 너무 잘 불러서 들꽃 중 떠 오른 이름이 ‘들국화’가 되었다. 최성원의 작명 능력은 후배들에게도 선물을 주었다. 연재 첫 번째를 장식한 조동익, 이병우의 ‘어떤 날’도 그의 작품이고, <가시나무새>로 유명한 ‘시인과 촌장’도 그의 작명이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전인권은 크게 다투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그것만이 내 세상>을 녹음하며 팀에 합류하였다. 당시 조덕환은 전인권과 최성원의 오작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기타 세션은 녹음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실력이었다. 할 수 없이 당시 입소문으로 유명하던 밴드 ‘믿음 소망 사랑’의 멤버 최구희와 드럼 주찬권을 영입하여 전설이 된 ‘들국화 1집’을 녹음하게 되었다.
들국화는 언더그라운드가 음악 주류 시장에 들어 온 전형으로 이야기된다. 또한 포크로 시작하여 록 음악을 가미하는 전형적인 영미 밴드의 생애주기를 따라가기도 해서 후대의 음악가들이 참고하기 좋은 선례가 되었다. 전인권이라는 연습이 만든 신의 경지의 보컬도 있었고, 최성원이라는 고집 센 내부 프로듀서도 있었기에 좋은 음악이 나오기도 했지만, 당시 앨범을 만든 ‘동아 기획’의 김영 사장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이야기다.
앨범을 준비하고 음반을 내어줄 레코드사를 찾던 중 전인권의 솔로 1집을 내어 주었던 벽제의 지구 레코드로 가던 중에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당시 음반 소매점인 줄 알고 들어갔던 동네 가겟방에서 머리가 벗겨진 작은 체구의 남성이 그들에게 어디를 가냐고 물어 왔고, 음반을 내고 싶어 한다는 소리에 자신이 하면 안 되겠냐? 제안했다고 한다. 최성원과 멤버들은 어차피 안될 성싶어 당시 계약 시세의 두 배인 2천만 원과 활동을 위한 봉고차를 요구했는데, 그 남성이 덜컥하고 받아들였다. 멤버들은 먼 벽제까지 가는 것보다 서울에서 녹음하게 된 이점이랑 높은 계약금을 얻게 되었다. 그 남성이 전설의 ‘동아 기획 사단’ 김영 사장이었다. 최성원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늘 ‘신의 노릇’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얼마나 성공했냐는 물음에 밴드 구성원들은 대답할 것이 없었다. 당시 계약 구조는 앨범 하나당 얼마라는 선 인세 개념을 뮤지션에게 지급하였다. 앨범의 판매로 들어오는 지금의 저작권, 저작 인접권, 가창권은 당시에 없는 개념이었다. 앨범이 1천 장이 팔리든 1백만 장이 팔리던 음악가들에게 들어오는 수입은 전무하였다. 그런 환경에서 동아 기획은 뮤지션들이 창작과 연주를 맘 편히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녹음실과 연습실을 개방하고, 그런 환경에서 뮤지션들은 사랑방에 출근하듯 기획사로 나와 서로의 음악 품앗이를 하곤 했다. 80년대부터 시작한 진정한 의미의 한국 대중음악 전성기의 중심에는 동아기획이 서 있었다.
1집은 우여곡절이 많은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그 완성도나 신선함은 충격적이었다. 우선 밴드 특성의 합동 작업으로 작곡, 작사가 이루어지다 보니 별도의 편곡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전인권이 흥얼거리며 멜로디의 뼈대를 가져오면, 허성욱과 최성원이 거기에 코드를 입히고 살을 더하는 식으로 곡을 완성한 것이었다. 작곡 실력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던 전인권의 <행진>이 그런 방식으로 만든 대표적인 노래다. 그 노래의 가사에는 친구들의 노래를 홍보하듯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등 다른 노래의 제목을 가사에서 뜬금없이 이어 부른다. 싸울 때는 치열하게 싸우지만, 음악을 하는 순간은 하나가 되는 그런 밴드였다.
