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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20. 2016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

영국 런던
벨비디어 로드
「주빌리 가든스」 공원
오전 10시 27분


 이곳은 막 봄의 경계를 벗어났다. 6월. 공원 벤치에 앉아 쉬는 사람들 가운데 반 이상이 반소매나 소매 없는 옷차림이다. 하늘 곳곳에 옅은 구름이 떠다니지만, 햇살은 그 어디에도 걸림 없이 공원을 따사롭게 비춘다. 공원 내부를 가로지르는 타원형 산책로 곳곳엔 낡은 나무 벤치가 놓여 있다.
 한 벤치에 앉아 있는-갓 스무 살이 된 듯 보이는-젊은 연인은 손수 만든 샌드위치를 나눠 먹고 있다. 오른쪽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 여자가 빵 사이에 든 양상추를 허벅지에 흘리고 닦아내는 동안에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에밀리와 소피는 그 벤치로부터 5m쯤 떨어진 잔디밭에 앉아 있다. 피부가 괴로워 하지 않을 만큼의 나무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곳이다. 바닥에 깔아놓은 담요 귀퉁이는 햇볕에 달아올라 따끈해져 있다. 에밀리와 소피, 두 사람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근 10년 간 절친하게 지내 온 친구 사이다.

 에밀리는 흘러내린 주홍색 곱슬머리를 귀 뒤로 넘긴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이 뺨에 닿는 촉감이 감미롭다고 생각한다.
 "이 황금 같은 주말에 꾸벅꾸벅 조는 거야?"
 에밀리가 왼쪽 입 꼬릴 올리며 소피에게 말했다. 소피는 담요에 눕듯이 기대어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있다. 소피의 기다란 금발머리가 한들거리며 바람의 결을 읽고 있다.
 "이 쪼그만 몸으로 가구 조립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소피는 상체를 일으키며 에밀리에게 툴툴댔다. 소피는 런던 외곽에서 가구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자영업을 운영하고 있다. 천성이 꼼꼼한 스타일이어서 아르바이트생을 구하지 않고 3년 째 자기 일에 매진해 오고 있다.
 소피는 새하얀 팔뚝 언저리에 난 엷은 생채길 가리키며 에밀리에게 울상을 지어 보이다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에밀리는 따라 웃지 않는다.
 "너 그러다 일찍 죽어. 내가 그냥 하는 소리 같지? 아르바이트생 쓰라니까? 너보다 잘해내는 사람 있을 수 있잖아?"
 에밀리는 짐짓 훈계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소피는 (괜히 팔뚝 보여 줬다고 생각하며) 팔을 거두곤 까만 배낭 속에 넣어 온 미지근한 맥주 캔을 꺼낸다.
 "이 황금 같은 주말엔 아침부터 술이지!"
 소피가 천연한 표정으로 말하며 눈짓으로 에밀리의 동의를 구했다. 에밀리는 군말 없이 소피 손에 든 맥주 캔을 받아든다.
 "너 제이미랑은 어떻게 됐어?"
 에밀리가 검지손톱 끝으로 맥주 캔을 따며 물었다. 소피는 맥주 캔 표면에 적힌 알코올 도수를 확인하다 말고 에밀리를 응시한다.
 "그냥 그래."
 소피가 석연찮은 태도로 대답하자 에밀리는 두 눈썹 치켜올리며 맥주 한 모금을 홀짝거렸다. 제이미는 소피의 여동생으로, 최근 소피와 꽤 크게 싸웠다. 소피는 런던 아이(영국의 명소, 대관람차)를 올려다보는 에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연다.
 "에밀리, 내가 이상한 거야?"
 "뜬금없이 뭔 소리야?"
 "걘 내가 해 주는 모든 게 당연한가 봐. 옛날엔 안 그랬거든? 그래서 미치겠어. 차라리 원래부터 그런 애였음 포기라도 할 텐데."

 "제이미?"
 "그럼 누구겠어."

