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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Dec 21. 2016

한 해를 살아내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네요



   1년 중 밤이 제일 긴 날, 오늘은 동지冬至입니다. 동지는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라고 하네요. 저도 금방 알았습니다.

   24절기는 제게 낯선 개념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24절기 암기 시험을 쳤던 기억이 있긴 한데요. 수학 공식들을 까맣게 잊었듯 이것들도 금세 까먹어 버렸나 봐요. 이럴 때마다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온 날들 전부 기억하면 머리 터져 죽어! 지나면 잊어버리는 건 되게 건강에 유익한 현상이야.” 

   어쨌든 정말 중요한 것들은 (이를테면 당신 생일이나 당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것들 또는 당신에게 조심스러워야 하는 부분들) 용케 잊지 않고 살아가니, 24절기 같은 것에 건망증 도진다고 스스로를 나무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는 밤이 제일 긴 동지, 낮이 제일 긴 하지夏至, 봄이 오는 입춘立春, 가을이 오는 입추立秋, 겨울이 오면 입동立冬, 이 정도의 절기들만을 알고 있습니다. 이 외의 절기 몇 가지를 더 알고 있긴 하지만 그 자세한 뜻 같은 건 잘 몰라요. 각 절기마다 어떤 전통 풍속이 있는 줄은 아예 모르구요. 

   그러니 오늘 같은 날은 참 반갑습니다. 오늘이 동지인 것도 알고 동짓날에 팥죽을 먹는다는 풍속도 알기 때문에……. ‘음, 내가 다른 건 잘 몰라도 동지는 알지!’ 하는 으쓱한 마음이 든다고 할까. 별건 아니지만 뭔가를 알고 겪는 건 항상 마음 한편을 든든하게 해 주네요.     





   계속 짧아지기만 하던 낮이 오늘 이후부터는 다시 길어질 거예요. 동지 이후로 낮이 길어지니까 중국 사람들은 그걸 보고 ‘죽은 태양이 부활한다.’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날짜로는 새해가 아니지만 동지부터 새해나 다름없다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멋진 말이죠. 태양이 부활한다. 동짓날에는 태양이 부활한다. 그러니 우리는 날짜와 상관없이 미리 새해를 시작해 보자.

   그럼 저도 오늘부터 마음에 새 옷을 걸쳐 입어도 되는 걸까요. 그 생각을 하니 문득 활기가 생깁니다. 물론 태양이 부활하든 말든 새 마음가짐은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거지만요. 몸이 더워질 만큼 결연한 결심은 어쩐지 새해에만 가능한 것 같아요. ‘이제 새해니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안 될 거라 포기했던 일들도 다시 한 번 고려해 보게 되고……. 

   1월 1일이 밝아 새해가 된다는 건 결국 인간이 만든 규칙일 뿐이며,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에 질적인 차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저는 새해가 좋습니다. 12월 31일도 그냥 하루이고 1월 1일도 그냥 하루이지만, 제게는 이 두 하루 사이에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새해’라는 날짜 개념은 제 안에 묘한 힘을 불어넣습니다. 몸에도 마음에도. 저는 그 힘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뭔가를 시작하거나 이미 체념해 버린 관계를 새로 다져 올리거나,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 거예요. 주변에서 누가 도와준 것도 아니고 갑작스런 행운이 찾아온 것도 아니고 단지 새해라는 이유로.

   새해라는 의미 때문에.



사람은,
아니 저는 의미로 사는 존재라서……. 





   그나저나 팥죽은 먹었어요? 동짓날인데. 저는 오늘 팥죽을 한 그릇 먹었습니다. 맛있게요. 팥죽을 맛있게 먹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는데……. 지난해와 올해는 팥죽을 일부러 찾아 먹었어요. 팥이 점점 좋아지네요. 몇 년 사이에 (저로서는 그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입맛이 크게 바뀌었는데 그때부터 팥이 좋아졌어요. 

  뭔가 소중한 걸 대하듯이 팥죽을 떠서 먹는 동안 저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팥죽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쫓아 준다고 하잖아요. (만약 팥죽에 정말 그런 효과가 있다면) 그럼 제가 팥죽을 먹는 동안 퇴치될 부정적 에너지는 무엇일지 궁금했습니다. 제 안에 머물러 있던 부정적인 에너지들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말이에요.  

