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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03. 2016

사람 밀어내지 말게

프랑스 파리
유쉐뜨 가 
「카보 드 라 위세트」 재즈 바
오후 8시 29분


 재즈 바 내부는 붉은 조명 빛으로 출렁거렸다. 천정이 돔 형식이라 그런지 촛불 밝힌 동굴 같은 느낌이다. 오늘 초청된 밴드는 멋스럽게 나이 든 중년 남성들로 구성돼 있다. 보컬리스트가 셔츠 맨 윗 단추를 풀자 객석 어느 곳에서 휘파람 소리가 날아든다. 무대 옆 빨간 패브릭 소파에 앉은 짧은 금발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드러머에게 세 번이나 윙크를 날렸다. 드러머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여자를 향해 오른쪽 눈썹을 씰룩거렸다.
 레오는 고갤 돌려 오랜 친구 위고를 바라보았다. 레오의 못마땅한 얼굴에 비해 위고는 세상천지 근심 걱정이라곤 없는 얼굴이다. 초대 받은 건 레오인데, 오히려 초대 받고 구경하는 쪽은 위고인 듯 보였다.
 "좀 너무한단 생각이 드는군."
 레오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레오는 귓바퀴 뒤쪽에 가지런한 새치를 매달고 있다. 말끔히 빗어 넘긴 짧은 주홍빛 머리, 재즈 바 불빛에 반사돼 약간 보랏빛으로 보이는 검은 재킷, 테가 두꺼운 뿔테 안경과 테만큼 두꺼운 안경알, 단추가 두 개 풀린 새하얀 셔츠. 나이에 비해 탄력 있는 피부는 레오의 자기 관리 능력을 조용히 대변해 주고 있었다. 위고는 빙긋 웃으며 턱짓으로 레오의 재킷을 가리켰다.
 "옷까지 차려 입었는데 이런 데는 와 줘야지."
 위고는 헝클어진 회색 머리칼을 머리 위로 대강 쓸어 넘겼다. 농담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동작이다. 꺼칠한 손바닥 감촉은 위고의 취기를 일깨웠다. 웃음이 지나간 위고의 눈동자엔 슬픈 물기가 얼핏 어렸다. 레오는 그런 위고를 곁눈질하며 지금껏 불평하던 태도를 조금 후회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위고 나름대로는 애 많이 썼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항상 공원 근처에서 만나 이야기 나누던 거리 화가가 자신을 재즈 바에 초대한 것이다.
 "됐네, 이왕 온 김에 술이나 진탕 마셔야지."
 레오는 말 끝을 흐리며 앞에 놓인 위스키 온 더 록을 들어올렸다. 위고도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보이며 고갤 깊이 끄덕였다. 레오는 위고의 소맷부리에 말라붙은 물감을 쳐다보며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갔다 오니 좀 어떤가?"
 위고가 레오에게 물었다. 레오는 대답 대신 잠시 팔짱을 꼈다. 그리고 다섯 시간 전을 떠올렸다.


 레오는 22년 전 헤어진 아내의 장례식에 갔다. 장례식은 마을의 작은 성당에서 치러졌다. 차에서 내려 초조한 기색으로 담배를 뽑아 물던 레오를 부른 건 아들 크리스티앙이었다.
 "아버지!"
 크리스티앙은 특유의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레오에게 다가왔다. 레오는 자신의 굳어진 안면 근육을 펴고 아들에게 미소 지어 보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은 한 달 전보다 부쩍 푸석해진 얼굴로 레오 앞에 쭈뼛거리고 섰다. 스물 네 살에 크리스티앙을 낳고 스물 다섯에 아내 엘렌과 이혼하면서, 레오는 크리스티앙을 버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엘렌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겨 실질적으로 버림 받은 건 레오였지만.
 레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크리스티앙을 응시했다.
 "밥은 먹은 거냐?"
 "네, 조금."
 "미안하다."
 밥 먹었냐고 묻다가 느닷없이 미안하다고 하는 자신의 사고 비약이 어처구니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레오는 뭐라 말 덧붙이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성당 옆 정원에 심긴 키 큰 나무가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나뭇잎이 반사하는 빛 무더기는 꼭 별빛 같았다. 엘렌은 이슥한 새벽도 상관없이 한잠 자는 레오를 깨우며 "자기, 별 좀 봐!" 열린 창문 너머 가리키며 소리 치던 사람이었다.
 "아버지."
 크리스티앙이 레오의 손에서 라이터를 빼내 들며 말했다. 레오는 대답 대신 눈을 좀 크게 떠 보였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처음 만났을 때, 엄만 어떤 사람이었어요?"
 레오는 명치가 살살 아파 오는 것 같았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크리스티앙에게서 이런 식의 질문을 받으리라곤 상상 못했다. 그것도 엘렌의 장례식 날. 레오는 두어 번 헛기침한 후 머릿속에 떠오른 말들을 최대한 걸러 보았다.
 "네 엄만 보기 드물게 심성 맑은 사람이었다.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항상 모두의 예상을 빗나간 생각을 하고 행동을 했어. 선입견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그래서 헤어졌나요? 예측될 수 없어서?"
 크리스티앙의 눈빛에 희미한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그 노여움은 이미 세월에 닳을 대로 닳아 있었다. 크리스티앙의 코끝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엘렌도 울기 전이면 코끝부터 빨개지곤 했었다.