 소피는 분통 터지는 표정을 지으며 맥주 캔을 들어올렸다. 소피가 건배 하자는 게 아니었음에도 에밀리는 빙긋 웃으며 소피가 든 맥주 캔에 자신의 맥주 캔을 부딪친다.
 소피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집안 사정 때문에 고모 집에 얹혀 살아야 했다. 게다가 소피가 진학한 대학마저 고향과 먼 곳이었다. 제이미와 소피는 친자매임에도 불구하고 한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게 전부였다.
 그런 소피와 제이미 사이를 알기에 에밀리는 신중한 질문을 던진다.
 "제이미가 옛날에 안 그랬다는 거, 그거, 진짜야?"
 "응?"
 "너네 떨어져 지낸 게 10년이 넘어. 제이미 런던 오고 나서 너랑 둘이 지낸 지 이제 1년이구.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공백이 너무 커. 누가 옛날에 그랬니, 안 그랬니, 하기에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는 부분이 심히 적단 생각이 드는데. 안 그래?"
 에밀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피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동생이란 이유로 제이미의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한 스스로의 오만함을 얼핏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네, 이제 1년이네."
 소피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에밀리는 대각선 앞에 놓인 배낭에서 과자 한 봉지를 꺼내 소피에게 내민다.
 에밀리는 늘 생각지도 못한 각도로 상황을 바라봐 준다. 그 덕에 소피는 여러 면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자신의 착각이나 오해 따위를 늦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밀리가 소피를 각별하게 생각했기에 이런 뜻밖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거라고 소피는 생각했다. 아무나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순 없는 거다.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사람한텐 적당한 말 골라 상투적인 위로 몇 마디 해 주면 그만이니까.
 에밀리는 소피가 겪고 있는 상황을 소피만큼이나 (가끔은 소피보다 더) 세심하게 들여다 봐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런 순간이 가능했다.
 에밀리가 내민 과자를 받아든 소피는 봉지를 옆으로 눕혀 포장을 뜯는다.
 "소피, 한 가지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 왜냐면 나도 니가 방금 했던 말 되게 많이 하고 살았거든. 그 사람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고, 왜 그렇게 된 줄 모르겠다고, 이상하다고, 답답하다고, 억울하다고. 근데 그게 아니더라."
 "그럼?"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인데 내가 그걸 못 본 거야. 예를 들어, 응, 소피 니 예를 들어 보자. 제이미가 니 헌신 모두 당연하게 생각해서 힘들다고 했지. 제이미가 원래 그런 애는 아니었다고 하면서."
 "응."
 "소피, 제이미는 원래 그런 애였을 수도 있어. 니가 제이미의 그런 면을 못 보고 지내 온 걸 수도 있어. 근데 그걸 못 봤다고 해서 그걸 니 잘못이라 할 순 없어. 사람 성격 같은 건 얼른 알아차리기가 어렵거든. 시간이 그 사람 진짜 성격을 차차 드러내 줄 뿐이야."
 "음."
 소피는 에밀리가 해 준 말을 소화해 보려고 눈을 감았다.
 "제이미를 나쁘게 보려는 건 아니야.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
 에밀리가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소피는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에밀리에게 대답한다.
 "넌 어떨 때 좀 냉철해 보일 만큼 이성적인데, 어떨 땐 되게 소심해."
 "내가 냉철해 보일 만큼 이성적이라고? 웬일이야. 난 내가 소심하고, 소심하고, 또 소심한 줄 알았는데."
 에밀리가 천연하게 말하자 소피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크게 웃었다.
 "기대가 참 무섭네."
 소피가 맥주 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캔 속에는 맥주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울퉁불퉁한 담요 위에 안정적으로 얹어 놓기가 어려웠다.
 "응? 오늘, 뭐, 뜬금없이 말해야 하는 그런 날인가?"
 에밀리가 목을 앞으로 쭉 빼며 물었다.
 "제이미가 나한테 자꾸 바라기만 하는 거 말이야. 우리 같이 지내기 시작한 처음부터 그랬어. 근데 내가 인정하기가 싫었나 봐. 제이미한테 자꾸 엉뚱한 기대만 건 거지. 얘가 원래 이런 애는 아니야, 괜찮아질 거야, 달라질 거야."
 소피는 다시 맥주 캔을 들어올리며 뒷말을 잇는다.
 "시간이 제이미 성격을 드러내 준 지는 꽤 오랜 일인 것 같네. 그걸 제대로 보려 하지 않은 내가 또 다른 시간을 잡아먹었을 뿐이야."
 "다 컸네, 다 컸어."
 에밀리가 배낭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배낭 속엔 초콜릿 두 개가 들어 있을 뿐, 또 다른 맥주 캔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기대가 참 무섭네."
 실망한 얼굴로 에밀리가 말했다.
 "응?"
 "난 맥주가 더 있을 줄 알았거든."
 소피가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에밀리는 배낭 밑에 있던 자기 가방을 들어올리며 소피를 돌아본다.
 "맥주 사 올게."
 소피는 나른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인다. 문득 등 뒤에서 아기 웃음이 들려온다. 소피와 에밀리는 동시에 그곳을 바라본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네다섯 살쯤 돼 보이는-아이 한 명이 잔디밭에 놓인 주인 없는 공을 만지며 웃고 있다. 아까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나눠 먹던 젊은 연인도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에 앉은 여자가 몸을 아이 쪽으로 좀 더 틀며 말한다.
 "행복해지기가 참 쉬운 건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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