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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07. 2023

김민기 - 아침 이슬 같이 찾아 온 시대의 노래꾼

[너.들.이 10] 청년 대안 문화의 상록수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10 김민기

 한국 대중음악의 근본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던지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음악이라는 것에는 특히 ‘장르’에 대한 고찰이 필수인데, 한국 대중음악 장르의 레거시는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는 각각이면서  또한 모호하다. 일본 엔카에 영향을 받은 트로트 음악은 일단 뒤로 밀어낸다면, ‘포크 음악’이라는 상대적으로 폭넓은 음악 장르가 남을지도 모른다. 흔히 통기타로 대변되는 포크 음악은 그 정의도 폭넓고 다양하다. 그 음악적 변용도 유연하여 전통적인 음악부터 록과 힙합에 이르기까지 포크는 다양하게 이식되어 계승되었다.

한국에서 포크 음악을 떠 올리자면 두 가지의 단어가 함께 따라온 적이 있었다. ‘통기타’와 ‘청년’이 그것이었다. 포크 음악은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의 본산이었으며, 태동하여 발전하던 70~8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의하여 히피적 문화와 결합하여 ‘저항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후대인 지금에서 포크 음악의 계보를 살펴보는 관점은 다분히 논쟁적이다. 트윈폴리오, 조영남, 이장희로 대변되는 쎄시봉 시대를 전면 부정하는 후배들도 있었다. 미국의 52번째 주가 되기를 희망하는 ‘유사 청년 문화’라는 비판이 거세었다. 그래서 ‘우리만의 것’을 위한 움직임이 지속되었고, 한대수, 양병집에 이르러서 비로소 포크 계보로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음악도 ‘나’에 갇힌 자기 고백과 성찰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대안적 시도와 뮤지션을 찾았는데, 그 중심에 오늘의 주인공 김민기가 있다.

김민기는 이웃사촌이었다. 말이 참 적고 쑥스러움 가득한 아저씨였다. 군 복무 중 보증 부도로 흩어져 살던 가족들은 겨우 남은 자금을 들로 일산 신도시로 찾아들었다. 일산은 서울의 서북부에 세워진 위성 신도시이지만, 그 느낌은 섬과 같았다. 출퇴근을 위해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신도시는 대로변에서 운전 연습을 해도 될 만큼 썰렁하였고, 모두가 외지인일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새로운 이웃과 유대를 쌓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때 매일 아침 아르바이트를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마주친 아저씨가 김민기였다. 보자마자 그 김민기가 내가 아는 김민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의 주변머리로는 인사를 건네기도 힘들었다. 그러기를 몇 주 지나자 그 아저씨가 어깨를 툭 치며 건네준 티켓, 바로 학전 소극장에서 하는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초대권이었다. 그렇게 학전에서의 아르바이트가 이어졌고, 그 말 없는 아저씨의 깊은 속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시간을 마주했다. 오늘 그 아저씨, 김민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

 

출처=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쉽지 않았던 천재의 시작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의사였다고 하는데, 6.25 한국 전쟁 피난 중에 북한군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되었고, 산파였던 모친이 어렵게 살림을 일구어 나갔다. 휴전되자 생계를 위해 서울로 이사했고, 김민기는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며 명문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였다. 미술에 관심과 소질이 많아 일찌감치 미술을 전공하였지만, 누나 등의 영향으로 음악을 일찍 접하고 학창 시절 친구와 듀엣을 만들어 이런저런 공연도 하였다.

음악 활동에 더 깊게 빠지면서 학교 수업은 빼먹기 일쑤였다. 그 결과로 1학기부터 학사경고를 받고, 2학기에는 휴학을 하며 본격적으로 음악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때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침 이슬>이나 <가을 편지>를 작곡하며, YMCA의 음악 동아리 홀 ‘청개구리 홀’ 등에서 자작곡을 발표하고 양희은 등의 음악 동료를 만나며 교류하였다. 초기 시절부터 음악 활동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민중가요를 후배들에게 가르치다가 경찰 연행이 되기도 하고, 그때 만든 노래는 금지곡이 되어 음반 활동 자체도 타격이 있었다.

