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도인 박대리 Dec 05. 2023

파트너, 한번 잡고 가시죠

내가 “승단”할 수 있을까 ❷


승단을 준비하겠다고는 했는데 막상 파트너가 없으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주말마다 아침 운동이 끝난 뒤 관장님께서 직접 파트너 역할을 맡아주시며 본을 가르쳐주셨지만, 관장님의 오후 시간을 뺏는 것도 송구스러웠고, 내가 ‘어깨로 메치기’ 본을 위해 어깨 위로 들어올리기에는 관장님의 키와 덩치가 너무 컸다. 이렇게 정체된 상태로 승단 심사날까지 본을 완성할 수 있을까, 걱정을 거듭하던 중에 공교롭게도 주말 유도 수업에 3단 승단 시기가 도래한 관원이 있다는 걸 알았다. 3단 승단 역시 4단과 마찬가지로 굳히기본, 메치기본 심사를 봐야 했으므로 나와 짝을 이뤄 연습하기에 더없이 서로에게 좋은 기회였다.



파트너 J

J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의 남자였다. 아내와 어린 두 딸을 가족으로 둔 그는 교대 근무를 하는 직장인이었다. 늦은 새벽에 일이 끝나는 날이면 잠시 눈을 붙였다가 주말의 아침 유도 수업에 오곤 했다. 체격이 많이 크진 않았지만 다부진 어깨와 느슨한 단단함을 지녔다. 대련 상황에서도 부드럽게 기술을 걸고 받아주는 그였기에, 대련 상대로 그가 내 앞에 설 때면 반가움이 앞서곤 했다. 그는 일이 바쁜 시기나 눈이나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현장 상황 때문에 유도관에 오지 못했다. 도장에 오더라도 창밖의 하늘을 주시하다가 날씨가 본격적으로 궂어지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떠났는데, 그렇게 그가 자리를 비우면 도장의 분위기도 한결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가 머물고 있는 주변의 공기는 묘하게 말랑하고 편안해지곤 했으니까. 그런 그였기에 본의 호흡을 맞출 때에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그와 본을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주말, 고작해야 일주일에 단 이틀뿐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 반의 아침 운동을 마치고 나면 이미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도복도 몸도 피로감으로 묵직했다. 뜨거운 물로 씻고 어서 집으로 가서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나와 달리 J는 꾸준한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 창가에 기대 숨을 고르고 나서 ‘본 연습 한번 하고 가시죠.’라고 말하며 도장의 중앙으로 선선히 걸어나오곤 했다. 종종 참고할 만한 카타 시연 영상을 찾아와 내게 보여주며 우리가 메꿔야 할 공백을 짚어주고 다듬어 나갔다. 나는 그가 알려준 굳히기본 영상들을 회사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을 먹으며 들여다봤다. J 덕분에 올해 상반기 내내 내 사고의 기저에는 유도의 본에 대한 생각이 고여 있었다. 그의 집중력과 꾸준함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어수룩하게 본을 준비하다가 관장님께 혼나가며 눈물의 상반기를 보냈을 것이다.


가끔 주말이 아닌 휴일에 그와 시간을 맞춰 연습을 하러 도장에 가면, 그는 따뜻한 커피와 빵을 사들고 오곤 했다. 휴일이어서 도장에는 사람이 없었고 관장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와 매트 위에 편히 앉아 유도장 안팎에서의 각자의 삶의 궤적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셨다. 어느 정도 소화를 시키고 그와 번갈아가며 ‘잡기’와 ‘받기’를 연습하느라 한참을 매트 위에서 구르고, 잠시 볕을 쬐며 쉬었다가 또 연습하고……. 아무리 말랑한 다다미 매트일지라도 수차례 연달아 좌우를 번갈아가며 바닥에 메쳐지고 나면 온몸이 얼얼했다. 메치기본을 하며 바닥에 쿵쿵 떨어지는 피로감을 미루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도복을 입고 맨발로 편히 앉아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재미있어서, 그리고 나와는 결이 다른 J의 삶이 신기해서 자꾸만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관장님이 오시면 조금은 더 긴장한 분위기에서 맞잡고 연습을 했다. 관장님은 냉철하게 지켜보고 고개를 젓곤 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는데요.’

나 혼자였다면 아마 풀이 죽어 숨소리도 못내고 울상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옆에서 J가 큰 표정 변화없이 덤덤하게 함께 혼나니 한결 괜찮았다. J는 그저 계속 꾸준히 연습하고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주 낙법을 치는 통에 전신에 근육통을 달고 살았지만, 도장의 창 밖에서 드는 따뜻한 볕과 바람이 좋은 계절이어서 나에게는 그 시간들이 기분 좋게 기억되고 있다. 



D-day

승단 시험은 송파구에 있는 한국유도원에서 치렀다. 시험 이전에 강습회를 수료하기 위해 방문했던 코레일유도장은 엄청나게 넓은 규모의 도장이었기에, 시험을 치르는 한국유도원도 규모가 클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과 달리 지하에 있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벽과 낮은 천장, 무드 없이 새하얀 형광등,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 애매한 위치에 놓인 굵직한 콘크리트 기둥, 지하 공간 특유의 습한 공기. 흰띠를 매고 운동했던 옛날 청림유도관의 잔상과 겹쳐져서 마음 한켠에서는 향수가 일었다. 이미 일찍 도착한 이들이 옷을 갈아입고 긴장한 얼굴로 몸을 풀고 있었다. 이전에 다니던 도장에서 뵀던 낯익은 얼굴들이 몇몇 보여서 인사도 나누며 긴장을 풀었다. J와 같이 스트레칭을 하며 필기 시험에 나올 법한 유도 이론을 서로 점검했다. 낙법의 정의, 유도의 정신 등등.


