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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16. 2016

슬픔을 나눠 지는 사람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엘리오트 에비뉴
「멜버른 동물원」
오후 1시 2분


 무르익은 가을 햇살이 동물원 입구를 희뿌연 노랑으로 적신다. 곳곳에 세워진 키 높은 나무들은 황금 물살로 출렁이는 파도처럼 한 방향으로 흔들린다. 동물원 입구에는 동물 멸종 방지를 위한 입간판, 동물원 내부 지도를 그려 넣은 입간판 등 여러 종류의 입간판이 늘어서 있다. 동물원 입구 오른편에 세워진 작은 카페 앞엔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 위한 손님 대여섯 명이 헐겁게 줄을 서 있다.
 "엄만 아직 내가 앤 줄 알아? 동물원이 뭐야?"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된 올리비아가 동물원 입구를 막 넘어서며 말했다. 올리비아는 1시간 전처럼 여전히 찌푸려진 얼굴로 엄마 엘라를 돌아본다. 엘라는 묶은 머리를 한 번 더 정돈하더니 유모차 밀고 가는 한 아기 엄마를 미소 지으며 바라본다. 딸아이가 불만을 다 토해낼 때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엘라는 귀 기울인 채 곁을 지키며 가만히 침묵했다.
 올리비아는 앞머리 없는 금발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 올리다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쏘아보듯 엘라를 곁눈질한다. 엘라는 이만 입을 열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오고 싶었어, 미안해."
 엘라가 멋쩍게 말하자 올리비아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양손으로 아랫배를 감싼다.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는 다정다감한 엄마를 불평으로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1시간 전에 치솟은 전투력이 이제 모두 바닥났다는 걸 느낀 올리비아는 외투에 손을 찔러 넣고 걸음을 옮긴다.
 "핫초코 사 줘, 엄마."
 엘라는 대답 대신 딸아이의 팔목을 잡더니 미끄러지듯 팔짱을 낀다.


 "엄마랑 좀 걸을까?"
 엘라가 자신의 핫초코를 받아 쥐며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중년에 접어든 카페 점원은 엘라와 올리비아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평소 핫초코를 좋아하지 않지만 딸아이와 더 가까이 있단 느낌을 나누기 위해 엘라는 핫초코를 시켰다. 올리비아는 급하게 들이켠 핫초코에 입술을 데었는지 차가운 검지로 윗입술을 누르고 있다. 
 "진짜 엄마가 동물원 오고 싶었던 거야?"
 올리비아가 먼저 걸음을 떼며 엘라에게 물었다. 햇살 가득 받은 엄마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엄마 얼굴 속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얼굴은 언제나 신비로웠다. 엘라는 고갤 느리게 끄덕이며 오른쪽 하늘에 뜬 태양을 힐끗 올려다본다.
 "나이가 들어도 동물원에 오고 싶고 그래?"
 올리비아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엘라는 웃음을 잘게 터뜨린다.
 "어머, 너한테 엄마가 벌써 나이 든 사람이니? 큰일이다. 관리 좀 더해야겠어. 올리비아, 엄만 아직도 엄마가 40대라는 게 안 믿겨."
 "그럼 엄마가 몇 살 같은데?"
 "엄마 마음은 아직 열다섯 살에 멈춰 있는 것 같아."
 "말도 안 돼. 그럼 나보다 어리잖아?"
 올리비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그때 벌어졌거든."
 엘라는 옛 시절에 잠긴 눈을 뜨며 길 끝에 적힌 '멸종과 싸웁시다!' 하는 문구를 넘겨다본다.
 "엄마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그게 뭔데? 설마 아빠랑 열다섯에 만난 건 아니지?"
 "아빠가 엄마 첫사랑 아니라고 하면 딸한테 실수하는 거니?"
 엘라가 핫초코를 조금 홀짝거리며 말했다.
 "엄마, 아직 내가 앤 줄 알아? 난 10년 전부터 엄마 첫사랑 얘기 들을 준비 다 돼 있었어. 자, 말해 봐."
 올리비아는 뒤로 걸으며 엘라의 반응을 살핀다. 엘라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갤 저으며 딸아이의 장난기 담긴 눈을 응시한다.
 "올리비아."
 "응?"
 "그 얘긴 다음에 해 줄게. 오늘 할 얘긴 따로 있어."
 "뭔데?"
 "아까 그 얘기야. 엄마가 열다섯에 어떤 일 겪었다고 했었지?"
 "응."
 "그 일 벌어진 데가 저기야."
 엘라가 걸음을 멈추며 '파충류'라고 적힌 건물 쪽을 가리켰다.
 "파충류?"
 "정확하게는 저 건물 옆에 있는 나무 밑이야. 작은 벤치 보이지?"
 "응."
 올리비아는 눈을 작게 뜨고 목을 쭉 내밀어 벤치를 상세히 살펴본다.


