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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Oct 22. 2023

한때 내 꿈은 경찰이었다

"좋아하는 일"과 "삶"에는 경계가 필요해


✖︎주의

다소 찌질하고 흔한 자기연민 가득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찌질한 이야기에 알러지가 있으시거나, 박대리와 앞으로도 얼굴을 보고 지낼 분들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어렸을 때 나는 당찬 여자아이가 되고 싶었다. 남자아이들과 치고박고 장난치며 자랐고, 당시 반마다 한 명씩은 있었던 ‘조폭마누라’의 칭호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부모님은 나를 초등학교 시절 내내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해주셨는데 사실 나는 태권도 학원을 다니고 싶었다.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고 호소도 해보았지만 부모님은 나를 끝내 태권도 학원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남자아이처럼 축구를 하고 큰 목소리를 내고 당차게 행동하는 걸 좋아하셨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성미가 불같은 분들이었고 특히 어머니는 일찍 결혼한 ‘어린 엄마'였는데도 야무진 여장부였다. 에어로빅과 헬스도 꾸준히 했고, 외국으로 아버지가 출장을 간 사이에 악착같이 일을 해서 언니와 나, 할머니를 먹여살렸다. 그런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딸이고 싶었다. 그때 무심코 생각한 내 꿈은 경찰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냥 누구나 알 법한, 명쾌한 직업을 꿈으로 말하곤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중에서도 당찬 여자아이가 말할 법한 꿈을 말했을 뿐이다. 사실은 소심한 성격에 울보였는데 말이다.

이후 사춘기에 접어들어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여중, 여고에서 소심한 아이로 조용히 책을 보며 지냈다. 경찰의 꿈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길고 괴로운 시험 기간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세계문학 고전 시리즈 또는 김영하, 백가흠 등이 쓴 현대소설을 여러 권 빌려와서 읽었다. 대학 입시에서도 당연히 국문과를 지망했고, 삼십대에 이른 나는 지금도 책을 만드는 일을 한다. 



다들 준비한다는 공무원 시험

그런 내가 이십대 초반에 1년 반 정도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경찰 시험을 준비했다는 걸 아예 모르는 친구들도 많다. 때는 대학교 3학년이었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취업 준비나 교환학생, 공무원 시험 등으로 휴학을 선택하며 학교를 많이 떠나있던 시기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 주변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잘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어렴풋이 내가 생각해도 나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목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친구들이 진로를 고민하며 고군분투하는 동안, 가지고 있는 자격증이라고는 ‘유도 1단’이었던 나는 그저 유도만 하고 있었다. 시험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무작정 휴학을 하고 한 학기 정도는 평일 알바, 주말 알바를 하며 저녁에는 유도장을 가는 일상을 반복했다. 책이 좋아서 국문과에 왔는데 소설가의 꿈은 나에게 너무 원대하면서도 가망성이 없는 선택지였다. 나의 소설가로서의 재능에 확신도 없었고 그걸로 먹고 살 자신도 없었고, 국문과를 졸업한 내가 과연 무엇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이 대학교에 가라고 시켜서 대학에 왔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무런 표지판이 없었다. 길을 찾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갈피를 못 잡고 지내던 나는 주변의 어른, 롤모델을 찾았다. 주변에는 공무원 시험에 돌입한 친구들도 있었던 데다가 마침 유도장에는 직업이 경찰인 형님들이 많았다. 그들이 마냥 멋있어 보였다. 3년 전에 수능 시험을 치러봤으니까, 그때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준비해보자. 곧 유도 2단을 따게 되면 가산점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당장 이번 시험에 합격하기라도 할 것처럼 북돋아주는 전화기 너머의 경찰 학원의 상담사의 목소리에 홀려, 갑자기 나는 수험생이 되었다.