김민기, 양희은 (출처=주간 동아)


그런데도 김민기의 ‘사회적인 음악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73년 초에는 문제작 ‘금관의 예수’라는 김지하의 희곡을 음악극으로 작곡해서 이후 ‘무대’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썼지만,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제재받아 상연 금지 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긴급 체포의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그야말로 ‘저항 문화’의 기수로 화제가 되었다.

음악, 예술뿐 아니라 공부 머리도 좋아 1974년에 카투사로 입대하여 군 복무로 한숨을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관심 문제 사병’으로 분류되어 보안대에 소환돼 조사받았고, 군대 밖에서는 <아침 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솔로 1집도 판매금지 조치가 되었다. 이 결정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1993년 비로소 2집이라고 할 수 있는 독집 CD 4장을 낼 때까지 자·타칭 ‘1집 가수’로 머물렀다. 보안대 조사 후에 영창을 살았고,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되었다. 전역 뒤에 음악 창작가로 공적인 활동에 제재받자 당시 서울대 미대 학장의 도움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중등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 이후 전공을 살려 교편을 잡지 않고 막노동이나 공장 취업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이때 <상록수>로 알려진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을 작곡했고 이것을 양희은이 동명 앨범에 수록했다. 그러나 김민기는 양희은에게 노래를 허락한 적이 없었기에 둘의 사이는 멀어졌다고 한다. 이때의 음악은 대부분 가명으로 노래를 발표하였음에도 그 ‘저항의 정신’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부와 장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또 금지곡,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시기의 막노동과 공장 생활은 그의 인생의 중심에 자리 잡힌 ‘사실주의적 포크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고, 후 ‘공장의 불빛’ 같은 음악 프로젝트의 기본이 되었다.

 

연극 <금관의 예수> (출처=숭대극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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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상징이 되다


‘공장의 불빛’은 문화 사회적으로 의미가 깊은 프로젝트다. 제도나 자본의 도움이나 인정 없이 그저 의지로 비밀 작업을 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한국의 대중음악 작곡가로서 첫 번째 얼터너티브였던 그에게 주어진 이런 고난의 삶의 역정은 필연적으로 두 번째의 반란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1978년에 드디어 두 번째의 문제작인 ‘공장의 불빛’을 제작했다. 이것은 70년대의 대표적인 노조 탄압사례의 하나인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노래극이다. 새로운 양식으로 한국교회 사회 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하지만 불법으로 제작된 카세트 테이프로 보급되었다. 여담으로 송창식 집에서 몰래 녹음되었고, 대학가의 점조직을 통해 은밀하게 보급되었다고 한다. 트윈폴리오나 조영남 등과 달리 송창식은 김민기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바로 송창식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 등 고초를 겪고, 더 결기에 차서 김민기의 조력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냥 ‘잡아가라’는 식으로 대담하게 자신의 이름을 대 놓고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 이상하게도 경찰은 조사만 하고 풀어 주었다. 그러나 당시 김민기는 그 문화적 파급력으로 외신에서도 주목하고 있던 인물이라 일부러 그를 구속하거나 조치하지 않고, 제도적인 제재만 가했다는 후문이 있다. 대학 소강당 등에서 진행되는 공연 등은 그 전파력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고, 보다 파급력이 큰 앨범과 방송을 금지하면 된다는 암묵적 결정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김민기는 결국 귀촌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도 그가 머무는 농가에서 신고와 보고를 하라는 압박을 받게 되자 그는 계속 옮겨 가게 되었고, 그때 쓴 노래가 <천리길>이다.

