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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25. 2023

크리스마스의 조연들

동방박사, 목동들, 그리고 학살된 아기들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2024  베들레헴이라는 낯선 땅에서 태어난 유대인의 생일에  세상이 자신의 것인  기빠한다. 사실 베들레헴은 (레헴)이라는 뜻을 기반으로 빵이 집집마다 구워지는 풍요를 비는 땅이었다. 현실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척박한 환경의  땅은 이제 예수를 배척하던 이스라엘이 아닌 팔레스타인의 땅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일까? 유대인이 예수를 믿을 것이라는 무지의 틀은 언제쯤 깨질까.


가장 미소한 자 (사자=nody.ir)

어찌 되었든 주변머리 없이 우직한 목수의 아내는 동정녀로 아이를 가졌고, 이런저런 일들로 나선 길 위에서 아기를 낳았다. 그 아이는 이집트로 피신도 가고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와 서른을 맞이할 무렵 대단한 각성을 하고 하느님의 아들이라 칭하였다. 결국 로마제국과 유대 기득권들에 의해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고 부활한 다소 핍진성 떨어지는 오래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주인공의 탠생일의 주인공은 예수겠지만, 그 탄생 시기의 조연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이 완고하고 거대한 종교와 신앙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니까.



1. 동방박사, 쓰리 킹스(Three Kings), 이방인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에 위에 떠오른 별을 보고 아기 예수와 그의 모친 마리아를 찾아낸 이방인들이다. 오래전부터 메시아의 출현이 예언되었고 동방이라는 지칭은 해석이 다양하다. 페르시아, 인도, 바빌론, 아라비아 등의 현자들이라는 설부터 동쪽의 별을 본 이집트 점성술사란 이야기도 있다. 어찌 되었는 예수에 대한 탄생 경배는 이방인들의 몫이 되었다.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자신들의 보물인 황금, 유향, 몰약을 바쳤는데, 이는 왕권, 신성, 희생의 상징이다. 세상에 온 신의 아들에 대한 경배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예나 지금이나 신묘한 약재로 쓰이는 것들인 것을 볼 때, 뜻밖의 유랑길에 나선 아기와 산모의 건강과 생명유지를 위한 실질적 선물로 이해되기도 한다.


동방박사의 경배, 마이스터 프랑켄 (사진=wikimedia commons)


고대 문헌에는 이들을 마기(Magi)라고 불렀다. 마술사, 점성술사라는 의미로 훗날 Magician, Magic 어원이 되었다니 마술은 동방박사들의 유산인 셈이다. 희랍어로 쓰인 성경이 라틴어로 정착하고 다시 영어나 기타 주류 언어로 번역되었다.  과정에 뜻밖의 단어로 변하는데, 몇몇 영어 성경에서는 (kings)으로 번역되어 있다.


옛날 한국 천주교에서는 동방박사를 삼왕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천주교가 일찍이 민간에 정착하었기에 한자 표현이 제법 많은 점도 흥미롭다. 매년 1월 첫 일요일을 "예수공현축일"이라고 한다. 예수가 사탐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날이라는 뜻이다. 이날도 여전에는 "삼왕 내조첨례"라고 했다. 조지 클루니 주연의 영화 <쓰리 킹즈>는 이라크 고대 보물을 노리는 미군들의 소동극이다. 이 미군이자 도적들을 이 동방박사에 빗대어 "Three Kings"라 불렀다.



2. 목동들, 가장 미천한 사람들


목동(牧童)은 일이 바쁜 어른들을 대신 혹은 보조해 방목한 가축들을 관리하는 아이, 청소년들을 이야기한다. 어린 양치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들은 유목을 하는 노매드들이다. 정해진 주거지가 따로 없고 양태들이 잠드는 곳이 그들의 잠자리가 된다.


동방박사들로 인해 예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 공현-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먼저 와서 경배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목동들이다. 베들레헴 들판에 노숙을 하던 목동들이 찾아온 것이다. 동방박사들처럼 예연을 감지할 수도 없었고, 별이 그들을 안내한 것도 아니다. 그저 묘한 기운에 이끌려 마구간 구유에 누운 아기의 아우라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린다.


The Adorption of Shepherds, 파울 루벤스 (사진=msch.or.kr)

원래 중세 시절 아기 예수의 탄생 그림은 동방박사 세 사람이 경배하는 것이 훨씬 유행했었다. 당시엔 그림의 수요층이 아무래도 귀족이나 왕족들이었다. 자신을 대리할 수 있는 동방박사가 잘 차려입은 상태로 예수를 친히 방문하고 값비싼 선물을 주는 장면이 더 끌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다시 바로크의 시대에 다른 해석이 필요해졌다. 평범한 사람들이 성화에 등장하는 것이 필요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한 끝에 목자, 그것도  떼를 돌보는 착한 목동들을 점지한다. 루카 복음의 목자들이 천사의 이름을 받아 아기 예수를 보고 세상에 알렸다는 대목이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표현이 늘어나게 되었다.