제일 먼저 필기 시험을 치렀다. 책상이 없어서 도장 바닥에 줄을 맞춰 앉아 한 장짜리 종이 시험지를 받았다. 엎드려서 시험지에 펜을 끄적이고 있으니 마치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객관식, 주관식이 섞인 열 문항 정도를 풀고 앞으로 제출했고, 곧이어 실기 시험에 돌입했다. 

J와 호흡을 맞춰왔는데 막상 시험에 돌입하니 이름을 호명하는대로 나와서 랜덤으로 짝이 지어졌다. 나처럼 체격이 작은 이들이 덩치가 큰 이들과 짝을 짓게 될 경우, ‘어깨로 메치기’ 같은 동작은 드는 시늉만 하고 내려놓는 식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좁은 공간에 3~4팀 정도가 줄지어 서서 메치기에서는 손기술을, 굳히기에서는 곁누르기, 어깨누르기, 가로누르기 정도까지만 하고 차례를 마쳤다. 한 번에 네 팀 정도가 우왕좌왕 각자 도장에서 연습해온 본을 펼치는 그 난리통 속에 잘 안 보일 법도 한데, 용띠를 맨 시험관이 안경 너머로 매섭게 우리를 관찰했다. 때때로 등에 쓰인 이름을 호명하며 ‘다시 해보세요’라고 콕 집어 주의를 주기도 했다. 지명받은 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실수를 연발하고, 도장 구석에 모여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수험생(?)들은 혹여나 자신이 그렇게 될까 싶어 주의를 받는 지점을 유심히 살폈다.

J가 먼저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자리로 돌아왔고 나는 뒤이어 낯선 다른 도장의 남자분과 짝을 이뤄 시험을 보았다. 평소 호흡을 맞추던 상대가 아니다보니 더 긴장됐다. 게다가 도장마다 배우는 게 다른 건지 그는 종종 나와 다른 방향의 손과 발을 내밀곤 해서 당황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서로에게 몰래 속삭임으로 힌트를 주며 동작을 맞췄다. 키는 나보다 컸지만 체중은 비슷했던 건지 어깨 위로 그를 어찌저찌 들어올리며 메치기본을 마쳤고, 굳히기본을 볼 때는 여자분과 짝을 지어주려는 심사관이 좌중을 둘러보고 있을 때 J가 센스있게 자원해주어 평소 합을 맞춰온 J와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어찌됐든 J도 나도 준비한 만큼은 아쉬움 없이 본을 선보일 수 있었다. 마지막 대련 심사도 긴장은 많이 됐지만 어려움 없이 재미있게 잘 끝냈다. 

승단 결과는 며칠 뒤에 나오니 불안한 마음도 있을 법한데, 일단은 시험을 끝냈다는 개운함과 J가 ‘우리가 수험생들 중에서 제법 잘한 편’이라며 연신 즐겁게 말해주어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유도원을 나설 수 있었다. 관장님과 J와 셋이서 뒤풀이 겸 주말의 낮술을 나누고 후련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지었다.



얼마 뒤 큰 이변없이 J와 나는 각자의 승단을 이뤘다. 나는 4단이 된 뒤 도장에서 평일의 하루, 이틀 정도 코치를 하게 되면서 일상의 루틴이 조금 달라졌다. 그저 준비 운동에 구령을 붙이는 사람 정도에 머무는 것 같아서 늘 관장님께 죄송한 마음뿐이지만. J와는 주말에 계속 유도를 이어가고 있다. 시험을 본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본의 일부가 가물가물하다. 그런 나와 달리 J는 종종 지금도 주말 운동이 끝나고 나에게 ‘파트너, 시간 괜찮으면 오랜만에 본 한번 하고 가시죠.’라고 제안한다. 화질과 화면 구도가 괜찮은 굳히기본 영상을 발견하면 나에게 보여주며 우리의 굳히기본 자세를 더 가다듬으려 늘 연구한다. 승단 시험은 끝났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계속 꾸준한 사람이다. 


승단에 큰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4단이 되고나니 그간 즐겁게 유도를 해왔던 시간을 하나의 숫자에 응집해서 받아든 기분이다. 뿌듯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부끄러움과 부담감도 크다. 유도의 모든 단에는 의미가 있다. 4단은 ‘소교(小巧)’, ‘어느 정도의 기교를 부릴 줄 안다’는 의미를 지닌다. 과연 지금의 나는 그에 걸맞는 무도인일까? 그렇다기엔 깃을 맞잡는 매순간 나는 지금도 절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상대의 빈틈으로 뛰어들기를 주저하며, 엉거주춤 서 있다. 더 견고하고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강하다’는 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J의 덤덤한 표정이 떠오른다. 어쩌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죄책감과 슬픔, 어떤 고마움의 형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