시대의 노래, 저항의 노래 (출처=딴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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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다시 음악을 하려고도 시도하였으나, 결국 전두환을 필두로 한 새로운 군부가 12.12 군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되었다. 김민기는 다시 귀농하여 농사를 지으며 대외활동을 자제하였다.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이 ‘국풍81’을 계획하면서 김민기를 회유하기도 했다. 당시 ‘3허’ 중 하나였던 허문도가 백지수표를 내밀며 회유하였는데 김민기는 거절하였다. 대신 전라북도 각지의 연극패와 노래패들을 연합하여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984년까지’를 만들어 한국 근현대사 세미나와 함께 공연하는 새로운 시도를 열기도 했다.

김민기의 ‘청년적 저항’이라는 것은 그럴싸한 집회와 모임에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만 하는 작금의 음악인들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바로 그는 ‘삶’으로 직접 자기 생각과 철학을 실천하였다. 바로 민중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자신이 가장 잘하는 문화적 운동을 기반으로 실질적 사회운동의 기반을 만들어 내었다. 일례로 경기도 연천으로 옮겨 참깨 농사를 했는데, 비료회사가 규정량보다 많은 비료를 권장량으로 속여 팔고 있는 것을 알고 회사를 상대로 청구 소송을 내어 배상금을 얻어 내기도 하였다. 민통선 이북의 논에서 벼농사를 청년들과 지으며 농산물 직거래의 새로운 유통망을 도모하는 등 구체적인 사회 운동을 삶으로 보여 주었다.

이때까지도 김민기는 주로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전곡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던 일이 있었다. 그때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재개하자고 설득했고, 결국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연 윤리심의위원회에서 김민기가 참가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무산되었다. 그리고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이 ‘노찾사 기획’은 훗날 ‘다음 기획’이 되고, 현재 협동조합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소속 연예인이 YB, 김제동, 강산에, 정태춘, 박은옥 등이다.

85년 소리굿 시절 (출처=나무위키)

이때 드디어 1987년 민주화의 봄이 시작되자, 일전에 경험한 광부 생활을 토대로 탄광촌 아이들을 다룬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만들었고, 노래일기 ‘엄마, 우리 엄마’를 내기도 했으며, 훗날 록 오페라로 리메이크한 노래극 ‘개똥이’도 만들었지만 역시나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과 판금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에는 귀농 체험을 발판으로 생태운동이자 생활형 협동조합의 효시인 ‘한살림 모임’이라는 NGO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지냈다. 이 NGO가 지금 40여 만 명의 실효 회원을 지닌 ‘한살림 생협’이다. 그리고 한겨레 신문의 발기인이 되면서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그동안 금지곡, 탄압 곡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발표하고 순회공연까지 하게 되었다. 이때 가사를 만들어 송창식이 곡을 붙여 부른 노래가 <내 나라 내 겨레>다.

그의 ‘대안 현재 진행형

2007년 괴테 메달 수여식 (출처=나무위키)


1991년에는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 각본/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해서 김민기 자신이 사비를 들여 대학로에 개관한 학전 극장에서 공연을 올렸다. 이 공연은 기념비적이다. 1991년 시작해 2008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상설 공연되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공연도 진행했고, 이 공로로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가 된 바가 있다. 1994년에 학전에서 극단 ‘학전’을 창단했다. 록 오페라 <개똥이>의 작사, 작곡, 연출, 제작을 뮤지컬 <모스키토>와 <의형제>의 번안과 연출을 담당했다. 그러나 극장은 청년층이 주 타깃이라 운영 재정난이 지속되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따금 앨범을 내어 극단 수익에 사용하였다.

극장 ‘학전’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청년 문화’의 상징이었다. 그의 문화 활동은 ‘돈벌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학전을 운영하였고, 이 학전을 거쳐 간 기라성 같은 한국의 문예인들은 차고도 넘친다. 우선 상징적인 김광석이 그 중심에 있고, 함께 한 동물원, 장필순, 여행스케치 등의 공연 아지트가 되면서 명실공히 청년 문화의 산실이 되었다. 그뿐인가 뮤지컬과 연극을 올리는데, 브로드웨이 중심의 영미 대형 뮤지컬이 아닌 사회 비판과 세태 비평이 담긴 유럽의 소품들을 소개하며 무명 배우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이종혁 등의 유명 배우의 무명 시절의 생계를 책임졌으며, YB의 프론트맨 윤도현이 밴드 활동 이전과 중간 고전기에 노래패와 뮤지컬로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던 둥지가 되었다.


