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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May 10. 2024

노래가 시詩를 만나 만든 서정의 여울

[너.들.이-번외] 노래가 시가 되고, 시가 노래가 되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번외편) - 시를 만난 한국의 대중가요


‘너들이 연재’를 열 편을 이어 내었다. 이런 추세라면 한 분기에 10편, 한 해에 40편의 이야기를 이어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분량으로는 책 두 권 정도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투병으로 긴 쉼표를 찍게 되었다. 그래도 묵힌 원고 하나로 그 쉼표를 대신해 본다.


앞으로의 이야기의 리스트업은 충분한데, 한 편을 쓰는 에너지는 상당히 소모되어 사실 숙제 같은 작업이다. 이미 알려진 음악가들의 성장기와 활동기에 대한 정리를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로 담아내고, 전문가가 아닌 애호가로서의 음악에 대해 비평하는 작업은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고된 일이다. 노동의 강도가 세게 온다. 다시 기력을 찾아 듣고 보고 자란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누길 기대해 본다. 아니 소망해 본다.


처음부터 연재를 시작하였기에 이 콘텐츠를 이어 나가지만, 사실 이곳에서 연재한다는 것은 동안거에 들어간 젊은 스님의 면벽 수도와 같지 않을까 싶다. 대답 없는 선문답을 그저 내면의 메아리로 알아내야 수도승의 하루가 완성되는 일. 그래도 꾸준히 반응하여 주고 응답 주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10편씩 묶어질 분기의 마지막은 번외편으로 꾸려 볼까 한다.


오늘의 번외편 첫 장은 ‘노래가 시를 만나면’이다. 노래와 시에 관한 이야기는 오래된 인류의 문화 활동에 대한 고찰이다. 시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노래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음악에 이야기를 붙여 전달하기 위해 시가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서로가 닭과 달걀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분간할 수 없는 한 몸으로 보인다. 노래는 불리는 순간 시가 되고, 시는 마음에서 노래가 된다.


출처=뉴스페이퍼



수천 관객석을 채운 러시아의 ‘ 낭송회


1990년대 중반에 찾아간 러시아는 그야말로 생소함의 천지였다. 그들의 생소한 언어야 전공이라는 허울로 그나마 익숙한 것이지만, 외국의 문화라고는 간접적으로 접하고 생활 속에 깃든 미국의 모습이 전부였기에 그 생소함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특히 하루를 보내는 일상의 모습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공산주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던 때라 관공서가 문을 여는 시간은 일주일에 3.5일 정도 되었고, 점심시간과 휴식 시간에 작은 문의라도 하면 욕지거리가 돌아오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번듯한 마트들이 들어서는 모스크바라도, 지하철역 앞에 차려진 ‘노점 시장’에서 장을 보는 일은 다반사였다. 가난한 나라였다.


그 가난함 속에서도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났다. 이미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발레 극장 ‘볼쇼이’야 외국인과 새로운 부유층인 ‘노브이 루스키’들이 차지하는 공간이지만, 러시아 골목 골목에 있는 크고 작은 극장에서는 매일 같이 체호프의 <벚꽃 동산>, <갈매기>와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을 저렴한 비용으로 볼 수 있는 곳이 널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은 것은 중대형 극장에서 하는 ‘시 낭송회’였다.



러시아 시 극장 포스터 (출처=러시아 문학 협회)


러시아 시가 작시법에 의해 ‘운율 강세 시’라고 하여 지금의 랩음악의 ‘라임’ 같은 것의 원조 격이라 음악과 친밀하기도 하지만, 러시아 국민들은 자국의 문학에 대하여 엄청난 자랑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시 낭송은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러시아 문화의 오랜 전통이다. 그것은 예술과 표현의 중요한 형식으로 간주하며 문학 모임, 시 축제, 연극 공연과 같은 문화 행사에서 자주 공연된다. 시작법 자체가 이 공연을 위해 만든 노래와도 같다. 강약, 약강을 살리고 남성형 어미와 여성형 어미로 라임을 맞추어 시에 양성의 감성을 분간하기도 한다.


러시아의 시 낭송은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기술을 특징으로 한다. 많은 사람이 시 낭송을 마스터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낭독자는 자신이 낭송하는 시의 의미와 뉘앙스를 깊이 이해하고 목소리와 몸짓으로 시의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일종의 1인 오페라나 노래극을 시로 대신한다고 할까. 그 극장을 꽉꽉 채운 모습은 장관이다. ‘서커스’와 함께 시 낭송은 구소련의 사회주의적 예술 통제에서도 살아남은 장르였다.


