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의 나날들> 2025년 7월 8일 화요일
조만간 어딘가 크게 망가질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자잘한 부상이 자꾸만 쌓여서 손가락 마디들과 발, 팔꿈치, 무릎 등 테이핑과 보호대에 의지하는 부위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퇴근하고 운동을 하는 루틴이 굳어진 지 오래됐기도 하고 주 3-4회 이상 운동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살이 찌거나 몸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불안했다. 8월에 있을 유도 관련 자격증 시험만 치르고 잠시 쉬자고 스스로와 타협하고, 엉망인 몸 상태로 막무가내로 도장에 나갔다.
여느때와 같은 화요일 저녁이었다. 퇴근하고 따릉이를 타고 홍제천을 따라 페달을 밟았다. 소나기 소식이 있어서 힘껏 페달을 밟았고 다행히 비구름보다 먼저 도장에 도착했다. 전날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기도 한 데다가 흐린 날씨 탓인지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하품을 하며 준비운동을 하고 있으려니 뒤늦게 도착한 관원들이 비에 젖은 옷깃으로 들어왔다. 기어코 하늘이 비를 쏟아낸 모양이었다.
-오늘 같은 날씨에 많이 다칩니다. 다들 무리하게 하지 마시고. 자유 대련은 한 사람당 한, 두 판 정도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관장님의 말씀처럼 그날 나는 단 한 판의 대련을 했다. 무표정하지만 다정한, 곁눈질로 보면 류준열을 닮은 검은띠 K. 그는 단단한 신체와 훌륭한 무게 중심으로, 깔끔하게 기술을 구사한다. 까다로운 상대지만 늘 힘의 분배가 정확했기에 상대를 아프거나 다치게 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렇기에 내 왼쪽 무릎의 내측 인대에서 ‘우둑’ 소리가 났던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내내 K에게 넘어가기만 하다가 대련의 말미에 마지막으로 걸었던 회심의 왼쪽 빗당겨치기에서 나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무릎이 안쪽으로 무리하게 꺾이면서 우둑, 비틀리는 감각이 들었다.
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인 2016년 추석, 주말 유도회에 참가했다가 이번처럼 왼쪽 빗당겨치기를 걸고 왼쪽 무릎 내측 인대가 찢어졌었다. 오늘과 똑같은 상황, 똑같은 기술, 똑같은 부상 부위. 그렇기에 ‘우둑’ 하는 느낌을 받자마자 ‘아! 이거 그때 그거다’라는, 데자뷰를 느꼈다. 인대다. 최소한 인대가 찢어지거나 손상된 거다. 어쩌면 이번에는 몸이 더 낡았으니 아주 끊어졌을 수도 있겠다. 당시 다친 이후로 한 달 정도는 반깁스에 목발을 짚고 출퇴근해야 했고, 반년 가까이 유도를 하지 못했다.(못 참고 3~4개월 만에 종로YMCA로 복귀하고 말았지만.) 복귀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다리가 휘청이는 기분이 들었다. 즉, 재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유도를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언제든 왼쪽으로 빗당겨치기를 시도할 때마다 ‘또 다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곤 했다. 마치 러시안룰렛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왼쪽 빗당겨치기를 걸 때마다 나와 내기를 했다. 다칠까? 안 다칠까? 나아가 관장님을 비롯해 주변의 유도인들이 내게 항상 왼쪽 기술로 피하지 말라고 조언해줬지만 오른손잡이인 나는 자꾸만 잡기 싸움을 포기하고 왼쪽 기술로 도망쳤다. 왼쪽 무릎에 폭탄을 심어 놓고도 말이다. 도피는 늘 편한 방법이니까. 정작 익히기나 훈련 중에는 왼쪽으로 하지도 않으면서.
결국 이렇게 되었군.
이번에는 응급실에 가지 않았다. 어차피 가봤자 십년 전 그때처럼 임시방편에 가까운 조치만 취해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날 정형외과에 가기로 했다. 무릎 안에서 내부 출혈이라도 있는 건지 갑자기 귀에서 삐- 소리가 나면서 멍멍하고 어지러웠다. 누군가 관장님 사무실에서 얼음팩을 가져다 줘서 무릎 위에 얹어 두고 붓기를 눌렀다.
바깥에 비까지 오면 어째야 하나, 이 다리로 버스를 오르내릴 수 있을까? 당장 내일 출근은 어쩌지? 이걸 누구한테 소식을 먼저 전해야 할까? 아주 인대가 끊어진 거여서 수술까지 하게 되면? 그래도 최근에 마감했던 두 권의 신간 감리를 어제까지 2주에 걸쳐 마쳐놓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 그랬다면 목발을 짚고 파주에 가거나, 정말 미안하게도 다른 디자이너에게 대신 감리를 다녀와 달라고 부탁해야 했을 것이다.
머릿속이 잡생각으로 뒤엉키니 피로감이 밀려왔다. 도복을 갈아입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한참 얼음을 얹고 거울에 기대 앉아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가 한없이 낡아빠진 헝겊인형처럼 보였다. 손가락, 발가락마다 너덜거리는 테이핑이며-.
맞잡았던 류준열씨가 다가와 미안하다고 사과를 거듭했다. 내가 바보 같이 기술 걸다가 다친 건데……. 괜히 내가 더 미안해졌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 더 머무르는 게 민폐이겠다 싶어서, 당분간 뵙기 어려울 것 같다고 관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뜨거운 물로 절뚝이며 씻고, 도복을 말아 챙겼다.
너덜거리는 무릎과 젖은 머리로 나와 관장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관장님께서 계단을 같이 내려가주셨다.
-죄송합니다. 관장님 말씀 안 듣고 왼쪽으로 기술 넣다가 기어코 다쳐버렸어요.
-왼쪽으로 하실 때 힘이 많이 들어가 계셔서……. 일단 내일 꼭 병원 가 보시고요. 별일 없으셔야 할 텐데. 결과 나오면 알려주세요.
-네. ……그래도 관장님. 마지막에 그 빗당겨치기, 제가 그분 넘겼어요. 되게 어려운 분인데.
그런 두서없는 말과 멍청한 미소를 남기고, 젖은 바깥 공기 안으로 혼자 나아갔다. 다행히 비가 그쳐 있었다. 비까지 왔으면 정말 울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닥쳐온 불행에 비하면 '럭키'한 저녁 아닐까. 버스에 자리가 없어서 손잡이를 부서져라 붙잡고, 다친 왼쪽 다리를 들고 버텼다.
창밖을 보며 마지막 빗당겨치기를 곱씹어본다. 왠지 류준열씨가 그냥 또 넘어가주신 것 같기도 하고.
……만약 그런 거라면 좀 슬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