<지하철 1호선>을 거쳐간 배우들 (출처=미디어 프로파일)


김민기를 음악적으로 표현하자면 엄청난 기술 비평을 채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노래는 ‘노랫말’이 주는 힘으로 전해졌다. 우리가 잘 아는 <아침 이슬>이나 <상록수>는 아주 작은 부분이다. 어쩌면 김민기가 주는 메시지야말로 한국의 포크 음악을 제대로 정의해 주고 방향을 지속해 제시하여 주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바로 ‘얼터너티브-대안’의 문화 혁명이다. ‘공장의 불빛’ 같은 노래극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최초의 시도가 되어 이후 80년대의 노래 운동에서 독립적인 생산, 분배 시스템의 원조가 된다. 바로 ‘인디 뮤직’의 시초가 되었다.

1집 발매 시 그는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선택받은 기득권층이라는 대학생, 지식인이었다. 음악도 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음반이라는 테두리에 가두어져 있었다. 그러나 자의인지 타의인지 가늠할 필요 없이 시대는 그의 모든 기득권을 빼앗아 버렸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마지막 발악이라고 해도 좋다. 그의 절박한 심정은 음악과 공연, 그리고 사회운동에서 스스로 구속을 없앤 상태에서 자신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 도약은 음악적으로도 나타났다. 3분의 서정적 양식이라는 음악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일련의 사건이 음악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는 40분짜리의 서사로 확장했다. 그 안에 클래식, 국악, 구전 잡가 등 ‘전통적인 우리 것’이 결합하며 진정한 ‘포크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런 유의미한 그의 음악과 공연 활동은 1975년 ‘대마초 사건’으로 황무지가 된 대중 음악계의 관제 토착화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권력의 폭압에 어쩔 수 없이 대중음악은 국적도 근본도 없이 관제화된 대학 가요로 장악되었다. 그 반면에는 그저 팝 트로트와 유사 포크 음악만 가득했다. 그런 풍조에 김민기의 활동과 상징은 스스로 원하지 않았어도 한국 대중음악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프로듀서 김민기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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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은 문학(가사)과 음악이 결합한 유기적 결합체다. 음악에 실린 가사는 다른 문학의 장르와 달리 음악과의 호흡이 중요하다. 특히 통기타나 어쿠스틱 반주만 있는 단순하고 간단한 음악일수록 가사는 참 중요하다. 거의 모든 대중음악은 서구에서 들어 온 외국 음악의 조류다. 그런 이유로 포크 음악도 암흑기가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의 포크는 외국 음악의 번안이 위주이고 그 한국어 사용이 어색해서 가사가 음악에 묻어 나지 못했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30년이 지나서다. 김민기는 그런 의미에서 독보적이다. 그는 아름다운 한국어를 적절한 선율과 화성 속에서 구사해 내었다. 지금은 잘 안 알려진 그의 음악의 이정표는 이처럼 중요하다.

또 다른 음악적 이정표는 ‘기타리스트 김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전이나 포크를 취미로 접하는 수준에서는 기타 연주는 그저 ‘반주’에 불과했다. 그의 기타 연주는 코드를 내는 것을 넘어 소위 ‘프레이즈’가 드러나는 ‘연주’로 승화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집의 <친구>는 외국 음악에 비판이 많던 그에게 평론가 이백천이 그럼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와라.’라고 이야기하자 하루 만에 만든 노래인데, 이 노래의 기타는 정말 ‘예술’이다. 그가 연주하는 기타는 피아노의 대선율을 동시에 연주하듯 하는 수준 높은 결과를 내었다. 그저 코드를 잡고 ‘좌우지 장지지’ 하던 시절과의 작별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아침 이슬>도 그 연주를 들으면 지금의 기준으로도 놀라울 뿐이다.

