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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08. 2016

친구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

미국 플로리다 윈터가든
웨스트 스토리 로드
「허드슨 타이어 & 서비스」 타이어 판매점
오전 7시 2분


 타이어 가게 앞, 잘 손질된 관목 너머로 커피 캐리어 든 줄리가 나타난다. 헐렁한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길 양쪽을 서둘러 살피며 줄리는 좁은 차도를 빠르게 건넌다. 풍성한 금발 머리칼이 파도처럼 사방으로 출렁거린다. 크라프트지로 만든 연갈색 커피 캐리어 안에는 스타벅스 커피 두 잔이 들어 있다. 왼쪽은 바닐라 라떼, 오른쪽은 아메리카노.
 길 다 건넌 줄리는 눈을 조금 엷게 뜨며 타이어 가게의 넓은 마당을 두리번거린다. 제인을 찾는 것이다. 제인의 하얀 세단은 덩그러니 주차돼 있는데 정작 제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줄리는 들고 있던 캐리어를 왼손에 옮겨 쥐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최근 통화 목록에서 제인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응, 줄리, 어디쯤이야? 집에서 나오는 거 맞아?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니 차 두 발짝 앞쯤인데."
 "아! 지금 나갈게!"
 줄리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는 이미 끊겼다. 제인은 '허드슨 타이어 & 서비스'라고 적인 큼지막한 붉은 간판 밑에 난 통유리문을 등으로 밀며 나타났다. 제인의 가죽 재킷과 새까만 머리가 햇살을 흠뻑 받아들이며 빛났다. 제인이 돌아서자 제인의 양손에는 스타벅스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왼쪽은 아메리카노, 오른쪽은 바닐라 라떼. 과연 20년 지기다웠다. 줄리는 제인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인은 줄리 반응에 잠시 의아해 하다가 줄리 손에 들린 커피 캐리어를 보고 따라 웃었다.
 "너 두 잔 마셔."
 줄리가 제인에게 바닐라 라떼를 건네며 말했다.
 "너도 두 잔 마셔."
 제인이 줄리에게 아메리카노를 답례처럼 내밀자, 줄리는 그것을 커피 캐리어 빈 자리에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줄리는 자기가 사 온 아메리카노를 뽑아 들고 커피 캐리어는 제인의 차 보닛 위에 얹었다. 제인도 왼손에 쥐고 있던 바닐라 라떼를 새하얀 보닛 위에 내려놓았다.
 "차는 왜 이 모양이야?"
 줄리가 허릴 구부리며 망가진 타이어 휠을 들여다보았다. 단단하고 빛나던 휠이 하루아침에 너덜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줄리가 고갤 들고 제인을 바라보자 제인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술 마셨어. 벌금 낸 것들 다 합치면 집을 한 채 사겠어. 내가 법 운운하는 변호사라는 건 아무도 못 믿을 거야."
 말을 끝내며 제인이 눈을 떴다. 줄리는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며 너무 뜨겁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온 얼굴을 찌푸렸다. 
 "또 브루스 때문이야?"
 줄리의 물음에 제인은 대답 대신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아직 연락 없니?"
 줄리는 새끼손가락으로 입술 근처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며 다시 물었다.
 "있을 리가."
 제인은 타이어 가게 앞 주택가를 멀찍이 내다보며 대답했다.


 제인과 브루스가 헤어진 건 두 달 전이다. 제인이 브루스에게 결별을 통보했다. 진짜 헤어지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제인은 다만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오래된 관계에 끼어든 권태로움을 어떻게든 밀어내 보고 싶었다.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제인은 브루스에게 "우리, 앞으로의 시간은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해 보는 게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브루스는 두꺼운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더니 벌떡 일어나 현관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곳은 제인의 집이었고, 그 날은 두 사람이 5년 전 처음 만난 날이었으며, 그것을 조촐하게 기념하는 자리였다.
 제인은 별안간 눈앞이 깜깜했다. 이런 식의 반응이 돌아오리라곤 예상도 못했다. 제인이 상상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브루스가 분노하며 제인을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모든 걸 짊어진 채 훌쩍 사라져 버릴 줄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제인은 브루스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때 돼서 자기 속마음 솔직히 털어 놔도 늦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제인의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 답장도 보내 오지 않았다. 제인은 문자와 음성 메시지를 통해 진심이 아니었다며 브루스에게 온갖 해명을 했다. 사과도 해 보고 간청도 해 봤다. 하지만 브루스 쪽은 완전한 암흑이었고 완전한 적막이었다. 제인은 브루스를 만날 수도 없었고, 목소릴 들을 수도 없었고, 브루스 소식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5년 간 만나면서 브루스 친한 친구 연락처도 하나 가지지 못한 제인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 나눈 적도 없었지만.


