멱살을 잡고 나누는 안부

차렷, 예하고! "익히기" 시작!

by 무도인 박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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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렷! 예하고. 익히기 시작!”

도복을 입은 이들이 두 줄로 길게 서서, 두 사람씩 짝지어서 맞잡고 서 있다. 한 사람이 먼저 맞잡은 이를 상대로 메치기 기술을 지읏기 단계, 즉 메치기 직전의 자세까지만 취하고 나오길 반복한다. 기술을 받아주는 상대는 적당히 힘을 준 상태로 탄력 있게 기술을 받아주며 큰 목소리로 갯수를 센다. 10회 내지는 20회를 하고 난 뒤 포지션을 서로 바꿔서 이번에는 ‘받기’를 해주던 상대가 ‘잡기’가 되어 자신의 기술을 연습한다. 번갈아 기술을 마칠 때 즈음 대열의 귀퉁이에 서 있는 사범님이 크게 외친다. ‘거기까지! 차렷! 예하고!’ 맞잡기 위해 가까이 붙어있던 이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서로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마치 포크댄스를 추듯이 한 칸씩 옆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상대와 마주 선다. 이렇게 상대를 바꿔가며 메치기 전까지의 자세 연습을 하는 과정을 ‘익히기’라고 한다. 어느 유도장이든 하루의 운동 커리큘럼에 익히기가 반드시 들어간다.


나는 익히기 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새로운 상대와 맞잡기 전 머리 숙여 인사를 하는 짧은 시간 동안 설레는 궁리를 한다. 이 상대에게 어떤 기술을 연습하는 게 좋을까? 상대의 체형에 따라 내가 어떤 기술을 연습하는 게 효과적일지, 같은 기술을 하더라도 목깃을 잡는 게 나을지, 뒷깃을 잡는 게 나을지 선택지가 달라진다. 나보다 월등히 덩치가 큰 상대라면 업어치기를 연습하는 게 좋다. 물론 업어치기를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날이라면 상대가 나보다 작을 경우에도 무릎을 굽혀서 상대의 띠보다 내 띠가 더 아래에 위치할 정도로 낮게, 또는 아예 무릎을 꿇으면서 들어가는 업어치기를 연습할 수도 있다. 이렇듯 익히기는 메치기 자세를 몸에 익히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다양한 상대와 맞잡아보는 경험의 데이터를 쌓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나, 둘, 세엣…

둘씩 짝을 지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저마다의 속도로 숫자를 외쳐대니 익히기 시간은 아주 시끌벅적 난리통이다. 기술을 연습하다가 차올린 발이 옆사람을 칠 때도 있으니 항상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모든 관원이 정신없이 익히기를 이어가는 동안 사범님께서는 소란스러운 대열 사이를 돌아다니시며 자세를 봐주신다. 몸의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거나, 상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던가. 어떻게든 상대를 넘기겠다는 생각에만 골몰하다보면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거나, 기술의 핵심적인 디테일을 놓치곤 한다. 사범님이 짚어주신 부분을 신경쓰며 다시 동작을 반복한다. 하루 아침에 바로 개선되지는 않겠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익히기를 이어갈 테니까. 묵묵히 하나의 기술을 꾸준히 반복하여 갈고 닦는 그 과정이 마치 칼을 벼리는 것과 같아서, 나는 익히기를 하는 동안 마음이 평안하고 충만해진다. 스스로의 몸에 기술을 아주 천천히 새겨넣는 점진적인 변화의 감각.


사람이 많을수록 익히기는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친다. 가장 많은 인원과 익히기를 해봤던 때는 2016년 즈음 종로에 있는 YMCA 유도장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유도장이 상당히 넓고 천장도 높았으며, 평일 저녁에는 종로의 사무실에서 퇴근하고 몰려온 직장인과 인근 학교의 학생들까지 뒤섞여 함께 운동하는 인원이 늘 20~30명 정도로 많았다. 덕분에 준비 운동과 구르기 시간도 길었고 익히기도 꽤나 길게 했었다. 한쪽 줄은 검은띠 유단자들이 고정으로 서 있고 마주 서 있는 한쪽 줄만 옆으로 돌아가면서 진행했는데, 인원이 많다 보니 첫 번째 익히기 차례에서 만났던 사람이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내 앞에 서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시 나는 2단을 따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고정해서 서 있는 검은띠 대열에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신기하게도, 어설프게 더듬더듬 첫 번째 익히기를 같이 했던 흰띠가 약 십여 명의 검은 띠를 거쳐 다시 내 앞으로 돌아올 때마다 기술이 눈에 띄게 견고해져 있었다. 함께 맞잡았던 검은띠 분들과 사범님께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덕분이리라. 익히기 한 바퀴를 돌았을 뿐인데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땀에 젖어 돌아오는 얼굴들이 반갑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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멱살을 잡고 나누는 안부

