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일"의 고단함과 기쁨
여름에 무릎을 크게 다친 뒤 거의 반 년 정도를 운동을 쉬고, 요즘은 퇴근 후 복싱장에서 운동을 조금씩 해보고 있다. 다치기 전만큼의 기량으로 되돌아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조급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자꾸만 이곳저곳 아프고 병원에 다니는 일이 잦아지면서, 하루하루 땀 흘릴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더없이 깊게 느끼는 요즘이다.
복싱을 하면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 아니 하루 중 가장 긴장되는 순간을 꼽으라면 미트를 치러 링 위에 올라갈 때다. 체력적으로 힘들다기보다 코치님께서 주문하는 대로, 리듬감 있게 미트를 맞추지 못하는 게 너무 죄송하기 때문이다.
“잽! 원투!”
“양훅 어퍼 바디”
“원투 쓱 빡!”
“원투 훅 더킹 더킹 어퍼 훅 투! 빽!!”
주문이 길어질수록 점점 뇌 연산이 느려지고 몸이 멈칫거리는 순간이 잦아진다. 리듬감이 깨져버린다. 마치 누군가 나를 웃기려는 의도로 회심의 농담을 던졌는데 내가 적절하게 리액션을 하지 못하고 ‘네?’라고 눈치없이 반문하는 느낌이랄까. 또는 회사에서 팀장님이 뭔가 급하게 요청을 하셨는데 허둥거리다가 내가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상황. 그렇다. 링 위에서도 나는 여러 차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게 된다. 도통 늘지 않는 제자의 허우적거림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는 지도자의 무력감은 어떠할까.
가르치는 일
선생님들께 죄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복싱장을 나설 때면, 나는 몇 년 전 유도장의 저녁 코치로 일했던 찰나의 시절을 복기하곤 한다. 이렇게 어수룩한 나에게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있었다는 게 여전히 나한테도 생경한 감각이다. 유도 4단을 따고 난 직후, 당시 다니던 유도관 관장님께서 감사하게도 지도자로 일해 볼 기회를 제안해주셨던 것이다. 그래봤자 주 2회뿐이었지만, 나인투식스 직장인으로 퇴근하고 저녁 7시부터 10시 반까지 세 타임의 유도 수업을 진행하는 일이었다. 너무나 감사하고 과분한 제안이었지만 선뜻 바로 수락하기가 어려웠다. 체력적으로 감당이 가능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도자가 될 만한 수준인지도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당시 다섯 평 작은 원룸에 살며 너무나 가난했던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이악물고 한번 도전해보자고 생각했다. 이 또한 내게 어떤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라며.
일을 시작하고 한달도 안되어 평소 내가 운동하던 도장이 아닌, 낯선 관원들이 있는 다른 지점의 유도장에 가서 저녁 코치로 일하게 됐다. 어린 아이들이 많은 도장이었다. 십대 청소년과 성인 관원의 비율이 약 7:3 정도였을까. 인근의 초중고 학생들이 주를 이뤘던, 시끌벅적했던 유도장. 준비운동과 구르기, 체력운동, 익히기, 메치기, 굳히기가 주요 커리큘럼이었다. 익히기 시간이면 나는 돌아다니며 관원들의 자세를 살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본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렵고 진땀나는 일이었고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했다. 유도를 잘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또 별개의 재능이었다. 설명을 해주고 직접 보여주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 짚어줘도 쉽게 개선되진 않는다. 머리로 얼추 이해가 돼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답답함은 나 역시도 잘 알고 느껴왔던 부분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관원들의 얼굴을 조우할 때면 미안함에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았다.
‘이들은 지금 소중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진지하게 유도를 배우고 있어.’
나 역시 적은 월급의 일정 부분을 쪼개어 운동을 배우는 것에 돈과 시간을 투자해온 사람이었다. 다른 취미에 쓸 수 있는 비용을, 그들은 지금 이 도장에서 보내는 시간에 투자한 것이다. 그들이 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단 1분도 아쉽지 않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들의 선택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마음을 늘 무겁게 했다.