 

1990년대 문화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해준 산실 '학전' (출처=세계일보)

청년 정치 가득한데 ‘청년 문화 사라진 세상


한국에서 청년 문화가 공식적인 담론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다. 이 새로운 문화의 주역은 주로 대학생들이었고, 이들의 문화에 대해 저널리즘은 ‘청년 문화’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청년 문화는 원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나타난 기존의 문화와 가치에, 거세에 도전, 저항하였던 청년 세대의 새로운 문화 조류를 이야기하였다. 1960년대에 등장한 미국의 청년 문화는 당시 유행하였던 인권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신좌파 운동과 결합하면서 엄청난 사회적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이때의 청년 문화를 ‘저항 문화(counter-culture)'라고 이야기한다.

70년대 초 한국의 새로운 세대 문화가 청년 문화라고 불리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미국 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이는 전쟁 전 세대와 전후 세대, 그리고 일본 문화에 젖어 있는 이전 세대와 새로운 미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세대와의 충돌이고 차이다. 이를 ‘차이의 문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년 문화는 이런 차이의 문화를 기반으로 기존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수정하고 변용하면서 그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사회정치적인 참여와 목소리를 내기에는 상대적인 약자인 젊은이들의 유일한 표현의 양식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김민기의 음악과 행보는 매우 의미가 깊다.

그는 음악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면 내용상으로는 획일성ㆍ순수성ㆍ건전성이라는 발목 잡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산업적으로는 자본의 이익에 결국 봉사하게 됨을 일찍이 간파했다. 또한 그는 한국 대중음악의 자아가 서구의 대중음악에 의해 장악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벗어나면서 그것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전통음악으로 눈을 돌려 한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을 추구했다. -김형찬(대중음악평론가)-

대중가수의 숙명이자 임무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이다. 다른 말로 인기를 얻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민기를 대중가수 혹은 인기가수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지금의 세대, 특히 청년 세대가 그의 이름을 듣고 그의 노래를 떠 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가 ‘가수’로 활동한 시기에 발표한 앨범은 달랑 한 장이다. 그의 노래 중 ‘국민가요’가 된 <아침 이슬>이나 <상록수>도 김민기의 원래 노래가 아닌 양희은의 목소리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여느 가수처럼 대중적인 무대와 방송활동을 거의 하지 않거나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김민기를 세대가 거듭되는 대중들에게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음악과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과 그의 삶으로 증명한 ‘사회적인 삶’으로 보여준 모습은 중요한 영향력으로 현재 진행하고 있다.

김민기가 제시한 대안 '청년 문화'는 계속 되어야 한다 (출처=조선일보)


요즘 ‘청년’은 소외당하는 세대가 아니다. 소외당하지 않고 연신 호출된다. 특히 정치권에서의 러브콜은 다양하고 지속적이다. 그러나 소외를 당한다고 제대로 대접받는다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이런 양상이 당사자들에게는 더 큰 박탈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시대에 ‘청년 문화’라는 말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청년 정치’는 가득한데, 정작 ‘문화’는 온데간데없어 보인다. 이 지점이 이 세대가 봉착한 문제와 어려움을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청년 문화의 핵심은 ‘대안적 사고’다. 이는 새로운 삶과 사회에 대한 인식과 추구에 대한 기본적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 대한 치열한 비판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런 비판적 사고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7080의 가치가 ‘우리’로의 수렴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래서 90년대부터 해서 수많은 ‘우리’로부터 ‘나’로의 치환은 끊임없이 시도되고 관철하고 있다. ‘나’로의 환원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나’를 다시 ‘우리’라는 연대망으로 유대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 핍박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리얼리즘'의 미학은 외면받는 세상이 되었다. 청년들 스스로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모든 힘겨움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새로운 시대가 왔지만, 그 어려움의 호소에는 여전히 ‘남’과 ‘우리의 사회’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전 시대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새삼스러운 인식에서 새롭게 출발하면 어떨까 싶다. ‘정치’라는 허울 좋은 이름보다 ‘문화’라는 가치가 중요가 때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세대의 가치 정립과 새로운 세대의 창조적 기치의 조화로운 결합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김민기의 음악과 삶은 이런 의미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1991년 <지하철 1호선 공연> 제일 오른 쪽 앞이 설경구 (출처=동아일보)