익히기 시간을 좋아하는 또다른 이유는 익히기를 하는 동안 맞잡은 이와 긴밀하게 도란거리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숫자를 세는 사이사이의 호흡에 체육관 밖 근황이나, 그날의 컨디션, 서로의 자세에 대한 피드백 등이 분주히 오간다.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짝을 바꾸며 진행되기에 익히기를 하는 동안 그날 체육관에 출석한 이들과 자연스럽게 한 마디씩 인사를 나누게 된다.


‘이직한 회사는 괜찮으세요?’

‘머리 새로 하셨어요? 뭔가 평소랑 달라요.’

‘지금 제가 뒤로 밀리는데, 저를 밀지 말고 당겨 보셔요.’

‘파스 냄새가 나는데 혹시 어디 다치셨어요?’

‘시합 준비는 잘 되어 가셔요? 체중은 얼마나 더 빼야 해요?’


한 바퀴, 두 바퀴 지나갈수록, 차분하게 정돈돼있던 사회인의 얼굴들이 점차 땀에 흥건해진다. 젖은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이마에 달라붙어 있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맞잡는 목깃 역시 땀에 흠뻑 젖어 눅진하게 손에 감긴다. 서로의 축축한 멱살을 잡고 다정하게 도란거리다보면, 하루종일 파티션 안에서 외롭게 모니터와 씨름 하며 날섰던 마음이 말랑해지는 것이다.

처음 흰띠를 매고 낙법을 배우던 시절, 도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낯설어서 안 그래도 내향적인 성격인데 더 얼어붙어 있었다. 낙법을 연습하느라 구석에서 내내 혼자 맨땅에 헤딩을 하고, 막간의 쉬는 시간이면 시끌벅적 떠드는 사람들의 먼 발치에서 돌부처 마냥 무릎을 꿇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극내향인으로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것이 숨막히게 어려웠다. 그러다가 밭다리, 한팔 업어치기 등 메치기 기술을 배우면서 익히기 대형에 합류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관원들과 말을 섞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서 ‘익히기’는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고 즐거운 시간이다.(물론 지금도 내향적인 성격은 여전해서, 유도관이든 복싱장이든 커리큘럼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주로 구석에서 혼자 몸을 풀며 머쓱함을 달랜다.)


얼마 전 연말, 청림유도관에 가서 양팔 업어치기 익히기를 하면서 문득 ‘아, 내가 이 행위를 참 오래도, 많이도 해왔구나.’라는 기분이 들었다. 국가대표나 실업팀에 소속된 전문 선수들만큼의 밀도 있는 시간은 아니었겠지만, 이 반복적인 행위를 지겨워하지 않고 먹고 자는 일의 한 부분처럼 꾸준히 해온 스스로가 의아할 정도로. 그렇게 오랜 시간 반복해온 만큼 나의 유도는 노련해졌는가? 그 질문을 놓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면 쉬 답하기가 어렵다.

익히기가 한창인 주변을 둘러봤다. 마치 도복을 입고 여럿이 춤을 추는 것 같다. 서로 손을 맞잡은 건 아니지만 리듬감 있게 기술을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는 탄력적인 움직임과 빠르게 사뿐거리는 발. 뒤엉키는 팔꿈치와 시선을 따라 상대의 몸이 나에게 기대어 왔다가 멀어진다. 무릎을 굽히며 낮게 파고들며 돈다. 스프링을 단 것처럼 튀어오르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익히기는 다정하고 아름다운 춤, 우리를 날카롭고 견고하게 벼려주는 무반주 포크댄스. 노련해지지 않았으면 어떠랴. 일단 계속 맞잡고, 또 당장의 즐거운 춤을 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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