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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28. 2016

같이 갈래?

벨기에 샤를루아

벨기에 샤를루아 
볼르바흐 드 리세흐
「50's 아메리칸 다이너」 레스토랑
오후 2시 24분


 연한 황토색 벽돌로 장식된 레스토랑 외벽은 한국의 흔한 주택단지를 연상케 했다. 하늘은 회백색이었고, 어림짐작대로라면 1시간 내로 비가 올 것 같았다. 준영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팔꿈치로 레스토랑 문을 밀었다. 새하얀 문 위에는 미국 국기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약속시간까지 6분 남았다. 석훈은 분명 어딘가에 앉아 있겠지만.
 "그래서 언제 가는데?"
 석훈은 준영이 앉기도 전에 조급한 어조로 질문했다. 준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오른쪽 어깨 너머로 길고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장미 향기 같은 향수 냄새가 패스트푸드 음식 냄새 사이로 밀려들었다. 준영 몫으로 비워진 자리 앞엔 패티가 두 장 든 큼지막한 버거가 분홍 접시 위에 담겨 있었다. 준영은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헤인즈 케첩 통을 선 채로 만지작거렸다. 석훈은 대답을 촉구하는 눈으로 준영을 올려다보았다. 준영은 검은색 린넨 재킷을 벗어 의자 안쪽에 밀어넣으며 자리에 앉았다. 낡은 하늘색 가죽 의자는 이미 꺼질 대로 꺼져 있었다.
 "아직 남았어, 비행기 시간."
 "누가 그거 물었냐, 언제 가는 거냐고. 몇 시냐고."
 "7시 20분."
 준영은 석훈의 눈동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석훈은 준영이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회피할 거라고 짐작했지만, 막상 그런 준영을 마주하고 있는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이곳 벨기에에서 두 사람이 두 달 간 주고받은 숱한 밀어와 절대 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약속, 제 몸 같았던 온갖 접촉들 전부 무효가 되는 순간이 지금인가. 인정해야만 하는 건가. 석훈은 준영에게 한 줄기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당신과 이곳에 머물겠다는 말을 준영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줬으면 싶었다. 우리 사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시작된 이 사랑만은, 무엇으로도 함락되지 않을, 석훈 삶의 철옹성이 돼 줄 거라 믿었다.
 "진짜 갈 거야?"
 석훈의 물음에 준영이 고갤 들었다. 준영은 석훈의 눈 대신 석훈의 뺨과 귓불 그리고 준영이 좋아했던 까만 셔츠의 접힌 소매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준영은 눈길을 완전히 틀어 레스토랑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대각선으로 다닥다닥 붙어 주차된 자동차들과 중앙선 대신 심겨진 나무들 그리고 스타워즈에 나온 로봇처럼 생긴 새파란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수없이 걸어다닌 그 고향 같던 길이 이젠 너무도 낯선 풍경이 돼 버렸다. 가느다란 빗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준영은 사흘 전 한국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버지 당뇨 증세가 너무 심하니 이만 한국으로 들어와 줬음 한다는 어머니 전화였다. 그것은 권유가 아니라 통보였다. 불효의 쐐기를 뽑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으름장이었다. 지난 4년 간 준영이 자기 진면목을 찾기 위해 세계 전역을 누빈 기간이 가족들에겐 다만 불효고 기만이자 무례일 뿐이었다.
 "석훈 씨, 미안해. 나 가야 돼."
 준영은 마침내 석훈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석훈의 눈두덩은 부을 대로 부어 있었으며, 눈가는 시커멓게 꺼져 있었다. 턱 주변에 거뭇거뭇 솟은 수염이 준영의 가슴팍을 찔러 오는 것 같았다.
 "왜 지금인데. 안 가면 안 돼?"
 준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오른손으로 인중과 입술을 쓸었다. '안 가면 안 돼?'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있던가. 내가 떠난다는 사실이 세상의 붕괴나 다름없는 참사인 사람의 얼굴을 본 적 있던가. 석훈은 콜라가 든 잔을 옆으로 옮기며 두 팔을 테이블 위에 부려 놓았다. 그리고 힘 없이 고갤 떨어뜨렸다.