   그 생각 끝에 저는 제가 가진 고질적인 에너지, 습관의 에너지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저는 걱정을 미리 앞당겨서 하느라 그날그날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지 못할 때가 있어요.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이런 습관이 저를 쥐어짜곤 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에너지들 가운데 이것이 가장 강력한 녀석입니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또는 뭔가를 시작한 초기에) 걱정부터 하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 꼼꼼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일을 골똘히 걱정하다 보면 나중에 생길 위험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걱정에는 꽤 쓸 만한 기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부터 앞세우는 이런 습관을 안고 살다 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후에 생길지 모를 위험을 대비하는 정도로만 걱정하면 좋은데, 걱정이 지나칠 때는 아무것도 안 하고 도망쳐 버리게 되니까. 

   저는 걱정을 중간에 멈추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걱정의 대부분은 “아, 못하겠다.”의 결말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저는 걱정을 통해 잃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생각을 많이 안 해도 되는 일은 끈질기게 해내는 편이지만,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일에는 참을성을 오래 발휘하지 못해요. 그러니 저는 일을 할 때마다 놀듯이 가볍게 하려 애를 씁니다. 중요한 사람 앞일수록 너무 진중해지지 않으려 몸과 마음에 힘을 뺍니다. 신중해지다가 심각해져 버리면 제가 도망치게 될 걸 너무 잘 아니까요. 





   어제는 오후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밥 먹고 나와 커피 마시면서 근황도 묻고 시답잖은 농담도 주고받았습니다. 어떤 일로 고민하는 친구에게 (다행히 결정을 얼른 내리지 않아도 되는 문제여서) 제가 별안간 “야, 그럼 갈 데까지 가 봐.” 하고 말해 버렸습니다. ‘말해 버렸다.’고 한 건 그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온 거여서 그렇습니다. 

   “야, 그럼 갈 데까지 가 봐.”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저는 미간을 좁힌 채로 잠시 멍해져 있었습니다. 제 말에 친구가 뭐라고 대답하는데 그 대답을 귀담아 듣지 못했어요.

   천하의 도망 귀재가 갈 데까지 가 보란 말을 하다니. 안 될 것 같으면 하지 말라고 조용히 권하기만 하던 사람이 갈 데까지 가 보란 말을 하다니. 

   그 말은 제 무의식 어느 곳에서 튀어 나온 것이었을까요. 제 무의식 속에 그런 용감한 부분이 원래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저는 알 수 없는 시점이지만) 이번에 새로 생긴 걸까요. 새해가 다 돼 가니 마음의 성질이 조금 달라진 걸까, 하는 싱거운 호기심을 품고 밤을 맞습니다. 내년에는 갈 데까지 가 보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완전히 그런 사람으로 싹 바뀔 순 없어도,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팥죽은 먹었나요. 이 질문은 아까도 했었죠. 만일 당신이 오늘 팥죽을 먹지 않았다면, 정성 들여 쑨 팥죽을 담아 드리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보냅니다.

   부디 그곳에 떠돌던 좋지 못한 에너지들이 희석되기를, 투명하게 희석되기를. 

   올해의 기억은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지만 올해의 마음과 내년의 마음이 같을 필요는 없으니, 올해의 아픈 기억으로 내년까지 아플 필요는 없으니, 오늘부터 우리는 새 마음을 가지기로 해요. 새 마음을 갖고 아픈 기억과는 적당한 거리를 만들기로 해요. 이제 그만 아프자, 우리.

   당신도 나도 이 한 해를 잘 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우리 나름의 최선을. 최선이 낳은 결과는 세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최선 자체는 누구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거니까. 그리고 나는 당신의 결과에는 관심이 조금도 없고 당신의 최선에 열렬한 눈빛과 목소리를 보내는 사람이니까.

   지금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잘했다고.

   올 한 해 당신 최고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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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과 산문집을 발행하는 

WRIFE MAGAZINE은 
삶의 순간들을 다룹니다.
너무 흔하면서도 너무 각별해서 절절한 
삶의 순간들 그리고 그 속의 느낌들을 나눕니다.
WRIFE MAGAZINE은 언제나
'사람'과 '마음'과 '함께'를 생각합니다.




책 속 한 문장 :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진짜라고 믿어도 우리가 모르는 진짜가 또 얼마나 많겠냐구…….

-소설집『수리부엉이 까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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