내가 부를 노래는 내가 만든다


음악가가 스스로 음악을 완성해가는 것은 새로운 정신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굳이 ‘자주(自主)정신’이라는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김민기는 자신이 부르고 연주하는 노래는 자신이 만들었다. 적어도 작사, 작곡, 편곡 중 한 가지는 무조건 참여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싱어송라이터' 문화가 그와 함께 꽃피기 시작했다. 이것은 ‘차이의 문화’로 이야기되는 전 세대와의 결별을 말한다. 자신이 쓴 곡으로 자신의 앨범을 내는 욕구가 폭발하고 유행하며 자리 잡았다. 흔히 음악사적 연대표를 혼동할 수도 있겠지만, 이장희, 김정호, 사월과 오월까지 인기 포크 싱어송라이터들 앞에 김민기가 있었다. 외변적인 상황에서 대중적 인기를 당대에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를 함께 들어 본다.


 친구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1집에 수록된 곡이다. <아침 이슬>과 함께 투쟁의 현장에서 많이 불렸다. 그러나 정작 김민기는 이 노래를 그러한 의도로 작곡하지 않았다. 고3 시절 동해시로 야영을 갔었는데, 그때 후배 하나가 불미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를 그 후배의 부모님에게 알리기 위해 서울 가는 기차에서 즉석에서 쓴 노래라고 전한다. 이후 80년대 시위의 현장에서 스러져간 열사들이나 투옥된 동지들을 기억하는 노래로 자주 불렀다. 누구나 가슴 아픈 친구는 있기 마련이다. 특히 용서받고 싶은 친구.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김민기의 극 저음을 들으면 가슴이 참 많이 울린다.​


https://youtu.be/r0X9dflCO_A



 주여, 이제는 여기에 (금관의 예수)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천주교에서 ‘금관의 예수’는 공식적인 표현이다. ‘그리스도 왕’과 함께 예수에 대한 최대한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식어다.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이를 반어법으로 사용했다. 이 노래에서의 '금관의 예수'는 '얼어붙은 벌판', '가난의 거리'의 '우리'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며, 예수는 이 세상에 없다는 비관의 한탄이다. 1971년, 박정희의 긴급조치에 의해 운동권이 자주 열창했던 아침 이슬을 비롯한 김민기의 모든 음반, 앨범에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런 그의 앞에 김지하가 나타나 서로 의지하며 ‘금관의 예수’라는 희곡에 노랫말을 붙였다. (그런데 지금의 김지하는... 에휴) 이 노래를 중학교 때 주일학교에서 배웠다. 천주교 주일학교는 대학생들이 교사로 활동했는데, 당시 대학생 중 성당 활동을 하는 대부분이 운동권이었다. 그때 세상에 눈을 조금 뜬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이 노래가 가스펠인 줄 알고, CCM 목록에 넣어 둔 것을 보곤 한다. 믿음만큼 사회에 대한 성찰도 함께 하기를 바라는 기도가 저절로 되었다. 오늘은 양희은 버전으로 공유한다.​


