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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Sep 30. 2017

가장 미미한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

내게 대단한 인연이라는 것은





길에서 행인이 “거 뭐 얼마나 대단한 인연이길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고함의 주인은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었고, 나와 당신은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넌 참이었다. 보행자 신호등을 건너다보던 당신이 희미한 콧소리를 내며 조그맣게 웃었다. 


내가 그런 당신을 돌아보자, 당신은 눈짓으로 횡단보도 건너편을 가리켰다. 당신 눈짓이 머무른 곳에, 아까 “거 뭐 얼마나 대단한 인연이길래!”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인상을 한껏 구긴 채로 자신의 맞은편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당신을 쳐다보았다. 내게서도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어떤 이유가 당신을 웃겼다는 사실로 인해 얼마간 즐거워졌다.     






횡단보도를 마저 건넌 뒤, 큰 건물을 네 채 정도 지난 때였다. 길 끝으로 펼쳐진 하늘 한가운데에 둥그스름하면서도 끄트머리가 쭈글쭈글한 구름 하나가 걸려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콘크리트 건물뿐인데, 허공에서 과일 익는 향기 같은 게 맡아졌다. “큼!” 하며 목소리를 문득 가다듬은 당신이 “대단한 인연.” 하고 중얼거렸다. 한 번 듣고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거 뭐 얼마나 대단한 인연이길래!”라는 목소리가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났다. 내가 무심히 걷고 있는 동안, 당신은 그 문장을 내내 곱씹고 있었던 건가. 


내가 당신 손을 찾아 쥐려 할 때, 당신이 내 오른팔에 팔짱을 끼었다.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던 흰색 승합차에서 시선을 거둔 당신이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입술이 왼쪽으로 살짝 쏠렸다. 그것은, 말끔히 정돈되지 않은 말을 하기 직전에 당신으로부터 나타나곤 하는 습관이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당신 입술에서 “대단한 인연이 어떤 인연이지?” 하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짧은 생각 끝에 답해도 되는 질문이 아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글쎄. 파란 시내 버스가 토해 놓고 간 매연 냄새가 호흡을 어지럽혔다. 


‘내 인생에 대단한 인연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마음 아래편을 흠뻑 적셨다. 그 생각은, 당신과 함께 엮어 낸 기억들만 불러올 뿐이었다. 당신은 내 유일한, 대단한 인연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 인연을 대단한 인연으로 만든 건지에 대해서는, 내가 뾰족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나와 당신이 친밀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증거는 죄다 자질구레한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함과는 거리가 먼. 한참 먼.


당신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어딘가로 들어가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고 싶었다. 물 아니면 커피. 시원한 뭔가를 들이켜며 차근차근 고민하다 보면, 왜 우리가 대단한 인연으로 묶였는지 조금은 유창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당신과 하얀색 건물로 들어가, 그 건물 3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작은 카페가 있었다. 커피를 마시려고 했던 내 의견을 가로막고, 당신은 생과일주스 두 잔을 주문했다. 내 몫의 생과일주스는 푹 익은 바나나와 제철 복숭아를 한데 갈아 만든 것이었다. 예상보다 훌륭한 음료였다. 무엇보다 시원해서 좋았다. 


바라던 시원한 음료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고민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결국 나는 “가장 미미한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짤막한 대답을 당신에게 내놓았다. ‘이게 제대로 된 대답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여운이 내 목소리 끝에 배어 있었다. 당신은 고개를 미세하게 뒤로 젖히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당신 입에서 “오.” 하는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탄식인지 감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내가 빨대로 컵 안을 휘휘 젓다가 튀긴 누런 주스 방울 쪽을 한 번 내려다본 당신이 “예를 들면?” 하고 물어 왔다. 당신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아까 내가 한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앞으로 나올 내 대답이 마음에 들 예정이어서 그런지.


“배가 아프다든지, 그러니까, 똥을 누고 싶어서 배가 아프다든지, 그런 거 말이야. 너하고 나는 그런 얘기 아무렇지도 않게 하잖아. 뭐 먹고 있는데 더러운 얘기해서 미안하지만, 예를 들라니까 당장은 똥 생각밖에 안 나네. 아무튼, 그런 좀 보잘것없는 것들을 우리는 나누잖아. 말로 나누든 경험으로 직접 나누든. 근데 서먹서먹한 사람들끼리는 그런 거 안 나누잖아. 아니, 못 나누지. 그런 사이에서 그런 걸 어떻게 나눠. 민망해서. 안 편한 사람하고 있는 자리에서는 내가 배탈 나서 배 무지 아파도 억지로 참거나, 볼일 보겠다는 이유가 아닌 이유 둘러대면서 일어나 화장실 가겠지. 그렇게 뭔가 껄끄럽고 감춰야 하는 것도 이래저래 많은 인연을 어떻게 대단한 인연이라고 하겠어. 나한테 대단한 인연은 나를 대단히 안녕하게 만들어 주는 인연이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기분이나 내 마음을 대단히 안녕하게 만들어 주는 인연. 나한테 좋은 인연은 그런 인연이야. 다른 사람들은 좋은 인연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모르겠는데, 나한테 좋은 인연은 이런 거거든. 어떤 인연이 나를 대단히 이름값 있는 자리에 올려 준다 해도, 내가 그 인연 안에서 계속 뭔가를 애써 견뎌 내야 하고 숨겨야 한다면, 나한테 그 인연은 대단한 인연 아니야. 하나도 안 대단해. 오래도 못 갈 걸, 그런 인연은. 내 인생 평탄하게 만들 기회야 내가 만들면 돼. 되게 능력 있는 사람이 만들어 주는 기회보다는 내가 만드는 기회가 훨씬 어설프긴 하겠지만, 어쨌든 그거 내가 만들면 돼. 근데 누군가의 존재 자체로 생기는 안정감이나 행복은, 그 누군가가 있어야만 하는 거잖아. 그건 내가 못 만들어. 무슨 수를 써도 못 만들어. 개인적인 기회나 성공에서 오는 안정감이나 행복은,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하더라도 내가 얼마든 만들 수 있지만. 길을 열어 주는 인연보다 길을 같이 걸어 주는 인연이 훨씬 귀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야. 나한테 대단한 인연은 무조건 후자라고.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 니가 그런 인연이고.”        






ㅡ 산문집 『가치에 대한 이야기』:

http://www.bookk.co.kr/book/view/2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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