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관람 - 오랜만에 프로 복싱 경기 나들이.

2025년 5월 24일, <NO KO NO WIN> 시즌 1

by 무도인 박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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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25년 초여름, 유복(인스타그램 @unist_boxer)님의 첫 프로 시합이 있었다. 스페이스 프로모션이 주최하는 <NO KO NO WIN> 시즌 1, 마포구민체육센터에서 개최되는 시합이었다. 유복님과는 대투만(대한투기종목만화협회)에서 종종 얼굴을 봬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대투만 대장님이신 몽키킥님이 시합 관람에 큰 열의를 보이셨기에 나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프로복싱 경기 관람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몽키킥님과 나 외에도 까치님, 복복님, 금귤님, 오인치님 등 제법 여러 명이 티켓을 샀다. 대장님은 응원 현수막을 짜자고, 자신이 사비를 들여서라도 만들고 싶다고 즐거운 열의를 보이셨다. 즐겁고 선한 에너지. 우리는 유복님을 응원하는 현수막 한 장과, 우리 대투만 로고가 새겨진 현수막 한 장을 제작하기로 했다.

현수막에 앉힐 적당한 얼굴 컷을 찾기 위해 복붕님의 운동하는 모습을 담은 프로모션 영상을 여러 번 돌려봤다. 시합에 대한 결의를 우직하게 말하는 유복님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캡처하다가 복싱을 하는 이들은 비슷한 관상을 지닌 건지, 자꾸만 나는 오래전 어린 D의 모습이 떠올랐다. D는 120kg의 헤비급 프로 복서였다. 한때는 90kg까지 감량을 해서 크루저급 시합을 뛴 적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마지막으로 봤던 그는 120kg의 D로 돌아와 있었다.

유복님의 얼굴을 캡처해서 벡터로 깬 뒤, 얼굴 곁에 이런저런 문구들을 앉혀보며 시안들을 만들었다. 어설픈 시안들임에도 흔쾌히 몽키킥님은 오케이를 해주셨다. 그는 정말로 사비를 들여 현수막 주문을 부탁했고, 시합을 2주 앞두고 현수막 데이터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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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합이 있던 주는 정말 분주했다. 일이 많았고 개인적으로도 복잡한 심경의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었다. 시합 전날인 금요일 밤, 12시를 넘겨 귀가한 뒤 새벽 2, 3시 쯤에서야 '유복님 힘내라'라는 의미의 그림 축전을 그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공유했다. 무심코 유복님의 계정을 태그했는데 시합 당일임에도 그는 바로 스토리에 대해 답신 DM을 보내왔다.

"새벽까지 안 주무시고... 자다깼더니 큰 선물이..!"

괜히 내가 태그를 거는 바람에 알림이 울려 깨버리신 건 아닌지, 중요한 시합 당일의 컨디션을 망쳐버린 것 같아서 너무 죄송했다.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유복님께 응원을 전하고 나 역시 새벽 늦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일정이 세 개나 겹친, 복잡한 토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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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도복을 챙겨들고 보문역에 있는 파이널멀티유도짐 성북점에 가서 유도 합동 훈련을 했다. 그 다음 스케줄은 효창공원역. 지인을 만나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는 나이 든 개가 부숭부숭한 털로 돌아다녔다. 커피를 마시고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 메밀국수와 전, 막걸리를 나눠 먹었다. 취기가 돌지 않을 만큼의 막걸리를 마시고 지인과 헤어져 회사로 이동했다. 마포구민체육센터와 회사가 가까웠기 때문에 현수막을 회사로 받아놓았던 것이다.

주말의 사무실은 고요했고, 느슨한 오후 햇살이 들어 오렌지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몸도 피곤했고 잠시 만났던 지인과의 오찬은 내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은 상태였다. 사무실 자리에 녹아내리듯 앉아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인디자인 파일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어차피 곧 시합장으로 가야 한다. 착잡한 기분으로 울고 싶어졌다가, 이내 머리를 차게 식히고 긴 원통 형태의 현수막을 안고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보잘것없는 내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포구민체육센터 앞에 내려 걸어가다가 '금귤'님을 먼저 만나서 함께 시합장에 들어갔다. 재밌게도 티켓박스에 대투만 협회원으로 복싱 인스타툰을 그리는 '랍밥'님이 티켓팅을 해주고 계셨다. 우리는 그 인연이 재밌어서 '형이 여기서 왜 나와'라며 웃고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형'이라는 건 밈의 일환이다. 랍밥님은 아름답고 강한 여성 복서다.) 랍밥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보니 전체적으로 어두운 시합장 한켠, 화려한 조명 아래 높고 큰 링 하나가 서 있었다. 목소리가 좋은 사회자가 마이크를 쥐고 있었고 라운드걸 두 분이 링 주변을 맴돌았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몸을 풀고 쉐도우를 하는 복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곧 대장님인 몽키킥님과 까치님, 복복님도 오셔서 함께 현수막을 나눠 들고 흥분과 기대감을 나눴다. 곧 시합 트렁크를 입은 유복님이 세컨분과 함께 들어오시자 우리는 현수막을 들고 뛰어갔다. 자신의 얼굴이 크게 프린팅된 현수막을 보고 유복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응원하러 와준 것도 고마운데 현수막까지 맞췄느냐며, 웃고는 있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유복님 뒤에 서서 골똘히 우리의 현수막을 들여다보던 키 큰 세컨님은 갑자기 재미있는 제안을 하셨다.