 "같이 갈래?"
 준영은 석훈의 주먹 쥔 왼손에 손바닥을 포개며 물었다. 석훈의 손등은 뜨거웠다. 석훈은 대답 대신 고갤 들고 텅 빈 눈동자로 준영을 시선을 맞받아쳤다. 석훈의 머릿속으로 몇몇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빈민이나 다름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온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 주는 장면들. 청소업체 사무실, 스타벅스 뒷문 앞에 놓인 쓰레기통, 졸린 눈으로 둘러보았던 와인 바 내부 정경과 자신이 메고 있던 나비넥타이. 그런 생활이 단 한 번도 싫은 적 없었다. 석훈은 매 순간 자유를 만끽했고, 그런 자유에 비해 자신이 지불하는 대가는 너무 적은 것 같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런데 사흘 전부터 석훈은 자신의 자유가 빈털터리 신세로 보이기 시작했다.
 "같이 갈래?"
 석훈의 안색을 살피며 준영이 다시 물었다.
 "잔인하네."
 석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가 잔인해. 진심이야."
 "같이 가자고? 비행기 표 구할 돈도 없고, 난."
 석훈은 자신의 말을 끊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비행기 표 내가 사면 돼."
 준영은 석훈이 자신의 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걸 알았지만 솔직히 말했다. 할 수 있으면 석훈과 함께 가고 싶었다.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예상대로 석훈은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얼굴 온 근육의 통제력을 잃은 듯 완전히 좌절한 표정이 되었다.
 "같이 가고 싶지, 나도."
 석훈은 왼팔을 테이블에 괴고 손바닥으로 눈을 감싸며 말했다. 이런 순간까지 자존심, 아니, 자격지심 내세우며 준영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석훈이 자기 결핍을 드러낼 때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게 많은 준영은 스스로의 삶을 비관했다.
 "같이 가면 안 돼?"
 준영이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며 세 번째 물었다. 콜라 잔에서는 더 이상 기포가 올라오지 않았다. 이것들 시켜 놓고 대체 몇 시간이나 기다린 걸까. 석훈은 여전히 왼손으로 눈 주변을 움켜쥐고 있었다. 준영은 손을 뻗어 석훈의 왼손목을 쥐고 조심스럽게 당겼다. 괴로워하는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비행기, 하루만 미루면 안 돼?"
 이윽고 석훈이 준영에게 말했다. 준영은 턱을 조금 치켜 들며 눈을 크게 떴다. 콧날이 따가워지는 것도 같았다.
 "왜?"
 "생각해 보게."
 "같이 한국 가는 거?"
 "응."
 "진짜야?"
 "그래, 진짜야."
 준영은 반쯤 벌린 입으로 알 수 없는 탄성을 내뱉었고 석훈은 다시 고갤 떨어뜨렸다. 백발의 종업원이 김 모락모락 나는 치즈 나초 접시를 들고 두 사람 테이블을 지나쳤다.
 "나한테 쉬운 결정 아니야. 지금 바로 결정 못 해 줘서 미안해."
 석훈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고 준영은 뒷목이 결릴 정도로 고갤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틀도, 사흘도 상관없어. 석훈 씨가 뭘 포기해야 하는지 내가 다는 모르지만, 그게 석훈 씨 인생에 얼마나 큰 의미인지는 알아. 그래서 너무 놀랍고 고마워. 나 갈까? 혼자 생각할래?"
 석훈은 갑자기 부산스러워진 준영의 몸동작을 보며 비로소 조금 웃었다.
 "어딜 가. 밥 안 먹었지. 이거 먹고 나가자. 나 오늘 일 없어."
 빈 손이 된 백발의 종업원이 다시 그들 테이블 옆을 지나갔다. 석훈은 김이 다 빠진 콜라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준영은 케첩 통을 쥐다 말고 머스터드 통을 들어 석훈에게 내밀었다. 석훈은 머스터드 통을 받고 케첩 통을 준영에게 건네 주었다.
 창밖에는 이제 제법 굵다란 비가 내리고 있다. 열린 레스토랑 문 너머에서 촉촉한 냉기가 밀려 왔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고, 다 식은 식사는 전혀 차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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