러시아 시 낭송에서는 시의 음악성과 리듬을 강조한다. 낭독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하여 시의 분위기와 어조에 맞는 특정 흐름과 종지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낭독자는 시의 감정과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손짓과 표정을 사용한다. 러시아 시 낭송의 가장 유명한 실무자 중 한 명은 위대한 열정과 강렬함으로 시를 낭송하는 능력으로 유명한 소련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다. 그는 저항 음유시인으로도 유명한데, 영화 <백야>에서 주인공이 텅 빈 극장을 찾아 허스키하고 격정적인 러시아 노래에 독무를 하는 장면에 쓰인 노래가 비소츠키의 <야생마>다. 세르게이 예세닌과 알렉산더 블록과 같은 시인의 작품을 통기타로 음률을 깔고 읊조리는 것은 대표적인 러시아의 현대 시 낭송의 상징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출처=더위키)


러시아 시 낭송은 러시아인들의 문화생활 중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 풍부한 문학적 소산에 특유의 감성이 더해진 민족성이 어우러진 전통이다. 시는 이처럼 음악성을 내재하고 있다. 감정적 깊이는 ‘운율’이라는 리듬을 만들어 낸다. 러시아 문학은 그들의 굴곡진 역사에 반사되어 더욱 빛나는지도 모른다. 단지 문학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대중들에게 깊게 스며든 이유 중 하나가 ‘시의 대중화’에 있다.



노래는  ‘ 담는다


미학적 역사적 탐구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시의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반대로 시가 음악에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관찰하고 사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힙합과 랩 음악이 부상하면서 구어의 리듬과 운율에 크게 의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또한 하나의 시적 표현의 확장이라는 연구와 시어의 표현이 변화하는 사회와 시대에서 어떤 영감을 주는지를 관찰하는 일은 흥미롭다.


역사를 통틀어 시와 노래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두 형식을 넘나들며 작업한 시인과 작곡가의 예가 많이 있다. 우선 밥 딜런(Bob Dylan)은 유명한 음악가이자 작곡가로 그의 작품은 종종 시적이라고 묘사되며 그의 가사 중 많은 부분이 시집으로 출판되었다. 2016년 딜런은 시와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노래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유명 대학 문학 강의 속에서도 시의 한 례로 등장한다.


밥 딜런 (출처=문화뉴스)


마찬가지로 극저음의 <I'm your man>으로 잘 알려진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은 캐나다의 시인, 소설가, 작곡가로 그의 작품은 종종 시적 완성이라고 이야기된다. 그의 가사는 깊이, 복잡성 및 풍부한 이미지로 유명하며 그의 많은 노래는 시적 특성으로 찬사를 받았다. 그의 시 <Suzanne>은 음악으로 재창조되어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가 되었다.


패티 스미스(Patti Smith)는 시와 노래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음악가의 예로 자주 인용되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다. 그녀는 강력하고 시적인 가사로 유명하며 그녀의 노래는 종종 문학 작품처럼 읽힌다. 그녀의 앨범 <Horses>는 시와 록 음악의 고전으로 양쪽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60년대의 유명 밴드 리드 짐 모리슨(Jim Morrison)은 또한 출판 등단한 시인이었으며 그의 가사는 시적인 특성으로 인해 종종 찬사를 받았다. 그의 시 <The Celebration of the Lizard>는 음악에 맞추어 도어즈의 라이브 공연의 중심이 되었다.


힙합 마니아들에게 잘 알려진 투팍(Tupac Shakur)은 힙합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진 래퍼이자 배우다. 그의 가사는 종종 사회 정의와 개인 투쟁의 주제를 다루었으며 그의 시는 그의 예술적 결과물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 그의 시 <The Rose That Grew From Concrete>가 음악으로 재창조되어 히트곡이 된 바가 있다. 이들은 시와 노래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 시인과 음악가의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그들은 예술적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언어와 음악의 지속적인 힘과 시와 노래의 관계에 대한 풍부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투팍의 시집 (출처=리드머)


궁극적으로 시와 노래의 관계에 대한 미학적 역사적 탐구는 이 두 가지 표현 형식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감을 주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방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의사소통과 예술적 표현의 수단으로서 언어와 음악의 지속적인 힘을 강조하고 인간이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이해하려는 방법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한국에서는 ‘시’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오죽하면 SNS에서 쓴 짧은 삼행시가 유행하여 시 부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시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시인은 늘 결핍과 가난 속에 산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이라는 말이 있다. 시는 가난해진 후에 더 좋아진다는 말이다. 중국 송대의 시인 구양수의 말로 알려졌는데, 가난이 예술적 영감과 승화 작업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로 들린다. 반은 수긍이 가면서 반은 저항하고 싶은 이야기다.


