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 일기_2025년 4월 7일. 다시, 복싱하는 평일.
2025년 1분기 내내 앓는 소리만 해대며 지냈다.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육신의 어리광이 더 심해진 건지, 몸이 더이상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몇 년 전에 빗당겨치기에 메쳐지다가 오른쪽 무릎이 꺾여서 지금까지도 내내 잠스트 무릎 보호대를 차고 운동해왔다. 이번 1분기에는 같은 오른쪽에만 발목 보호대와 팔꿈치 보호대가 추가됐다. 발목은 무슨 연유인지 어느날 유도 대련을 끝내고 나니 심하게 퉁퉁 부어있었고, 팔꿈치는 2월 초에 출전했던 청춘양구전국유도대회 시합중에 다쳤다. 발목은 대회 출전 2주 전에 다쳤는데 시기야 달랐지만 아무튼 발목과 팔꿈치 둘 다 인대가 찢어진 상태다. 다행히 완전 파열은 피했지만 운동을 쉬지는 않다보니 좀처럼 낫지를 않았다. ‘내가 좀 조심하고 신경쓰면 더 무리 안되게 할 수 있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월요일, 도장에서 대련 중에 상대의 목깃을 오른손으로 잡고 왼쪽으로 터는데 팔꿈치가 몸 안쪽으로 살짝 꺾이는 동작에 ‘우두둑’ 하는 느낌이 들었다. 땅을 짚은 것도 아니고 상대가 내게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닌, 내가 의도적으로 취한 액션에 내 팔꿈치가 신음하고 있었다. 더이상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는 영영 낫지 못할 거야. 마침 유도관 재등록 시기가 도래했던 다음날, 그 길로 관장님께 찾아가 한두 달 정도의 휴식을 말씀드리고 도복을 챙겨들고 나왔다. 마음이 착잡했다. 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과 각오로 도장에 가고 있었는데 그게 갑자기 오늘이었던 것이다. 이별, 죽음과 같은 모든 종류의 ‘마지막’은 늘 갑자기 찾아온다.
말아접은 도복을 안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멍하니 창밖을 보며 달렸다. 이제 뭘해야 할지 막막했다. 비어버린 저녁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리고 땀은 어디서, 어떻게 흘리지? 아직은 밖에서 달리거나 줄넘기를 하기에는 추운데.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전에 쓰던 복싱 글러브와 붕대, 피스, 운동화, 수건 등을 챙겨들고 집 바로 앞의 복싱장에 갔다. 당분간 대련 없이 체력 운동과 부상 회복에만 힘써보자, 라는 생각이었다. 복싱장 관장님께 입관 상담을 할 때에도 부상 부위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운동하기로.
복싱장, 루틴
관장님은 앳된 얼굴에(실제로도 아직 젊고 어리시다.) 파이팅이 넘치는, 무려 챔피언의 타이틀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체육관에는 그의 프로시합 포스터와 사진들이 곳곳에 붙어 있다.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다보면 벽에 붙은 포스터에 시선이 가는데, 포스터 안에서 다른 선수들은 인상을 한껏 무섭게 찌푸리고 있는데 관장님 혼자 활짝 웃고 있다. 무릇 강한 자는 그런 것이다.
관장님은 매일 거울에 “오늘의 콤비네이숀” 동작을 길게 적어 두신다. 외우기 어려워서 줄곧 멈칫거리지만 더듬더듬 따라하다보면 좌우로 오묘하게 무게중심이 오가며 몸이 넘실거리게 된다. 들썩들썩 흔들리다 보면 하루종일 머릿속에 벼려둔 날카로운 생각이 파도 너머로 사라진다.
그렇게 한껏 내가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관장님께서 틈틈이 다가오셔서 교정하면 좋을 부분들을 짚어주신다. 세심하고 예리한 조언들이다. 내가 그걸 잘 이해하고 몸으로 구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정성껏 가르쳐주시는 것에 비해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죄송할 따름이다. 특히 죄송한 마음은 미트를 칠 때 극에 달하는데, 코치님과 관장님의 주문을 도통 따라가질 못하고 콤비네이숀이 끊겨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만에 하는 복싱이라지만 움직임이 너무 더디고 어설퍼서, 내 얼굴에 스스로 스트레이트를 먹이고 싶은 심정이다.
미트를 치고 나면 링에서 내려와 샌드백을 골라 답고 선다.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으면 어느 순간 관장님께서 동영상을 찍어주신다. 영상을 보며 문제점을 또 짚어주신다. 나름 빠르고 세게 샌드백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영상으로 보니 뭐, 가관이다. 샌드백이랑 부루스를 추고 있는 격이다. 상대가 샌드백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아마 나는 흠씬 두드려 맞았을 터다.
샌드백을 마무리 하고 나서야 땀으로 흥건한 장갑과 붕대를 벗는다. 손에서 엄청나게 쿰쿰한 냄새가 난다.(절대 얼굴이나 눈을 만지면 안된다!) 천장을 향해 바람을 쏘아보내고 있는 선풍기에 장갑과 붕대를 말려 놓고 마무리 운동을 한다. 거울 한 귀퉁이에 요일별로 몸을 이곳저곳 괴롭혀줄 마무리 운동 세트들이 적혀 있다. 월요일은 팔벌려뛰기와 버피, 제자리 점프라서 제법 할 만하다.(가장 괴로운 일주일의 첫날이니까 순한 맛으로 짜주신 걸까?)
그리고 노래를 들으며 런닝머신을 탄다. 이미 땀도 많이 흘리고 지친 상태지만 <진격의 거인> ost 따위를 듣고 있으면 없던 기운도 샘솟아서, 15분 정도는 내리 달릴 수가 있다. 하루 중에 가장 기분 좋은 시간이다.
런닝머신에서 뛰고 있노라면 예전 기억들이 밀려온다. 신대방삼거리역에 살 때 전진만챔피언 복싱체육관에 다녔다. 매일같이 보던 얼굴들. 코치님, 관장님, 선수분들, 동네 아저씨들… 다정하고 묵묵히, 열심히 운동을 하던 여성관원분들. 불과 1년 전인데 아주 오랜 유년의 기억처럼 느껴진다. 5년 정도를 살았던 정든 동네를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작년 여름. 아마 다들 여전히 그 체육관에, 조금은 더 낡은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지나간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잊어버려야 한다. 망각은 인간을 살아가게 한다. 나는 잊어버리려고 애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억에서 지워지는 게 두려워서 치열하게 기록하고, 사진들을 이중백업하고, 의미없는 쓰레기들을 모아둔다.
집으로 돌아와 세탁기를 돌리고, 내일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머리통에 술을 붓고 있으면 관장님께서 체육관 인스타그램 계정의 스토리에 아까 찍어주신 영상을 올려주신다. 샌드백과 열띠게 부루스를 추고 있는 내 모습을 내 스토리에도 공유한다. 무도인박대리. 헛헛한 이름.
이불에 누워 거울에 적혀있던 신기한 주문을 되새겨 보며, 하루가 끝난다.
잽-원투-위아래훅 위빙더킹 오른쪽어퍼, 왼쪽 훅, 더킹위빙, 양훅, 오른쪽 어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