쉬는 시간이면 거울 앞에서 자세 연습을 하는 관원에게 다가가 연신 나를 메쳐보라고 했다. 기술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면, 많이 메치게 해드리자. 연습용 더미로라도 그들을 위한 쓸모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나아가 ‘지도자’, ‘코치’라는 타이틀이 주는 중압감이 상당했다. 관원들 앞에서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에 매사 긴장해 있었다. 주말에 다른 도장에 가서 운동을 할 때는 대련도 실컷 하고 자유롭고 즐거운 기분이었지만, 정작 코치로 있었던 도장에서는 대련을 많이 하지 않았다.(부상의 위험 때문에 관장님께서 항상 대련을 주의하라는 방침이기도 했고.) 호승심이 큰 아이들이 종종 여자 코치라는 것에 승부욕이 동했는지 종종 자기랑 겨뤄보자고 덤벼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응하지 않았다. 굳이 그 어린 혈기에 장단 맞춰가면서까지 나를 증명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당시 지도자로서의 나는 왠지 내가 그 공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에 내내 겁에 질려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소심하고 겁쟁이인 내가-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가르치는 일에 대한 부담도 컸지만, 또 다른 부담은 운동 시간의 텐션, 분위기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운동 시간에 틀어 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짜는 것조차 긴장되고 어려웠다. K-POP TOP100과 같은 플리가 아무래도 대중적이면서 가장 무난했다. 솔직히 나중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일단 내 흥이 오르지 않으면 관원들의 흥도 오르지 않는다’라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노래나 J-POP 플레이리스트를 뽑아가기도 했다. 요네즈 켄시의 노래는 한국에도 제법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같이 운동하던 성인 관원들 중에 노래를 아는 이들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종종 ‘nas’나 ‘mobb deep’과 같은 올드스쿨 힙합을 플리로 짜갈 때도 있었는데 의외로 어린 십대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들썩이며 음악을 타는 모습을 보여서 신기했다. (시대는 달라도 역시 우리는 같은 모양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코치로 일하며 가장 크게 와닿았던 건 ‘내가 꽤 오랜 시간을 파티션 안에서 혼자 일하며 보내왔구나.’라는 자각이었다. 학창시절에는 나름대로 외향적인 면도 있어서 학급 회장도 몇 차례 하고 심지어 초등학교 때는 전교 부회장까지 했던 나였는데, 성인이 된 뒤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파티션 안에서 그래픽 프로그램과 씨름하는 소심한 회사원으로 십여 년을 보냈다. 그러던 내가 갑자기 10명 이상의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앞에서 ‘자, 준비운동 시작하겠습니다. 맞춰 서주세요.’, ‘차렷! 예하고! 익히기 시작!’, ‘하나, 둘, 세엣, 네엣~’ 등등 사범님이 하던 대사들을 우렁차게 외치려니 처음에는 말문이 쉽게 열리질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큰 목소리를 낼 때면, 임용 시험을 치르고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갔다. 대체 어떻게 이 수많은 시선들과, 영겁과 같은 시간을 모조리 책임지고 있는 거냐.
저녁 수업 세 타임을 마치고, 밀대와 청소기로 도장 청소까지 마치고 그날의 근무 보고를 관장님께 보내고 나면 밤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막차를 놓칠까봐 옷도 제대로 안 갈아입고 도복 바지를 입은 채로 버스를 타곤 했다. 단칸방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땀에 절은 노곤함과 자괴감, 자기 반성으로 점철되어 있곤 했다. 관원 모두를 만족시켜주지 못한 것 같아서, 누군가는 케어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내 역량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 시간들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 역시 ‘사람’인 것이다. 내 어리숙한 지도에도 작게 끄덕이며 호응해주고 웃어주던 얼굴들. 같이 땀범벅이 되어 마무리 인사를 나누던 저녁. 마무리 운동으로 배밀기 100개를 하겠다는 말에 장난스레 비명을 지르던 아이들. 모든 수업이 끝나고 청소기를 돌리는데, 다시 도장으로 내려와 오늘 고생하셨다며 건네주시던 음료수. ’코치님!’ 하고 부르며 내게 건네준 그들의 다정한 존중이, 이 내향형 인간으로 하여금 용기내서 큰 목소리로 구령을 외칠 수 있게 해줬다.
작년 연말, 코치로 일하던 당시 고등학생이자 유도학과 입시반이었던 M에게서 오랜만에 메시지를 받았다. 수업이 끝나면 늘 ‘선생님, 오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머리 숙여 인사하며 도장을 나서던 예의 바른 아이. 오늘도 못난 지도자였다고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마다, 내 마음에 가장 큰 힘이 됐던 게 M이었다. 도중에 유도를 그만두고 다른 진로를 택한 M은 훌륭하고 멋진 대학에 합격해 있었다. 매사에 늘 선한 에너지로 열심히 하던 M이 어떻게든 행복해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받았던 게 너무 많아서, 나는 정말로 M이 행복하길 빌며 진심으로 축하와 응원을 보냈다. 축하해. 다가오는 스무 살도, 대학 생활도!
M이 스무 살을 앞두고 있다니, 그 시간으로부터 참 많이도 걸어나왔구나. 지도자로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동안 나 역시 그들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관원들에게서 내가 곧잘 하는 실수나 습관 같은 게 보일 때, ‘아, 내가 이래서 안됐구나.’라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마치 내 자세를 제 3자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기분이었달까.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던 귀한 시간이었고, 나아가 내게 ‘지도자’라는 타이틀은 아직 과분하다는 걸 깨닫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 내 유도를 할 수 있게 됐다. 주거지가 바뀌면서 도장도 바뀌었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외롭지만 편안한 기분으로 운동하게 됐다. 언제까지고 내내 미숙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좀더 내 유도를, 내 운동을 하고 싶다. 몸이 허락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껏 넘어가고 다시 또 배우고, 부서지고, 회복하고.
물론 다시 누군가 내게 유도를 물어본다면 최선을 다해 알려 줄 것이다. 유도가 얼마나 멋지고, 강한 운동인지.
“일단 오늘은 첫날이시니까 낙법부터 알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