원래 목동들의 경배는 성경에서도 거의 다뤄지지 않던 주제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예수를 기리는 그림뿐 아니라, 미사 예식에도 영향을 준다. 성탄 전야 미사에서 '구유 예절'이라는 예식으로 아기 예수를 잘 차려 놓은 구유에 안치하고, 신자들이 줄지어 경배를 한다. 그때 천사의 이끌림에 찾아온 목동들이 되어서 말이다.



3. 대학살의 희생 아기들, 인류 구원사의 희생양


예수의 탄생은 여러모로 기득권에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수년 전부터 세례자 요한이라는 놈이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 일성하고 다녔다. 성경학자들과 일부 사람들은 구약의 "기름 부은 자"의 강림이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당연히 당시의 기득권인 유대교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들은 부정했다. 지금도 유대교는 메시아의 강림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를 사기꾼 예언자로 규정한다.


그중 가장 신경을 쓴 사람은 무늬만 유대의 왕 헤로데였다. 최후의 예언자 요한의 이야기가 계속 거슬렸다. 결국 미리 손을 써서 동방박사들에게 메시아 출현 시 알려달라고 했다. 동방박사들은 꿈의 지시를 받아 유대의 허수아비 왕 헤로데를 만나지 않고 바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노여움과 불안감에 사로 잡힌 헤로데가 그 시기에 태어난 베들레헴 안의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나자렛의 성 요셉은 동방박사의 고지로 미리 알고 이집트로 피신해 간 뒤였다.


헤롯왕에게 학살당하는 아기들, 니콜라이 푸생 (사진=wikidepia)


그러나, 풍요의 땅을 꿈꾸던 베들레헴은 금쪽같은 아이들을 잃었다. 잘못이라고는  시기에 태어난 것이 다였다. 모세의 기적으로 이집트의 맞손들이 떼죽임을 당한 것과 다르지 않은 대학살이었다.  없는 아이들의 죽음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의 탄생을 위한 것이라니 인류 역사상 최대의 역설적 사건이라고   있다.


이집트로 피신한 세 가족은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으로 돌아간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신, 만들어진 위험>에서 이유를 추론했다. 원래 나사렛에서 태어났다는 요한복음 외의 이야기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별, 다윗의 탄생지이고 여언자들이 콕 찍은 도시이기에 잘 끼워 맞추어야 했다. 세금 징수를 위한 로마제국의 인구조사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예수를 출산했다는 상상이 가미된 사후 해석이 복음사가들에 의해 정설이 되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베들레헴의 아이들이 영문 모를 죽임을 당한 것이다.



예수도 사라진 크리스마스, 그리고 그늘들


크리스마스는  그대로 그리스도의 일이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의  번째  축일이다.  번째는 당연히 부활절이다. 그러나, 지금의 크리스마스는 어떤 모습인가? 예수의 흔적은 명동성당 구유에 가서나 겨우 찾을  있다. 거리에는 출처 분명의 조명 가득한 트리장식이 넘치고, 아이들은 예수가 아닌 빨간 옷을 입은 털북숭이 할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린다. 예수의 생일이라며.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종교적인 기념일"의 의미를 넘어선 지 오래이다. 그냥 세계인들이 구색을 맞추고 예수 핑계 삼아 찰지게 즐기는 날이다. 고대 태양절의 유산이니, 산타클로스의 유래와 각종 캐럴의 스토리는 일단 접어 넣고 즐거운 날이다. 인사도 Merry Christmas 아니던가. 기독교 교회력 중 가장 중요한 날,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된 부활절같이 일요일로 고착시키는 절충이 필요 없는 날이다. 왜? 한 해가 고작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까. 공휴일의 의미는 이것이다. 한해의 즐거운 마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기독교" "그리스도교" 한자 음차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기도" 억지 연결시켜 기승전, 기도하는 분들이다. 그러니 개신교 집회에 예수를 부정하는 이스라엘 깃발이 나부끼는 것이겠지. 정작 예수의 고향 베들레헴과 나사렛에는 '크리스마스' 없다. 이런 기본적인 상식을 위에 믿음을 쌓아가면 좋겠다 싶다.


김수환 추기경이 1986년 성탄전야에 서울 도봉구 상계동 재개발 지역 노천에서 철거민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한국천주교주교회의)

에수의 출현은 사실의 유무를 떠나 인류 역사의  사건이다. 실체이든 상징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그가 설파하는 교리는 혁명이었다. 서로 사랑하고, 가장 낮은 이를 존대하며, 원수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한다. 이전 구약의 무시무시한 하느님이 갑자기 말랑해진 것일까. 고대부터의 율법, (함무라비 같은)들을 맞선 설교에 기득권들은 불편하였을 것이다.  작은 예수의 복음은 교종주의의 종말이 되는 르네상스를 부추겼고, 근대의 혁명과 인본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지금의 세상이 가능하게  인간 역사에 대한 헌정의 날이다. 그래서   기쁜 날이다. 다만, 그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그늘 밑의 사람들에게 좀 더 눈길을 주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기 예수를 위한 동방박사, 목동들, 그리고 베들레헴 아기들의 공헌, 역할, 희생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올해도 크리스마스 참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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