1986년에 2집을 내었지만, 2집은 완성도나 흥행에서 어중간한 결과가 나왔다. 1집에 쏟아부었던 시간만큼 들이지 못한 이유도 있거니와, 멤버들이 들고 나기를 반복하면서 집중된 하나의 추세를 만들지 못했다. 그런 이유에서 당시에는 ‘별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던 부침이 계속되고 그들의 음악은 포크의 말랑함도 아니고 록의 강렬함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결국 1987년 공식적으로 들국화는 해산한다. 직후 전인권은 김현식 등과 대마초 사범으로 구속이 되고, 다른 멤버들은 삼삼오오 모여 음악을 하다가 결국 자신만의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때 최성원은 개인 솔로 앨범을 발매하고 여기에 리메이크 명곡 <제주도 푸른 밤>이 수록되어 있다. 최성원 1집은 지금 들어도 세련된 사운드와 깊은 서정의 노랫말이 깊게 아로새겨지는 명곡들이 가득하다.
전인권이 1988년 솔로 <사랑한 후에>로 큰 사랑을 받고 콘서트 위주의 활동을 이어갔다. 90년대에는 미사리에 자신의 전용 음악 카페를 만들어 상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1997년 허성욱이 토론토에서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떠나고, 멤버들은 그들을 기억하는 후배들, 특히 신해철의 주도로 이런저런 무대에 잠정 결합하여 선보이곤 하였다. 전인권은 2003년, 2004년 솔로 앨범을 다시 흥행시키며 우리가 잘 아는 <걱정말아요 그대> 같은 곡들로 사랑받았다. 재결합 이야기가 쏠쏠히 나오고 있었는데 2007년 전인권이 대마초로 또 입건되었다. 5번째 입건이었다. 이 일로 더 이상 재결합은 물 건너간 것으로 보였다.
2012년 기적과 같이 재결합 기자회견을 열고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불후의 명곡’, ‘윤도현의 MUST' 등 단독 특집 방송도 진행하였고, 콘서트도 열었는데 놀라운 것은 완전히 맛이 갔다고 평가되던 전인권의 목소리가 안정을 찾아와 온 것이었다. 원래 전인권은 즉흥적이라는 평판이 있었는데, 최성원이 후술하기를 전인권은 철저하게 계획적인 가수라고 증언하였다. 엄청난 연습과 연습으로 마치 즉흥 변주처럼 들리는 노래를 수도 없이 반복하여 몸에 익힌 결과라는 것이다. 이처럼 멤버들은 기적 같은 재결합하면서 4집을 녹음하게 되었다. 데뷔한 지 30년이 다 되었는데 4집이라는 앨범이 말하듯 정말 사연이 많은 밴드였다. 그 사연은 끝나지 않았다.
2013년 10월 드러머 주찬권이 자택에서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다. 멤버들은 물론 팬과 음악계 모두가 추모와 충격에 빠져들었다. 2개월 뒤인 2013년 12월 3일, 신곡인 <걷고, 걷고> 가 먼저 선공개되었고 6일 뒤인 9일 정규 4집 앨범 들국화가 발매되었다. 주찬권은 불행 중 다행으로 생전 드럼 파트 녹음을 마친 상태였고 이 외의 세션 멤버로는 하찌, 함춘호, 한상원, 정원영, 김광민 등 국내 음악계에서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4집 앨범을 발매 이후 전국 순회 콘서트와 방송 출연 등 활발히 활동할 계획이었으나, 주찬권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런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앨범 발매 외에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주찬권의 죽음과 4집 앨범 발매 이후 들국화는 다시 해체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인권은 자신의 이름을 필두로 한 전인권 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최성원은 다시 제주도로 낙향해 2016년 9월까지 라디오 '제주도의 푸른 밤 최성원입니다' 의 DJ를 맡았다. 성시경, 아이유 등이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을 리메이크하여 여전히 그의 노래는 현재 진행형이다.