https://youtu.be/3UiPdBkoZ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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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군인의 노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자식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만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김민기는 카투사에서 높으신 분들의 명령으로 인해 원통의 12사단 51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로 쫓겨나게 된다. 그곳에서 30년을 복무하고 전역을 앞둔 병기 선임하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막걸리 두 말을 받고 노래를 짓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1976년 겨울 탄생한 ‘늙은 군인의 노래’다. 젊은 청춘을 푸른 군복에 바친 한 부사관의 회한과 아쉬움, 소박한 나라 사랑의 마음이 담긴 이 노래는 곧 병사들에게 구전되어 불렸다. 심의에는 통과하지만, 곧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약하고 패배주의적인 가사가 군인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유신 시절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되었다. 이 노래가 그 생명을 이어간 것은 독재에 저항하던 대학가와 노동 현장이었다. 원래 가사 속의 군인은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 등으로 바뀌어 불리면서 대표적인 저항가요로 탈바꿈하며 오늘날까지도 애창되었다. 2018년 현충일에 기념곡으로 불렸다.​


https://youtu.be/367BPxlbR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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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연못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 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한 편의 동요와 같으면서 중간의 변조로 엄청나게 놀라게 되는 노래다. 중학교 교지 편집하던 시절 담당 지도교사였던 음악 선생님과 MT를 가게 되었다. 그때 기타를 치던 내게 반주하라며 주었던 악보였는데, 당시 관심 두었던 여학생이 이 노래를 암기하듯 따라 불러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언니들이 대학생이었던 이유여서 빠른 사회화가 가능했던 모양이다. 신나는 장조에서 단조로의 변조는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이 노래가 사회에 주목받은 이유는 가사 때문이다. 연못 속에서 평화롭게 살던 붕어들이 서로 싸우다 공멸한다는 이야기가 남과 북, 사용자와 노동자, 영남과 호남, 그리고 권력자와 민중들의 대치를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금지곡이 되었다. 훗날 미군의 양민 학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의 표제가 되었다.

https://youtu.be/W0LpbShfj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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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구

내가 아주 어릴 때 만나
우리 집에 살던 백~구
해마다 봄가을이면 귀여운 강아지 낳았지.
어느 해의 가을엔가 강아지를 낳다가
가엾은 우리 백구는 앓아누워 버렸지.

이 노래는 진정한 ‘반려견’의 노래다. 양희은 동생(양희경은 아니고)의 일기를 기반으로 만든 노래다. 김민기는 ‘아동극’에 많은 힘을 쏟았다. 어린이야말로 미래의 희망이고 자원이라는 생각이 깊었고, 음악의 창작 욕구를 해소하면서 검열의 칼을 비껴갈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어린이는 여성과 함께 인류의 영원한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한 문화는커녕 놀잇거리도 없던 시절에 동요와 아동극을 만드는 그의 생각은 폭이 넓은 사회 운동가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https://youtu.be/8-NPwwCc7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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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편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 노래는 생각보다 잘 알려진 노래다. 그런데도 작곡을 김민기가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거의 초창기의 노래다. 대표적인 혁신 아이디어 디자이너 이노디자인의 김영세와 함께 만든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시절에 만든 노래로 가사는 고은 시인이 작시하였다. 간단한 가사와 단순한 멜로디, 그러나 다채로운 가을이 찾아오는 노래.

https://youtu.be/Pz9fnk4S9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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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우리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 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1985년에 김민기가 작사, 작곡해 양희은이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었다. 이후 1993년 김민기가 본인의 대표곡을 재녹음한 컴필레이션을 발표할 때 제목을 <봉우리>로 줄여 수록했다. 개인적으로 김민기 버전을 좋아한다. 양희은의 말에 따르면 김민기가 다큐 OST로 만든 노래라고 한다. 1984년 LA 올림픽 때 메달을 따지 못해서 선수촌에 남지도 못하고 귀가 조처된 이들을 조명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는데, 그 주제곡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삶이 ‘등산’이 아니라 ‘등반’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다. 그 등반에 함께 해 줄 힘이 되는 노래.

https://youtu.be/urQ7Xybdy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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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자료:
김민기 론 - 최경식 - LP1집 자켓 수록 (1971년)
평전 <김민기> - 김창남 - 한울 출판 (2020년)
[레전드 100人] 김민기, 청년 문화를 노래한 포크 뮤지션 - 임진모 - 지니뮤직
그리고,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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