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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Oct 14. 2023

도복을 입고 추는 포크댄스

"익히기" 서로를 날카롭게 벼리는 춤


처음 도장에 흰띠를 매고 들어가면 도장의 한 구석에서 따로 낙법부터 배운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시작하는 흰띠가 있으면 모를까, 다른 이들과 격리되어 혼자 구석에서 낙법을 연습하는 시간은 다소 외롭고 뻘쭘할 수 있다.(나는 그나마 비슷한 시기에 같이 시작했던 ‘띠 동기’들이 있어서 그 시기를 외롭지 않게 보냈다.) 며칠에 걸쳐 전방낙법, 후방낙법, 측방낙법, 전방회전낙법까지 배우고 나면, 그제야 메치기 기술을 배운다. 도장마다 커리큘럼이 다르겠지만 대개 발기술인 발목 받치기나 밭다리 후리기, 또는 손기술인 한팔 업어치기부터 배운다. 일단 한 가지 메치기라도 배우면 그제야 다른 관원들과 섞여 “익히기” 대열에 설 수 있게 된다. 



"익히기"란

익히기는 관원들이 두 줄로 서서, 마주본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각자 연습하고 있는 메치기를 번갈아가며 연습하는 과정이다. 전체 대열에서 구령을 붙이는 이가 ‘차렷, 예의! 익히기 시작!’ 하고 말하면 마주본 두 사람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다가서서 서로의 깃을 맞잡는다. 그리고 자신이 연습할 기술 이름을 얘기한 뒤 기울이기, 지읏기 단계까지만 기술을 걸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나온다. 즉, 기술을 거는 사람은 넘기기 전까지의 동작까지만 취하고 상대방은 맞잡고 서서 적당한 힘으로 버텨주며 횟수를 세준다. 그래서 익히기 시간에는 곳곳에서 숫자 세는 소리가 아우성치듯 들려온다. 

“하나! 둘! 셋! 넷…” 

맞잡은 두 사람이 각각 열 번씩 또는 스무 번씩 익히기를 번갈아 하고 나면 다른 이들도 각자의 차례를 마치고 숨을 헐떡이며 서 있다. “거기까지! 차렷, 예의!” 구령에 맞춰 서로 인사를 나누고 마치 포크댄스를 추듯 옆으로 한 칸씩 이동해서 짝을 바꾼다. 그리고 또 구령에 맞춰 인사를 나누고 익히기를 이어간다. 익히기는 기술을 더 부드럽고 견고하게 가다듬어가기 위한 연습 과정이다. 


그렇기에 익히기는 어느 도장에 가도 매일 반복하는 루틴이다. 사람이 없으면 없는대로, 많으면 많은대로 촘촘히 맞춰 서서 익히기를 주고받으며 땀을 흘린다. 검은띠 관원들을 한쪽 줄에 몰아서 세워놓고, 유색 띠를 맨 관원들만 옆으로 돌기도 하고 때로는 한 사람만 고정하고 전체 인원이 돌기도 한다. 되도록 그날 도장에 모인 모든 사람과 맞잡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체형, 나이, 성별과 맞잡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나보다 키가 큰 사람에게는 업어치기를 들어가는 게 좋겠다’, ‘몸이 두꺼워 파고들기가 어려운 상대는 발기술을 시도해보면 좋겠다’ 등 자신의 체형과 상대의 체형을 고려한 다양한 데이터를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서로의 자세에 대해 조언을 나누기도 하고 관장님과 사범님이 다가와 구체적인 지도를 해주기도 한다. 모든 이가 각자 열 번씩 익히기를 끝내고 구령이 끝을 알리기가 미안할 정도로, 맞잡고 선 이에게 열띠게 기술 피드백을 해주는 유단자들도 있다. 그렇기에 익히기를 시작하며 첫 차례에 잡았던 흰띠의 어색한 밭다리 후리기가, 잠시 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내 앞에 섰을 때는 한결 더 견고하고 맹렬해져 있곤 한다.


밭다리 후리기



무반주 가면무도회

관원들끼리는 늘 비슷한 도복 차림으로만 마주하다보니 서로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한눈에 알기 어렵다.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자주 보기도 하지만 대화를 나누기보다 묵묵히 몸을 움직이고 부딪히는 사이이기에,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곤 한다. 게다가 나는 제법 낯을 가리는 편이라 도장의 쉬는 시간에도 구석 자리에서 배밀기나 스트레칭을 하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가만히 쉬고 있거나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관원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사람들과 친해지고 알아갈 수 있었던 건 익히기 시간 덕분이었다. 모든 사람들과 돌아가며 일대일로 서로를 맞잡으니 숫자를 세주는 사이사이, 또는 서로의 익히기를 마친 뒤 남는 그 짧은 시간에 안부를 묻는다. ‘그때 다치셨던 손목은 좀 어떠세요?’ ‘여행 잘 다녀오셨어요?’ ‘이사 가신다더니 집은 구하셨어요?’ ‘오, 도복 새로 사신 거에요?’ 등 유도관 안팎의 이야기를 짧은 호흡으로 나눈다. 소매깃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눴던 담소에는, 직장에서 날카롭게 가열되었던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다정함과 편안함이 있었다. 그 온기 때문인지 미지의 타인들이 짝을 이뤄 서서 상대의 소매깃을 들어올려 품으로 파고들었다가 다시 돌아나오길 반복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무반주 가면무도회에 온 것만 같다. 서로를 붙잡고, 빠르고 탄력있게 들고나는 몸짓들이 꼭 춤을 추는 것 같달까.


요즘은 익히기를 한다고 숫자를 세며 몸을 움직이고 있노라면 겹겹이 쌓인 기시감에 ‘내가 익히기를, 이 행위를 정말 무수히 많이 해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지겨운 줄도 모르고 계속 해왔지만 거울에 비친 내 자세는 여전히 어설프고 두루뭉술하다. 1년 뒤, 2년 뒤에도 나는 누군가와 깃을 맞잡고 서로를 기울이며 춤을 추고 있을까? 그때의 나는 어디에서, 누구의 깃을 잡고 있을까. 그때쯤의 나는 좀더 선명한 유도를 하고 있을런지. 


익히기는 서로를 날카롭게 벼리는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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