전인권은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 들국화의 재결합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아마도 최성원과의 음악적인 견해의 골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된다. 이전에 3인조였을 때는 허성욱이, 재결합하고 나서는 주찬권이 매일 다투는 두 사람의 사이를 메워 주곤 했는데, 주찬권이 사라지고 나자 두 사람의 사이는 좁혀지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재결합은 없지만 언제고 함께 무대에 오를 의사는 있고 전인권이 이야기하기를 연주를 함께하게 되면 최성원이 꼭 베이스를 쳐 주길 희망한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들국화를 비틀스에 비유하는 평론가들이 제법 된다. 음악적인 면에서 포크에서 시작한 서정과 비판의 노래를 증폭된 사운드로 확장해 포크록과 하드록의 경계까지 밀고 간 여정이 비슷해서이다. 실제로 최성원과 전인권은 비틀스를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전인권은 존 레넌을 좋아했고, 최성원은 폴 매카트니를 좋아했다. 1집 앨범의 커버도 비틀스의 ‘Let It Be'처럼 만든 아이디어도 전인권의 발상이었다고 한다. 음악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팀의 두 주축인 뮤지션들의 갈등과 다툼도 매우 흡사해 보인다.
최성원은 나중에 인터뷰나 방송에서 당시를 회고하거나 팬들과 소통하는 다음 카페에서 당시의 이야기를 구술하곤 했다. 최성원은 ‘미국 음악을 그대로 베끼는 풍조’가 너무 싫었다고 전한다. 마치 미국의 52번째 주가 된 것처럼 대중문화가 미국의 그것을 카피하는 방법으로 전파되는 양상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김민기와 양병집의 영향을 많이 받아 ‘우리만의 것’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 지점이 전인권과 부딪힌 이유 중 가장 큰 범주였다고 한다. 전인권은 해외의 명곡이나 유수 곡을 그대로 카피하여 우리의 방식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 레드 제플린이나 스카이락 등의 노래들을 카피하여 부르곤 했다. 그의 솔로 명곡 <사랑한 후에>도 번안곡이다.
최성원에게 들국화의 음악은 어떤 장르냐고 물으면 ‘포크’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한 번도 록 음악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록밴드인 송골매와 산울림 등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고, 소위 미군 부대에서 ‘밤일’로 음악을 하던 사랑과 평화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과는 다른 음악이라고 답한다. 그런데도 들국화의 음악은 증폭된 사운드가 가득하다. 특히 베이스 소리가 무척 큰데, 배음이 아니라 실제로 튕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이는 기법일 수도 있고 최성원의 무의식적인 두드러짐이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최성원은 자신들의 음악이 ‘포크를 세게 연주한 것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들국화의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단지 사운드나 곡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다. 들국화는 주류의 것들을 밀어내었다. 그들은 음악적 ‘자주’의 기초가 되는 포크와 록의 정신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공연의 힘을 믿어 라이브로 대중들과 호흡하였다. 이는 언더그라운드의 모습으로도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희망으로 준 답이었다. 그들은 자본이나 외부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밴드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비틀스’라는 수식은 마땅하다.
들국화는 서정성의 허울 아래 유약하고 나른해지는 근래 대중음악의 행태를 꾸짖으며 씩씩한 아우성을 원하는 음악수요자들이 엄존하고 있음을 실증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공연으로만 컴백한 게 아니라 신곡도 내놓았다는 점이다. 전인권·최성원·주찬권이 재결합 신고식으로 이번에 출시한 새 노래 중 하나는 ‘노래여 잠에서 깨라’다. 멤버들은 현재 신곡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 임진모, 경향신문 칼럼 중 -
‘따로 또 같이’는 1979년 강인권, 전인권 등이 모여 만든 옴니버스 프로젝트 음악 그룹이었다. 제법 틈틈이 활동하여 앨범과 공연을 계속하였다. 최성원도 ‘우리 노래 전시회’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어떤날, 함춘호, 김현철, 장필순 같은 후배들을 양성했다. <달팽이>로 유명한 패닉도 최성원이 제작한 그룹이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한다. 이처럼 전인권과 최성원은 아직도 자신의 영역에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 허망하게 떠나간 중재자 허성욱과 주찬권의 몫까지 음악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언제나 따로지만 또한 같이하는 음악의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음악으로 치열하게 다투는 각자를 인정하는 모습은 존경받을 만하다. 언젠가 두 사람이 무대에 올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그것만이 내 세상을 축복해 주었으면 한다.