현대 사회에서 글을 쓰는 일은 그저 ‘문학과 예술의 경지’를 이루어 내고 싶은 욕구만은 아닌지 오래다. 세상에 인정받고 경제적 가치를 보상받기 위한 마음이 솔직함으로 앞서고 있다. 이런 연유에서 글쓰기는 유행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에세이인지 자기계발서인지 구별되지 않는 온갖 글쓰기는 대유행이다. 그러는 사이에 문학의 본질이자 근원인 ‘시’는 점점 상대적 홀대 받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주로 고전에 속하는 옛 시인들의 시가 노래로 많이 불렸다. 교과서에서 많이 접했던 김소월, 윤동주, 이상화, 서정주의 시들은 노래로 만들어져 익숙해진 지 오래다. 딱 거기까지다. 그 이후에도 시를 노래로 만들거나, 노래를 위해 시를 짓는 일은 거듭되고 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런 이유에서 요절한 가수 김광석은 현대 시를 노래로 만들어 널리 알리는 일을 생애 마지막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있었다. 돌연사이자 의문사가 있었던 날에도 시인이자 작곡가 백창우와 함께 그 프로젝트를 논의했다고 한다. 아직 러시아에서는 창작 음유시인의 콘서트가 만원사례를 이루고 있다. 우리의 주옥같은 시들이 노래로 많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가 노래를 만나 들려주는 곡들을 소개해 본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 , 이현섭 작곡, 박인희 노래, 1976)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시집 ‘박인환시선집’에 실린 작품이다. 노래의 가사는 박인환의 시와 조금 다르다.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원시와 노래 가사가 눈에 띄게 다른 부분은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을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으로 바꾼 부분과 맨 마지막 행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로 바꾸어 가사 마지막 행으로 삼았다. 이 후반부를 노래의 후렴처럼 반복했다. 시어를 원형 그대로 살리되 작곡의 범주 안에 맞추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이 노래는 시가 발표된 다음 해 1956년 초봄에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환갑’이 넘은 오래된 노래다. 이 노래에 대한 사연은 여러 이야기로 나뉘어 있지만, 대략 이런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명동에 ‘경상도집’이라는 주점이 있었다. 명동예술극장 옆에 위치한 예술인들이 들락날락하는 술집이었다. 어느 날 시인 박인환을 비롯해 극작가 이진섭, 언론인 송지영, 가수 나애심 등이 모여 술을 한잔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나애심에게 노래 한 곡을 요청했다. 나애심은 당장 부를 노래가 없다고 연신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이를 본 박인환이 누런 종이에 무언가 끄적여 사람들에게 내밀었는데, 이것이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였다. 이 시에, 작곡에도 일가견이 있던 극작가 임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였고, 나애심이 흥얼거리며 불렀다고 한다. 이내 유명 테너 임만섭이 합석하게 되었고 그가 이 노래를 불러 지나가던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고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 노래를 누가 처음 불렀는가는 의견이 나뉜다. 공식적으로 처음 부른 이는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현인이다.


현인이 발표할 당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현인의 창법과 무심하면서 맑은 슬픔이 드러나는 이 시를 표현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오랫동안 잊혔던 이 노래를 1976년 통기타 가수 박인희가 불러 크게 히트시켰다. 즉석에서 만든 노래라는 특징과 더불어 작시는 박인환이 했지만 결국 나애심이 부르도록 만든 노래라는 점에서 박인희의 맑고 슬픈 목소리가 딱 들어맞은 이유가 되었다.


