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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Oct 22. 2023

같이 유도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여자가 유도를 왜 해요?"


2010년대 중반, 회사 인근에서 한두 달 정도 새벽 유도를 다녔다. 졸린 눈으로 별을 보며 아침 버스를 타면 조조 할인요금을 내고 저렴하게 도장까지 갈 수 있었다. 창 밖으로 밝아오는 여명을 즐기며 몸을 풀고 있노라면, 천장이 높은 도장 안으로 희붐하게 빛이 차올랐다. 그때의 고요함과 아침 공기는 기분 좋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이른 시간의 수업이다보니 함께 운동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7-8명 정도였고 준비운동을 하고 난 뒤 두 줄로 서서 돌아가면서 익히기를 했다. 그런데 나와 맞잡을 차례가 되면 자기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와 맞잡기를 거부하는 남자가 있었다. 처음 아침반 수업에 들어간 날부터 그는 나에게 화가 나 있었다. 처음 마주섰을 때 그에게 다가가서 익히기를 하기 좋게 내 목깃을 넉넉히 당겨 내밀자, 그는 고개를 젓더니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가 유도를 왜 해요? 이해가 안되네.”


당시는 TV 예능 프로그램 <우리동네 예체능-유도편>도 방영하기 전이었다. 지금이야 취미로 유도를 즐기는 여자들이 많아졌지만,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여자 관원이 귀한 편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도 당시 2단을 따도록 3~4년 정도 뭇 도장들과 시합장에서 유도하는 여자들을 보아왔고 그 역시도 어디선가 유도를 해오며 여자 관원들과 함께 운동해봤을텐데. 그동안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거부’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침반 수업에 하필 여자가 나뿐이었던 탓인지 그에게는 내가 눈엣가시였던 모양이다. 

그는 그 뒤로도 나와 마주서는 차례가 되면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처음 몇 번은 머뭇머뭇 그에게 다가가서 ‘저, 익히기 먼저 하실래요?’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묵묵부답인 그에게서 뒷걸음질로 멀어지는 무안한 순간이 반복되자 결국 나도 가만히 내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멀찍이 그와 떨어져 서서 서 있는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나와 마주선 차례가 끝나고 다른 남자 관원이 앞에 와서 서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맞잡고 익히기를 이어갔다. 


그런 그를 아침마다 보면서 처음에는 무안했다가, 단지 내가 유도를 하고 싶다는 이기심으로 어울리지 않는 곳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해치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싶어 화도 났다. 그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나를 배척하지 않았고 아침반의 사범님과 어르신들은 내게 따뜻한 가르침을 주셨다. 그를 신경쓰지 않으면 될 일이었지만 노골적으로 나를 거부하는 그가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간혹 그가 운동을 나오지 않은 날이면 안도했고 그가 나타나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아침이면 운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긴장이 됐다.


유도를 하는 내내 계속 염려해왔던 순간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배워보는 운동이었고 스스로의 부족한 운동 감각과 체력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처음 유도장에 갔던 날, 좁은 매트 위에 다닥다닥 모여선 이들이 맹렬하게 유도에 매진하고 있었다. 상대를 메치든 자신이 넘어가든 그들은 즐거워보였다. 서로 잘 들어간 기술에 박수를 치며 감탄했고, 어설프게 기술을 걸다가 되치기를 당하면 놀리기도 했다. 크고 강한 육체가 뒤엉킨 이곳에 내가 잘 스며들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까봐 두려웠다.