매일 그대와 아침 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매일 그대와 도란도란 둘이서
매일 그대와 얘기하고파
새벽 비 내리는 거리고 저녁놀 불타는 하늘도 모두 그대와 함께 나누고픈 날들이 언젠가 한 번씩은 있었다. 그날들에 밤이 깊어 가고 헤어질 시간이 되면 매일이 이처럼 아쉬울 일이 없다. 매일 그대와 아침에 눈을 함께 뜨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새벽 새소리 같은 도입부부터 설레는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11BxN-yaPT0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
과거를 사랑하고 미래를 감당할 마음만 있다면, 젊다는 것 하나 믿고 행진하자는 노래다.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이 전영록, 이상아 주연의 하이틴 영화 <말괄량이 대행진>의 삽입곡으로 쓰였을 때였다. 점층법으로 이루어진 노래는 마음의 행진을 촉구하는 마법이 있다. 군대에 가면 그렇게 듣기 싫은 단어 행진.
https://www.youtube.com/watch?v=cG1RKge8Sg8
난 네가 바라듯 완전하진 못해
한낱 외로운 사람일 뿐이야
제발 숨 막혀 인형이 되긴
제발 목말라 마음 열어 사랑을 해줘
저평가된 2집의 수록곡이다. 이 노래는 느지막이 발견하였다고 할까. 어느 날 중년이 되어, 주변을 잃고 혼자된 날에 혼자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불러 대었다. 참 숨 막히던 날들에 가슴을 뻥 뚫어줄 호소이자 고백이 되었던 노래. 전인권의 허스키한 절규의 절정이 압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bSIdHFjjWE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저기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 수 없어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오늘 밤에 수많은 별의
기억들이 내 앞에 다시 춤을 추는데
들국화의 원곡은 아니고 외국 가수 앨 스튜어트(Al Stewart)의 를 한국어로 번안한 노래다. 전인권의 솔로 앨범에 담기며 대중에게 찬사를 받았다. 전인권의 창법이 가사와 멜로디에 묻어나며 원곡보다 좋다는 의견이 많았다. 원곡은 16세기 영국 작곡가 윌리엄 버드가 만든 'The Earl of Salisbury'의 멜로디를 차용해 만들었으며 가사 내용은 프랑스 혁명이라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bkLAcFvj58
이별이란 생각으로 울지만
그건 너의 작은 착각일뿐이야
가면 어딜가니
좁은 이 하늘 아래 한동안 둘이 서로
멀리 있는 걸 텐데
웃으며 나를 보내줘 언젠가 만나겠지
새로운 모습으로
이별이란 말은 없는 거야
이 좁은 하늘 아래
안녕이란 말은 없는 거야
이 세상 떠나기 전에
최성원 솔로 1집에 담긴 타이틀 곡이다. 지금은 <제주도 푸른 밤>이 리메이크로 더 유명해졌지만, 발매 당시는 이 곡이 더 인기가 많았다. 최성원은 이 앨범으로 지난 음악 생활 시 수입보다 3배는 족히 벌었다고 한다.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원조 격의 노래에서 제주의 냄새가 나는 것은 단지 느낌뿐일까.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 봐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하지만 후횐 없어 찾아 헤맨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들국화의 전설적 명곡으로 꼽히는 곡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긴 곡으로 가사가 철학적이다. 최성원이 군대 제대쯤 만든 곡이라고 한다. 곡의 길이가 길어 제작사가 기피했을 법한데, 동아 기획이라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전인권의 보컬도 좋지만, 마지막 절반 정도 차지하는 최구희 기타 솔로는 압권이다. 특히 허성욱의 건반에 얹힌 노래는 몽환적이나 힘이 있다. 어이없게 이 노래는 전두환 정권 때 금지곡이 되었다. 운동권들이 자주 부른 것이 문제였다. 개인적으로 노래 좀 하고 다녔을 시절 늘 피날레 곡으로 불렀다. 이 노래 후에 다른 노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를 쓰게 된다. 내 삶을 던지고 싶은 노래.
참고:
* 최성원; 들국화의 브레인, 드디어 입을 열다 - weiv 2003년 인터뷰
* 가수를 말하다 - 임진모
* 들국화 다음 카페 (https://cafe.daum.net/march)
* 그리고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