스물세 살부터 스물네 살 때는 그래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감하게 시험 준비를 내려놓지도 못했다. 멍하니 흘려보낸 시절이었다. 시험을 준비하며 평일 알바는 그만뒀더랬다. 덕분에 평일에는 하루종일 집이나 도서관에서 동영상 강의를 보고 저녁에는 유도를 갔다. 학교 인근의 유도장이었으니 집과는 한 시간 정도 이동 시간이 걸렸다. 학교에는 친구들이 대부분 휴학을 한 상태였고 공교롭게 도장에도 겨울이 찾아오면서 사람이 썰물 빠지듯 빠졌지만 유도 2단을 따기 위해 멀리 있는 도장을 계속 다녀야만 했다. 어느 달엔가는 세네 명 정도만 고정 멤버로 운동을 하기도 했다. 마침 교제하고 있던 남자친구도 군대에 가버렸다. 갑자기 주변에서 내가 의지하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나마 사람들을 만나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은 주말에 하던 카페 아르바이트를 할 때뿐이었다. 나는 늘 주말을 기다렸던 것 같다. 

당시 집의 경제 상황도 녹록치 않았다. 아버지 혼자 고생스럽게 수입 활동을 하고 있었고 집에서는 언니, 엄마와 내가 취업 준비와 시험 준비를 했다. 아버지는 거실에 누워 ‘일 가기 너무 싫어’라며 입을 삐죽이며 지친 얼굴로 우는 소리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에게 너무나 미안한 시절이었고, 우리 가족은 그때 마치 비가 한창 오지 않은 어느 해 여름의 이끼가 가득 낀 개울과 같았다.(그러나 아버지가 ‘힝힝’ 우는 소리를 내던 모습을 지금은 온 가족이 웃으며 추억하고 있다.)


수험 생활이 1년을 넘어서니 몇몇 친구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크고 작은 회사에 들어가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계속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졌다. 평일 낮의 시간에 책상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다가 거울 앞에 가서 선다. 이 어두운 방 안에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밤에는 경찰 체력 시험을 핑계로 동네 학교 운동장을 찾아가 둥근 트랙을 뛰었다. 높은 곳에 있는 학교 운동장이여서 그곳의 난간에 서서 밤하늘을 보면 별과 야경이 함께 펼쳐졌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에 그곳을 종종 찾았다.


"나는 이 트랙 안에 갇혀서 계속 제자리 달리기를 하고 있을 뿐이야."


어느날 달리기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밤하늘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영 이 트랙을 떠나지 못하게 될까봐 무서워서 난간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그렇게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나는 내가 경찰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경찰의 꿈이 진심이었던 적이,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이라도 있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유도를 할 수 있을까. 취업 준비에 들어가면, 그리고 직장인이 되면 유도도 계속 하기 어렵겠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경찰 공무원을 준비했던 건 ‘유도를 계속하면서 먹고 사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나온 단순하고 바보 같은 결론이었다. 나는 그냥 유도를 계속 하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시험을 포기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남은 학기를 마치고 졸업을 하고, 군인이었던 남자친구와는 헤어졌고, 나는 1년 반 동안 시험 때문에 참아왔던 소설책을 원없이 읽었다. 다시 토해내듯 소설도 썼다. 이력서에는 토익란은 비어있었지만 ‘유도 2단’이 적혀 있었다. 이력서와 같이 묶어낸 내 소설을 재미있게 본 몇몇 회사에서 나를 면접자리에 불러줬고 운좋게 서점의 온라인 콘텐츠에디터로 일하게 됐다. 쏟아지는 신간을 잔뜩 읽을 수 있었다. 퇴근 이후에는 유도를 다녔다. 직장을 옮기면 직장 인근의 유도장을 알아봐서 옮겨다녔다.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출근하는 박대리


스물셋의 나는 너무 어렸고 시야가 좁았고, 좋아하는 장난감을 처음 가져본 아이처럼 그걸 잃어버리게 될까봐 계속 불안했다. 좋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삶과 어느 정도는 격리시켜야 했다. 온통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데, 그때의 나는 나의 삶에 경계를 짓는 것에 너무나 서툴렀다. 멋모르고 선택했던 수험 생활이 1년 반만에 끝난 걸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설령 경찰이 됐다고 하더라도 나는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처럼 나약한 성미의 사람이 버티고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터다.

처음으로 생긴 좋아하는 무언가에는 아주 뭉근한 미련이 스민다. 놓치기 싫어서 나는 자꾸만 유도장 주위를 배회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언제까지 유도를 할 수 있겠어’라는 회의감에 십년 가까이 유도를 하면서도 새 도복을 사길 내내 미뤄왔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미련의 또다른 형태일까? 


몇 주째 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 미련을 덜어내는 과정이었다. 글로 적어 토해내고 나면, 나는 한결 유도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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