그때는 그저 ‘감히’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을 뿐이다. 힘과 실력이 대등하지는 못할지라도 누군가와 맞잡아볼 수만 있다면, 그들과 뒤섞여 대련다운 대련을 해볼 수 있다면. 유도를 잘하고 싶고 강해지고 싶었다. 지친 내색을 하면 ‘여자니까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돼’라며 운동에서 배제될까 봐 힘들다는 말도 아꼈다. 장시간의 익히기와 대련으로 깃을 잡을 힘이 없을 정도로 손가락과 손목, 전완근이 저려와도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행여나 내 부족함으로 인해 도장의 열띤 분위기가 깨질까봐 관장님과 선배님들이 시키는 건 무조건 따랐다. 그 당시 내 안에 자리한 유도에 대한 열망은 나 스스로에게 너무나 낯선 감각이었다. 물론 국가대표나 선수들만큼 간절하고 치열할 순 없겠지만, 매사 미지근하게 살아오던 나에게 처음으로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 땀을 흘려보지도 않고, 서로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한 익히기의 순간에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거절을 당하고 나니 무력감이 들었다. 그 남자에 비해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하지만 그래도 나는 열심히, 같이 유도를 하고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반의 언니들이 아침반에 나를 보겠다며 놀러왔고, 나는 그들을 따라 저녁반으로 옮겼다. 굳이 그 남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녁반에 사람이 아주 많은 데다가 날마다 자유 대련을 한다고 했다. 대련 경험을 쌓기에 좀더 좋은 환경 같았다. 결과적으로 서로 해피엔딩이었다. 그는 눈엣가시였던 나를 눈 앞에서 치워냈고, 나는 저녁반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유도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저녁반에는 유도를 오래 즐겨왔거나 실력이 출중한 선배들이 많았다. 다같이 시합에 출전해 개인전, 단체전에서 메달도 따고, 여러모로 저녁반으로 옮긴 건 잘한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여자가 유도를 왜 해요?’라고 물은 당시의 그의 진짜 심경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이곳저곳에서 유도를 해오며 여러 사람들을 겪어보니, 남자든 여자든 이성과 접촉하는 걸 조심스러워 하는 이들이 종종 있긴 했다. 특히 굳히기와 같이 좀더 밀접하게 신체가 접촉하는 경우에는 더욱 신중해야 했고 나는 당연히 그들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주는 편이다. 모처럼 좋아하는 운동을 하러 온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 그때 그 남자도 그런 마음이었겠거니, ‘기껏 운동하러 왔는데 좋아하지도 않는 이성과 접촉하는 상황이 불편했나보다’ 하고 넘겨짚는다. 

반성하자면 그때의 나는, 여자로서 타고난 신체적 한계를 느끼고 스스로 은연중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체력적으로 내가 운동 커리큘럼을 못 따라가면 다른 남자 관원들이 운동하는 데에 방해가 될 것이다', '여자니까 도장에서 언제든 배제될 수도 있다', '열심히라도 해야 이곳에 있을 자격이 있다'라는 삐뚤어진 피해의식이 기저에 있었다. 사실 관장님이나 관원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 같은데. 그랬기에 그 남자가 내게 보인 거부의 표현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그때와 같은 노골적인 ‘거부’의 상황이 펼쳐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 처참하지도, 미안하지도 않다. 성별이든 나이든 신경쓰지 않고 나와 즐겁게 깃을 맞잡아주는 이들이 무수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들은 힘을 쭉 빼고 부드럽게 대련과 익히기를 받아줬고, 장애물 낙법을 할 때는 가장 납작한 장애물이 되어줬다. 바위처럼 단단해서 아무리 밀고 당겨도 끄떡없을 것 같던 형님들도 내가 업어치기를 타이밍 좋게 잘 들어가면 선뜻 공중회전낙법에 가깝게 넘어가주곤 했다. ‘지친 내색을 엿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둥 입문자 시절의 나를 연민하는 식으로 당시를 반추했지만, 그런 소소한 배려들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매일의 운동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쌓일수록 내 마음의 기저에 있던 여성으로서의 열등감도 점점 옅어졌다. 다같이 목청껏 숫자를 세며 마무리 운동을 끝내고 매트에 드러누우면, 땀으로 흠뻑 젖은 내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저 그런 저녁의 풍경이 계속됐으면, 그러면 된 거라고.


일이든 운동이든 나를 배려해주고 환대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앞으로 계속 나아갈 추진력이 되니까. 나보다 체구가 작은 이들, 또는 흰띠와 맞잡을 때면 지금의 나는 어깨에 힘을 쭉 빼고 기다린다. 그들을 위한 환대의 주체가 되기 위해 준비한다. 


그 사내는 지금도 무릎을 짚고 다른 곳을 보고 있을까?(하도 얄미워서 나도 애써 안 쳐다본 탓에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그 역시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유도를 하고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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