 "이 벤치가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올리비아가 벤치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엘라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빙긋 웃는다.
 "오늘 할아버지한테 화 많이 났지?"
 엘라가 갑자기 '할아버지'를 입에 올리자 올리비아의 뺨이 조금 굳어졌다. 올리비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잔소리가 심하긴 해."
 엘라가 올리비아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올리비아는 다리를 쭉 내밀고 발끝을 내려다본다.
 "엄마가 얘기 하나 해 줄게. 엄마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니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엄만 할머니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어. 준비 없이 할머닐 잃었지. 엄만 뇌가 쑥 빠져 나간 사람처럼 지냈어. 할머니 돌아가신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주말 아침이었어. 할아버지가 엄마 방문을 여는 거야. 할머니 돌아가시고 엄마랑 할아버진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했어. 밥 때 되면 마주 앉아 밥 먹고, 준비물 필요하면 용돈 받고, 그게 다였거든."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는데?"
 올리비아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동물원 갈래? 엘라, 오늘 우리 동물원 갈래?' 할아버지가 엄마 방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서서 그렇게 말했어. 엄만 그런 할아버지가 낯설면서도 안심이 되더라. 그래, 나한텐 아직 아빠가 있어, 그런 생각이 들었나 봐. 엄만 할아버지한테 고갤 끄덕여 보였어. 할아버진 조금 웃는 것 같더니 '준비 다 되면 내려 와. 천천히 준비해도 좋아.' 하곤 1층으로 내려갔어."
 "그리고 이 벤치로 온 거야?"
 올리비아의 질문에 엘라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 벤치에 오려고 동물원 온 건 아니었어."
 "그럼?"
 "할아버진 엄마가 안 돼 보였나 봐. 할머니 돌아가시고 눈에 띄게 조용해졌으니까. 잘 웃지도 않고, 잘 움직이지도 않았어. 그래서 할아버지 딴에는 고민하다가 엄말 동물원에라도 데려 가야겠다, 싶었나 봐."
 엘라는 핫초코를 크게 한 모금 삼킨 뒤 뒷말을 잇는다.
 "막상 동물원에 왔는데, 좋을 줄 알았는데, 좋지가 않았어."
 "왜?"
 "동물원에 오니까 할머니 빈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거야."
 "아."
 "결국 엄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 저기 '파충류'라고 적힌 건물 앞에서 말이야."
 엘라는 몸을 틀어 파충류 전시관을 내다보았다. 올리비아는 명치가 좀 얼얼해진 것 같다고 느끼며 파충류 전시관을 향해 시선을 보탠다.
 "할아버진 엄마를 잠시 내려다보기만 했어. 울게 그냥 둔 거야. 엄마 울음이 좀 잦아들 때쯤, 할아버지가 엄마를 번쩍 안아 들었어. 엄마 몸집이 작긴 하지만, 열다섯이면 할아버지가 들기 무거웠을 텐데, 할아버진 엄말 안고 여기 이 벤치까지 왔어. 엄말 조심스럽게 앉히고, 할아버진 엄마 앞에 쪼그리고 앉았어."
 여기까지 말한 엘라는 숨을 골랐다. 올리비아는 정면 하늘에 뜬 태양을 올려다보며 엘라가 다음 말을 이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이윽고 엘라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입술을 벌린다. 엘라의 눈가가 조금 젖어 있다. 올리비아의 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엄마한테 말했어. '엘라, 미안하다.'하고. 엄만 '아빠가 뭐가 미안해?' 묻다 말고 또 울먹거렸어. 근데 엄마가 울먹거리는 걸 보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엉엉 우는 거야. 애처럼. 엄마 눈물은 쏙 들어가 버리고 그때부터 엄마가 할아버질 지켜봤어. 울게 그냥 뒀어. 우린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나 봐. 우리한테 울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엘라는 식어 가는 핫초코 잔을 벤치 오른쪽에 놓아 두었다. 올리비아는 엘라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몸짓을 최소화했다.
 "할아버지는 엄마보다 오래 울었어. 할아버지가 다 울고 엄말 쳐다보는데 할아버지 눈동자 색깔이 꼭 토마토 같았으니까. 다리가 저린지 할아버지는 엄마 옆에 앉았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엘라, 아빠가 최선을 다할게. 엘라 너한테 아빠가 필요 없어지는 날까지 아빤 최선을 다해 널 지킬 거다.'하고. 우린 그리고 난 뒤에 동물원을 나왔어."
 "입장권 아까워."
 "아냐, 엄만 그 날 동물들보다, 동물원 경치보다, 더 중요한 걸 봤잖아. 할아버지 눈물을 봤잖아. 엄마가 혼자 슬퍼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잖아."
 올리비아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이 터무니없이 유치했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엘라는 올리비아의 오른쪽 허벅지에 손바닥을 얹는다.
 "올리비아, 할아버진 그 후로 정말 열심히 살았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하면서 엄말 먹이고 입히고 재웠어. 그렇게 사느라 할아버진 자기 마음을 제때 돌보지 못했어. 그래서 그런 거야. 할아버지가 갑자기 화를 내고 상처 받는 말하는 건, 그래서 그런 거야. 할아버지가 엄말 외롭지 않게 해 주려고 온 시간을 다 쓴 바람에, 정작 할아버지 외로움은 해결 못했어. 그래서 그런 거야."
 올리비아는 엘라의 뺨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너한테 할아버질 무작정 이해하라는 게 아니야. 가족을 이해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할아버질 조금은 이해해 줄래? 할아버질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올리비아, 이건 널 위해서이기도 해. 할아버질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니 맘도 편해질 테니까."
 엘라는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치며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엄마. 노력해 볼게. 화내고 나와서 미안해."
 올리비아는 엘라의 눈물 묻은 소맷부릴 내려다보며 우물거렸다. 엘라는 머릴 풀고 다시 묶으며 고갤 끄덕인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동물의 낯선 울음소리가 번져 온다. 그 기이하고도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소리에 올리비아와 엘라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벤치에서 먼저 일어난 쪽은 엘라였다. 엘라는 올리비아의 손에서 핫초코를 받아쥐며 턱짓으로 동물원 입구를 가리킨다.
"자, 이제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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