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의 나날들> 2025년 7월 9일 수요일
지난밤은 쉬 잠들지 못했다. 다친 다리로 절뚝이며 집으로 돌아와 가까스로 옷을 벗고, 얼음 주머니를 만들어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눕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높이가 다소 높은 수납형 침대라 평소에도 기어 올라가는 기분이었는데, 성치 않은 다리로 올라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리가 휘청이거나 굽혀질 때마다 유리를 긁어내는 것 같은 고통이 일었기에, 엉덩이를 먼저 침대에 얹고 두 팔로 소중하게 왼쪽 다리를 받쳐 안아 올렸다. 그리고 굽어지지 않게 천천히, 길게 뻗은 형태 그대로 침대에 내려 놓았다. 내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잠든 갓난아기나 깨지기 쉬운 고가의 물건을 다루는 것 같아서 새삼 왼쪽다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누워 있으려니 다이소에서 산 얼음 주머니가 왼쪽 무릎 위에서 자꾸 흘러내렸다. 어떻게든 붓기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른쪽 다리로 차가운 얼음주머니의 수평을 맞춰가며, 그렇게 혼자서 씨름하다가 스르륵 잠에 들었다. 다친 왼쪽 다리가 계속 저려서 새벽에도 몇 차례 잠에서 깼다. 그리고 깰 때마다 내일 병원에 갈 걱정으로 다시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서 9시 즈음이 되면 과장님께 연락드려서 상황을 보고드리고 반차 휴가를 올리자. 9시에 병원 문이 열 테니 가까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빨리 받아보자. 지금 미리 찾아볼까? 음, 집에서 가까운 정형외과가 두 군데. 이 병원 리뷰가 더 좋군. 여기로 가자. 주말에도 진료를 보네. 근데 만약 큰 병원에 가라고 하면? 다시 과장님께 연락드려서 하루 연차로 바꾸어야겠지. 근데 만약 수술해야 해서 입원까지 하게 되면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연차는 많이 남긴 했는데……. 노트북 들고 입원해야 하나? 그리고 보호자 없이 입원할 수 있을까? 차마 부모님께는 다쳤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아, 모르겠다. 여기서부터는 내일 병원에 가서 걱정하자.’
자고 일어나니 무릎의 통증이 더 심해진 듯했다. 눈을 뜨니 7시 즈음. 9시가 되어야 과장님도 출근하실 것이고 병원도 문을 연다. 누운 채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릎을 조금씩 움직여봤다. 무릎이 조금이라도 옆으로 돌아가거나 굽혀지면 ‘커헉’ 하는 깊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아서 2시간 정도를 누운 채로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웃긴 릴스를 보며 시간을 버텼다. 9시 즈음이 되자마자 우선 과장님께 긴급 반차를 올리고, 절뚝이며 새벽에 봐뒀던 병원으로 걸어갔다. 평소에는 터덜터덜 5분도 안 걸리며 걸어가던 길인데 이를 악물고 절뚝이며 가려니 15분은 걸린 것 같다.
엑스레이도 찍고 초음파도 봤다. 엑스레이를 찍는 침대가 너무 높아서 올라가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정말 고통스러웠던 건 무릎을 굽히는 자세였다. 간호사는 내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 엎드리게 하더니 무릎을 접도록 만들었다.
'이거 찍어야 해요.'
끄어, 헉, 아이고야, 온갖 비명을 지르면서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다행히 엑스레이상으로 뼈에는 이상이 없었고, 초음파를 보니 너덜거리는 인대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직 붓기 때문에 완전파열 여부는 보이지 않는다고, 일단은 상태를 보자고 하며 신경주사를 무려 세 방이나 놓으셨다. 허벅지 안쪽에 주사바늘이 들어올 때는 거의 사지를 바들거리며 떨었다.
의사 선생님이 처치를 끝내고 초음파실을 나가고, 침대에 누워 덜덜 떨고 있는데 간호사가 다가와 크고 딱딱한 무릎 보호대를 채워줬다. 한결 고정이 되어 무릎이 휘청이고 덜렁이는 느낌이 덜했다. 그래도 십여 년 전에 다쳤을 때는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반깁스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이 한여름에 양반이었다.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 목발도 건네 받았다. 겨드랑이에 끼는 부분, 목발 머리에 ‘M’이라고 적혀 있는 칙칙한 색깔의 목발이었다. 아마 사이즈가 ‘M’인 모양이었다. 길이를 조절하는 방법, 짚는 방법 등을 배웠다. 십여년 전에는 양발 목발을 짚었는데 이번에는 외발 목발이었다.
충격적인 건 외발목발의 사용법을 여태껏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픈 다리쪽이 아니라, 반대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워야 했다. 아픈 다리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으면 그쪽으로 몸의 하중이 실리면서 다친 다리에 부담이 가게 된다고 했다.
물리치료까지 받고, 새로 배운 목발 짚는 법으로 어설프게 절룩이며 걸어나왔다. 김애란의 소설 제목처럼 ‘바깥은 여름’이었다. 정말 더운, 한여름이었다. 집까지 느릿느릿, 절뚝절뚝 걸어갔다. 원래는 오후에 출근을 할 예정이었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과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하루 연차로 바꾸었다.
당장 수술 판정을 받은 게 아니라서, 일단은 이렇게 집으로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목발은 신발장에 세워두고 밝은 햇살이 드는, 낯선 집을 둘러봤다. 출근, 운동, 약속으로 범벅이 돼있던 삶의 부산물들이 집 안 가득 쌓여 있었다. 검은띠로 칭칭 묶인 간밤의 청도복이 세탁물 바구니 앞에 굴러 다녔다. 바닥은 머리카락과 먼지 투성이었고 이틀 전 밤의 설거지도 싱크대에 그대로 있었다.
미뤄왔던 이불 빨래, 간밤의 도복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모든 행동이 굼떴지만 나는 자꾸 ‘괜찮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집안일을 꾸역꾸역 했다. 하면서 목발의 머리에 쓰인 ‘M’에 대해 생각했다. 한동안 이 녀석이랑 계속 같이 걸어다녀야 할 것이다. 당장 내일 출근길부터. 이름에 대해 고민한다.
민석(Minsuk), 모모(Momo), 마이클(Michael) 등등… 첫 글자가 M으로 시작되는 이름을 그려본다. 고민하다가 ‘무제(MOOZE)’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좋아하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 <백의 그림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정확히는 ‘무재’다. 뭐, 소리나는 대로 내 마음대로 끌어오겠다. 마침 요즘도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을 읽고 있고, 작가님도 이 정도의 억지는 애독자에게 허용해주지 않을까.) 또 글을 쓰려고 빈 문서를 열 때마다 파일의 이름은 ‘무제’다. 운동이라는 오랜 루틴이 사라진 낯선 일상, 당장 내일부터의 내 삶 역시 ‘무제’일 터다. 운동으로 채우던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으니, 우선 아무런 제목 없이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래서 이 칙칙한 목발의 이름은 무제가 되었다.
이 긴 여름을 잘 부탁해, 무제.
......귀신일까요, 우리는. 귀신일지도 모르죠, 이 밤에, 또 다른 귀신을 만나고자 하는 귀신, 하고 말을 나누며 탁하게 번진 달의 밑을 걸었다. 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백의 그림자 | 황정은 | 민음사 | 2010)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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