박인환 (출처=더위키)


박인환은 이 시를 쓰고 일주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가면>을 쓸 당시 첫사랑에 대한 슬픔이 극대화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세상을 떠나기 수일 전에 열린 ‘이상 추모의 밤’부터 시작해서 삼사일을 매일 술을 부었다고 한다. 시인들의 삶이 그러했고 당시 서민들의 살림이 더해져서 박인환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다. 술을 퍼마시고 돌아온 날 심장마비로 별안간 숨을 거두었다. 향년 31세였다.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뒤 무덤 앞에 아담한 비석을 세워졌다. 비석 앞면에는 <세월이 가면> 첫 번째 연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가 새겨져 있다. 시가 노래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노래.


https://youtu.be/EqkDh1NXbOo



개여울 (김소월 , 이희목 작곡, 정미조 노래, 1972)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개여울이라는 의미는 ‘개울의 여울’을 의미한다. 여울은 하천 바닥이 작은 급경사를 이루어 물의 흐름이 빠른 부분을 말한다. 여울의 하천 바닥은 보통 굵은 조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물은 소리를 내어 흐른다. 개울의 여울이 소리를 내면 얼마나 큰 소리를 내겠냐마는, 시상 가득한 시인의 가슴에는 큰 소리로 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의 중심은 ‘당신’과 말하는 이의 관계다. 단순히 본다면 떠난 임에 대한 깊은 회한이다. 그러나

조금 더 물러서서 본다면 흘러가는 것, 그래서 결국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에 대한 소월의 사유적 관찰이다. 물은 섭리를 따라 ‘간다.’. 이것이 물의 본성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 그러면서 소리를 낸 물은 이미 없어지고 소멸하여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겠다는 다짐은 사라진다고 모두 소멸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시인의 관조를 말해 준다. 체념이 아닌 섭리의 수긍은 또 다른 우주를 만난다. 사랑 이야기로 보였던 시는 요즘 세상에 대한 통찰 깊은 경고로 들린다. 물러날 자가 버티고, 흐름을 막아 세워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흘러 지나가는 것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면 문제는 일어나지 않거나 커지지 않는다. 그러나 굳이 지킬 게 많은 욕심이 사달을 만든다.


중국의 사자성어 ‘급류용퇴(急流勇退)’가 떠오른다. 여울같이 급속도로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에서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을 ‘용퇴’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그 용퇴다. 봄이 잔인하다는 말은 아이러니 같지만 사실이다. 어린 생명들이 각축전을 통해 꽃을 피운다. 나머지 도태된 존재는 스러지고 만다. 스산한 봄에 세상의 여울목에 나가 앉아본다. 그곳에서의 울리는 소리를 귀 여겨 들어 보아야 할 때다.


1925년 초판 본 (출처=배재학당역사박물관)


한국의 서정시를 대표하는 김소월의 시는 노래로 제법 많이 만들어졌다. 한때 시험문제에 늘 등장하던 <진달래꽃>은 여러 가수가 여러 버전으로 소개되었고, 시 해석에 다른 토를 달지 못할 것 같은 <부모>도 어르신들에게 잘 알려진 노래다. 그 밖에 송골매의 전신인 활주로가 가요제에서 입상한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도 김소월의 시다. 요즘 세대까지 아우르는 노래가 <개여울>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유가 영화 음악 작곡가 정재일과 작업한 <개여울>이 많이 알려졌고, 최백호, 심수봉, 우순실부터 김종국, 적우, 웅산까지 많은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그중에서 정미조의 노래가 가장 좋다.


정미조의 <개여울>은 1972년 그녀의 데뷔 앨범에 실려 있다. 이화여대 서양화과 출신의 정미조는 대학 재학 시절에는 학생 스타로 통했다. 7년 동안 가수로 활동하면서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동경 국제가요제에서 수상하며 음악 인생의 정점에 선 그녀는 1979년 돌연 은퇴하고 파리에서 약 13년의 유학 생활을 했다. 귀국 후 수원여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 이후 2016년 2월에 정규앨범 ‘37년’을 발매하며 <개여울>이 다시 실렸다.


https://youtu.be/tjof-yk8PZw



향수 (정지용 , 김희갑 작곡, 이동원과 박인수 노래, 1989)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으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의 시어는 현대적이다. 지금 보아도 ‘옛 시’ 같은 느낌이 없다. 어휘가 풍부하고 능란한 시어 구사를 통해 선명한 이미지를 살렸다. 이런 이유에서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힌다. 청록파와 윤동주, 이상을 추천 등단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감각적 이미지를 구체화함으로써 감각적 이미지즘의 독창적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으며 한국 현대 시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정지용의 시는 과거 교과서에서 제대로 접해 보지 못했다. 이유는 그의 굴곡진 삶과도 연관이 있었다. 우선 그는 ‘친일’에 대한 의혹이 모호하게 남아 있다. 이것이 친일 문학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일제와 관련한 시 <이토>가 그 중심에 있다. 그런데 시의 어조 자체가 모호하다. 전쟁을 찬양하고 일제를 드높이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 시의 어조는 굉장히 모호해서 친일 시인지 자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이유에서 정지용 자체는 친일 시인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굳이 분간하자면 압박에 못 이겨 두루뭉술한 글을 하나 내어놓고 이내 절필한 모양새다.