"혹시 이따 선수 입장할 때, 같이 입장하시겠어요?"

몽키킥님과 나는 스태프분들만 괜찮으시면 너무 좋다고 뛸듯이 기뻐했다.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뒤따라 들어가겠노라고. 그렇게 화려한 조명 아래 유복님과 스태프분들이 먼저 입장하시고 그 뒤로 유복님 얼굴이 인쇄된 현수막을 든 까치님과 내가 따라가고, 그 뒤로 대투만 현수막을 든 몽키킥님이 입장하셨다.(나중에 말씀하셨지만, 하얀색 바탕의 대투만 현수막을 들고 입장하며 몽키킥님은 내심 높게 들 수가 없었다고 했다. 마치 패배를 인정하는 백기를 흔드는 게 연상될까봐 조심스러웠다고. 추후 언젠가 검은 바탕의 대투만 깃발을 하나 더 만들자고 하셨다.) 행여나 조명에 발이 걸려 넘어질까 신경쓰며, 현수막을 쥐고 유복님과 팀원분들을 따라 걸었다.


결과적으로 유복님은 멋지게 승리했다. 대학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계시면서도 시합 준비를 많이 해오셨다는 게 느껴졌다. 프로 데뷔 이후 거의 첫 경기셨을텐데도 안정감 있게 TKO승을 거머쥐셨다. 게다가 응원하러 와준 분들도 정말 많아서 곳곳에서 '이성원 화이팅'을 외치는 목소리들이 요란했다.(내가 상대편 선수였다면 그 응원의 열세에 기가 꺾였을 것이다.) 그날 시합에 참가한 선수들 중 유복님이 사전 인기투표에서도 1등을 하셨다고. 3-4라운드 즈음 상대편 진영에서 흰 수건을 던졌고 유복님이 두 다리를 깡총 띄우며 높게 점프하는 세레모니를 보여주셨다.


덕분에 대투만 일행은 더없이 유쾌하고 고양된 마음으로 치킨집에서 뒤풀이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당사자이신 유복님은 아무래도 함께 시합을 준비한 팀원분들과 뒤풀이 자리를 가지실 듯하여 대투만 뒤풀이에는 함께 자리하지 못하셨지만, 그래도 우리는 즐겁기 그지없었다. 복싱 선수의 입장에 무에타이, 킥복서와 검도인, 유도인이 따라 들어가다니 너무 재밌고 웃기는 일이라며, 우리들은 즐겁게 그날의 경기에 대해 도란거렸다.


집으로 돌아와 카메라의 사진을 살펴봤다. 현수막 이슈로 도통 사진을 못 찍었는데 감사하게도 함께 관람했던 여성 복서 '복복'님께서 내 카메라로 유복님 사진을 많이 찍어주셨다. 복복님은 DSLR 촬영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링과 관객석이 먼 거리였음에도 제법 좋은 결과물들을 남겨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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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고 피끓는 순간을 담은 사진이 정말 많았는데 여러 사진들 중에서도 가장 뭉클했던 한 장이 있었다. 흰 수건이 던져진 뒤 함께 싸워준 상대를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하던 유복님. 같은 무도인으로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를 해칠 것처럼 이악물고 싸워도 어느 투기 종목이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는 상대를 존중하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있다. 그렇기에 계속 서로에게 의지함과 동시에 서로를 부수는 것이리라. 언제 어디에서건 나를 정성껏 부숴주는, 나를 잡아주는 모두에게 늘 고맙고 애틋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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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 대한 단상

치킨집에서 모두와 즐겁게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내내, D의 조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입과 코에서 흥건히 끈적한 코피를 대롱거리며 싸우던 D, 링에서 지고 내려와 어두운 천막 안에서 훌쩍이며 울던 거대한 D, 와중에 글러브 안에 칭칭 감은 테이핑이 풀리지 않아 더 크게 화를 내고 울던 D, 가위가 없어서 내 가방에서 손톱깎이를 꺼내 그의 테이핑을 끊었다. 쇠냄새에 가까운 피비린내와 멍의 색으로 점철된, 늘 울적했던 D의 시합날.

그 붉고 푸르딩딩한 색은 우리의 끝이 썩 아름답지만은 않으리라는 복선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좀처럼 모든 게 잘 풀리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싸움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나는 다섯 평 방에서 점점 더 작아지고 망가지고 있었고 소리 지르며 욕하고 우는 날들이 많아졌다. 방음이 안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SOS 신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크게 울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 닭장 같은 방들에 살던 이웃들은 그런 소음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니까.

D라는 존재가 삶에 못처럼 박혀 있었던 비틀린 유대의 나날들. 이제는 거기에서 멀리 걸어나왔음을 스스로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그래서 선뜻 유복님의 프로 시합을 관람하러 갔던 걸지도 모르겠다.


너가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떨까.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이러려고 그렇게까지 헤어지려고 했던 거냐고 비웃을까.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래도 우리는 그때 헤어져야만 했다. 그때 끝내지 않았으면 아마 계속 우리는, 그 다섯 평 링 위에서 흥건히 피 흘리며 서 있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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