 위고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레오를 흘겨 보았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단 말인가? 자네가 아내와 헤어진 진짜 이유를?"
 레오는 힘없이 웃으며 위고에게 손사래를 쳐 보였다.
 "난 어차피 함께 살지 못하는 사람 아닌가. 크리스티앙이 제 엄말 원망하느니 내가 원망 받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네. 사실 내 잘못이기도 한 거 아닌가. 내가 엘렌을 더 사랑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네. 사람은 참 신비로운 존재야. 억울한 건 죽어도 못 견디는 내가, 지금도 내 할 말은 곧이곧대로 다 해야 직성 풀리는 내가, 20년 넘게 이 비밀을 지켰네. 내 아이가 제 엄말 미워하게 될까 봐. 그래서 자기가 더 상처 받게 될까 봐."
 레오는 무대 옆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러머에게 추파 던지던 금발 여자는 어디론지 가고 없었다. 드러머의 머리칼은 땀으로 젖어들어 있었다.
 위고는 붉은 조명 때문에 레오의 안색을 제대로 살필 수 없어 얼마간 답답했다. 아무래도 장소 선정을 잘못 한 것 같다. 위고는 위스키 잔 밑에 깔려 있던 마분지 코스터를 만지작거렸다.
 "사람 밀어내지 말게."
 레오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잦아들자 위고는 레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레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엘렌을 용서할 수 없었어. 헤어지고 4년쯤 지났을 때 엘렌이 크리스티앙을 데리고 집에 찾아 왔더군. 그때 엘렌이 내게 사과했네. 근데 난 의자 박차고 일어나 엘렌하고 크리스티앙에게 온갖 성질을 부려댔지. 접시를 하나 깼나, 그랬을 거야. 그 후로 엘렌은 동생 편으로 크리스티앙을 2주에 한 번씩 보냈지. 엘렌을 만날 기회가 아주 없던 건 아니야. 하지만 엘렌과 아무 대화도 나눌 수 없었네. 엘렌이 날 찾아 왔던 그 날, 내가 그 사과를 받아 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크리스티앙 만나며 종종 밥도 먹고 차도 마시자던 엘렌 이야길 끝까지 들어 주고 그러자 그랬으면 오늘 내 표정이 이렇진 않았을 것 같은데."
 레오는 오른손 검지 손톱으로 왼쪽 눈 밑을 긁었다. 곧 왼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위고는-레오의 오른손에 가린-레오의 눈물을 목격하지 못했다. 레오는 손을 옮겨 눈물 자국을 마저 닦은 뒤 의자 팔걸이를 주물럭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난 이렇게 걷고 말하고 먹고 마신다는 게 참 이상해."
 레오의 왼쪽 눈에서 두 번째 눈물 방울이 흘러 내렸다. 이번엔 미처 손쓸 틈이 없었다. 위고는 해진 카디건 안주머니를 뒤적이며 손수건을 찾았다.
 밴드가 마지막 곡 전주 부분을 연주하고 있었다. 무대 옆 소파에 앉은 곱슬머리 중년 여성이 레오의 구부러진 허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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