또한 6.25 당시에 종적이 사라진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원래 좌파적 활동을 주로 하던 그는 다른 월북 작가들과 달리 전향한다. 보도연맹까지 가입한 그는 서울 수복 시에 행방이 사라졌다. 그 후에, 폭격에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의 사망 당시에 대해서 월북행인지 납북행인지 의견이 분분한 채 아직 명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유가 명확하지 않지만, 정지용의 시는 교과서에서 제외되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전까지는 친북인사로 규정되는 바람에 시가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까지는 정지용 시인이라는 인물 자체가 대한민국 정부 공인의 친북 성향 문인으로 낙인되었고, 그의 시작(詩作) 대부분이 모두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정지용 시인의 시가 출판되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남산으로 끌려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1988년이 되어서야 납북으로 인정되어 해금되어 비로소 정지용 시인의 시가 출판되었다. 그런데도 수능(1994학년도)이 되어서야 정지용의 시를 교과서에서 볼 수 있었다. 90년대 학번 이전 청춘들에게 늘 ‘정X용’으로 표현되던 ‘몰래 읽던 시’ 중 하나였다. 특히 노래로 만들어진 시도 사연들이 많았다. 정지용 시에 음을 붙여 만들었던 노래들이 금지곡 지정을 면하고자 가사를 바꾸게 되는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채동선의 <고향>. 박화목이 개사한 <망향>, 이은상이 개사한 <그리워>가 있다.


정지용, 향수 (출처=IT조선)


그러던 중에 우리에게 ‘정지용’을 알린 것은 노래 <향수>였다. 당시 최고의 작곡가였던 김희갑이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이고,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듀엣으로 노래했다. 이 시는 가곡으로도 많이 만들어졌지만 지금 세대에게도 알려질 만큼의 노래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각종 시험 역대 필적 확인란 문구 중 가장 많이 등장한 시로, 수능에만 3회, 모의평가까지 포함하면 총 5회 나왔다고 한다.


최근에 생을 마감한 테너 박인수는 처음 이 노래를 부른 뒤 클래식계에서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이유는 서울대 성악과 교수가 ‘딴따라’의 음악을 했다는 이유였다. 일종의 ‘품의 손상’이랄까. 당시까지 클래식 전공자가 대중가요를 부르거나 무대에 서면 제적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런 이유로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다. ‘팬텀싱어’ 등 크로스 오버의 음악이 사랑을 받는 요즘에 비추어 보면 이해가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 정지용이라는 이름은 이 노래 덕에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특히 아름다운 그의 시어는 사람들의 소름을 돋구었다.


노래는 존재의 원천이자 삶의 안식처인 고향을 노래한다. 오롯한 감각과 향토적 서정을 바탕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노래는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도와주는 힘이 있다. 시적 자아와 자연과의 대화는 시 자체를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지즐대는' '해설피' '풀섶' '함초롬' 등의 시어는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 준다. 여기에 더해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 '짚베개' 등의 토속적인 소재들이 그 아름다운 서정의 밑그림에 풍성한 채색을 해 주는 듯하다. 고향이란 정겹고 아늑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심금을 울렸다.


https://youtu.be/32Tnq3xqHgI?si=_qAscVmOqYwTftT3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 안치환 작곡, 안치환 노래, 1993)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가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했기에
이토록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나

꽃은 시들고 해마저 지는데
저문 바닷가에 홀로 어둠 밝히는 그대
그대와 나 그대와 나
해뜨기 전에 새벽을 열지니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밤마다 별빛으로 빛나는가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흔들어 새벽을 깨우는가

꽃은 시들고 해마저 지는데
저문 바닷가에 홀로 어둠 밝히는 그대
그대와 나 그대와 나
해뜨기 전에 새벽을 열지니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시점을 1960~1970년대로 본다면 이를 기점으로 한국의 근현대사의 짧은 주기는 분기한다. 이전을 근대라고 이야기하고 이후를 현대라고 지칭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근대 시인들의 시중에 노래로 가장 많이 만든 시는 김소월의 시라면, 현대의 시는 당연히 정호승의 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암울한 민주화 투쟁의 시기에 투쟁적인 노래를 위한 저항시, 김지하나 박노해의 시들이 노래로 많이 만들어졌지만, 이는 일종의 특수한 목적을 가진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호승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이유는 주목할만하다.