 "제인."
 줄리가 세 번째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제인을 불렀다.
 "알아, 나도 내가 한심한 거."
 "그게 아니라, 너 아침은 먹고 출근하는 거야?"
 줄리의 질문에 제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줄리를 맞바라보았다. 그제야 제인은 줄리를 너무 이른 시간에 불러냈다는 걸 알아차렸다. 줄리 얼굴 너머로 줄리 남편과 줄리의 작고 예쁜 딸 얼굴이 어른거렸다. 두 사람이 숟가락이나 포크를 입에 물고 굶주린 표정 짓는 장면도. 근처 산다는 이유로 줄리에게 무턱대고 연락한 스스로의 무례함을 그제야 자각할 수 있었다. 제인의 뺨이 화끈거렸다.
 "미안해. 혹시 아침식사 준비 중이었어?"
 "뭐라는 거야. 잠 덜 깼어? 너 아침 먹은 거냐고 물었잖아."
 "아니, 바로 나오는 길이지."
 줄리는 고갤 끄덕거리며 쥐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캐리어에 집어 넣었다. 손등에 닿아 오는 가을바람이 선들거렸다. 줄리가 제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 가자. 너 아침 먹고 출근해. 늦더라도 그렇게 해."
 "응?"
 "아, 또 말할까 봐 짚어 두겠는데, 난 너 안 한심해. 니가 더한 짓을 해도 그건 니 선택이야. 선택에 잘나고 한심한 게 어디 있어. 선택은 선택일 뿐이야. 그건 내 소관 아니야. 관여하고 싶은 마음 눈곱만큼도 없어. 내가 관여한다고 니가 더 행복해지진 않을 테니까. 오히려 우리 관계가 불편해지겠지. 관여는 관심이 아니잖아. 그래서 난 니 모든 선택 전적으로 존중해. 그리고 있잖아, 난 니가 지금 보내고 있는 그 시간이 소중한 거란 생각이 든다. 제인, 너도 잘 알겠지만, 살면서 사랑에 목숨 걸 순간은 정말 흔치 않아. 너 지금 위태로워 보이긴 하지만 그때만큼 니가 생생히 살아 있는 날들이 또 어디 있겠어. 그래서 내가 신경 쓰는 건 니 건강일 뿐이야. 복잡한 순애보는 너 마음 내키는 데까지 누려. 대신 밥은 먹어 가면서."
 줄리의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엄격했다. 제인은 그 눈빛에 위압감을 느꼈다. 그런 한편으로는 마음의 둑 어느 곳이 무너져 눈물 같은 게 흘러 나오는 것도 같았다. 제인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하자 줄리는 제인의 세단 운전석 문을 열었다.
 "뭐 훔쳐 갈 거 있니? 차 안에?"
 "없어."
 "그럼 여기 차 세워 놓고, 물론 잠그고, 따라 와. 집에 아무도 없어. 필립이 보니 데리고 뉴저지 갔거든."
 줄리가 왼손에 쥔 캐리어를 달랑거리며 타이어 가게 마당을 벗어났다. 제인은 재킷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7시 14분. 출근 시간까지 40분 남았다. 제인은 핸드폰 화면 잠금을 풀고 변호사 사무실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미, 출근 안 했죠? 하는 중이라면 미안해요. 오늘 하루 쉬어요.」
 핸드폰 액정을 끄며 제인이 고갤 들었다. 길 건넌 줄리가 회백색 보도에 접어들고 있었다. 싸늘한 아침바람에 옷깃 여미며 제인은 줄리 뒤를 따라 걸었다. 한산한 주택가에서 들려오는 아침의 소리가 불안정한 마음을 토닥거리는 것 같았다.
 "니가 출근해? 뭐가 그렇게 급해!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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