정호승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로 등단하였다. 1979년 <슬픔이 기쁨에게>를 출간하면서 대중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다. 정호승 시의 특징은 ‘슬픔’에 있다. 그 슬픔이 어둑하고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다. 슬픔을 통해 희망과 기쁨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묘한 위로와 응원을 받게 된다. 한국 사회의 그늘진 면과 분단의 현실 그리고 산업화 등으로 변해가는 것을 소재로 삼았다. 이 소재를 토대로 삼아 아픔과 상실을 달래는 시어와 소외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따스함을 주는 시문을 세상에 들려주었다.


정호승의 시로 만든 노래는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가 유명하다. 여러 시가 노래로 만들어졌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곡은 예전 민중 가수로 잘 알려진 안치환의 작업 덕분이었다. 2008년에도 자신의 9.5집 음반인 ‘정호승을 노래하다’에서 정호승의 시 15편을 노래로 만들어 내놓기도 하였다. 이 음반에도 수록된 곡이자 1993년 안치환 3집 음반 ‘Confession'에서 이미 발표된 노래 <우리가 어느 별에서>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유명해졌다.


출처=노컷뉴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도 시인 정지원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안치환은 <우리가 어느 별에서>는 안치환은 시를 노래로 만드는 작업을 꾸준히 하였다. 안치환이 대학교 4학년이던 1987년 노래패 친구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식장도 못 잡고 선배 사무실을 빌려 하는 허름한 결혼식 축가로 만든 노래가 이 노래였다. 사실 이때는 발표할 생각이 없기도 하고 저작권에 대한 개념도 확실하지 않아서 시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만든 노래였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동창 모임에 참석한 정호승 시인에게 일행이 합창으로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불러주어서 이런 노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후술했다. 반지조차 주고받을 수 없는 친구를 위해 만든 노래라는 사연을 듣고 안치환에게 정식으로 시를 사용하게 해 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의 작업이 이어졌다고 한다.


https://youtu.be/muzIOnP6Xxc



시가 노래가 되고, 노래가 시가 되는 우주를 위해


이외에도 소개하고 싶은 노래들이 있었다. 특히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같은 노래는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이 가득하였다. 김광석이 부른 류근 시인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도 마음에서 일렁였다. 그러나 ‘다음 기회’를 이야기해 본다. 요즘 시를 읽은 지 오래다. 아니 시를 접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릴 적 처음 한 동아리가 초등학교 시절 ‘시문예 창작반’이었고, 그 학기 마지막 발표회에서 시 낭송을 전교생 앞에서 하던 생각이 선하다. 시가 노래가 되고 노래가 시가 되는 시간이 부쩍 늘어나기를 바란다. 시가 많이 읽힌다는 것은 결국 서정의 우주가 계속 이어진다는 이야기니까. 정호승 시인도 이런 말을 남겼다.


“서정의 물기가 말라버리면
시라는 나무는 죽는다.”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를 사람 탓을 하기는 어렵다. 서정의 물기가 말라버린 세상의 온도와 습도 탓이다. 그 온도와 습도의 유지와 지속을 위해 시가 노래를 만나는 일은 매우 뜻깊다. 다음에는 노래가 시가 되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오늘따라 시가 고프다.



• [너.들.이] 지난 연재

01 어떤날 - 고요한 울림, 조용한 파장의 혁명

02 015B - 청춘처럼 빛나던 어설픔

03 신해철 - 아직도 꿈꾸는 민물장어의 샤우팅

04 김현식 -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05 유재하 - 불순(不純)의 시대에 초록색 여름을 노래하라

06 김광석 -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07 산울림 - 아마 놀랄 거야, 깜짝 놀랄 거야

08 동물원 - 어딘가에 있을 그 무언가를 아직 찾고 있을 나에게

09 들국화 - 후회없이 모든 꿈을 찾아 헤매었던, 그것만이 내 세상

10 김민기 - 아침 이슬 같이 찾아 온, 대안 청년 문화의 상록수


  참고 자료:

주옥같은 시로 만들어진 대중 가요 - 써니플레이
시가된 노래, 노래가 된 시 - 한계레신문
노래 이야기 - 민중 언론 시민 연합
그리고, 각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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