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들에게 분 피바람 ‘분서갱유’]
군현제를 주장했던 이사는 진나라의 승상이 되어 ‘분서갱유’를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분서갱유의 ‘분서(焚書)’는 ‘책을 불태워버린다’, ‘갱유(坑儒)’는 ‘진나라 통치에 반발하는 유학자를 땅에 묻어버린다’는 뜻으로, 몹시 잔혹한 기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시황제는 이 건의도 받아들입니다. 이사를 총애했기 때문인데요. 이사가 주장한 군현제의 효과를 톡톡히 봤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시황제가 마냥 이사의 뜻에 의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순우월(淳于越)’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싫어하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에요.
본디, 학자나 지식인들은 비판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진시황제의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통치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당연히 있었지요. 그 중 순우월이라는 유학박사는 진시황을 자주 비판했습니다. 과거의 봉건제를 시행하지 않으면 진나라가 금방 멸망할거라고 단언하기도 했고요. 이를 불편해한 진시황제는 순우월과 그와 뜻을 함께하는 유학자들을 싫어했습니다. 법가를 중시했던 이사도, 이런 유학자들이 중앙집권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게 돼요. 그렇다면, 유학자들의 숨통을 막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사는 ‘유학 서적을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건의한 것이 그 유명한 ‘분서갱유’였어요.
진시황제는 결국 역사서와 의약, 농업 관련 서적을 빼놓고는 모두 불태워버리고, 유학 서적에 대해 논하는 사람은 다 사형시키겠다고 공포해요. 실제로 다음 해에는 400여 명을 땅에 파묻어버립니다. 이쯤에서, 이 무시무시한 일을 ‘왜 시행 했는가’를 잊으면 안 되겠죠? 앞서 언급했듯, 유학자들이 중앙집권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여 시행되었기에, 분서갱유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물을 쌓으려다, 나라가 무너지다]
분서갱유를 비롯하여 다양한 통일정책을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던 진나라는 얼마나 오래 태평성대 했을까요? 놀랍게도, 진시황제가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하고 맙니다(BC 214년).
거대 제국 진나라가 멸망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진시황제가 거행했던 무리한 대토목공사 3가지가 주요 원인으로 꼽힙니다. 진시황제가 집권하는 동안 백성들은 혹독한 공사에 동원되고, 가혹한 법치에 시달렸습니다. 이렇게 말로만 들어도 고통스러운데, 실제 백성들은 얼마나 숨 막히고 힘들었을까요?
진나라 멸망 원인으로 판단되는 3가지 대토목공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대토목공사는 그 유명한 ‘만리장성’ 건축이었습니다. 대체 이것을 왜 쌓았는지가 궁금해지는데요. 건축 의도는 단순했습니다. 북방의 흉노족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그리하여 5천여km의 장성을 쌓게 되는데, 완전히 새로 쌓은 것은 아닙니다. 춘추전국시대 때 각 국가들이 만든 것을 연결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공사였습니다.
두 번째 대토목공사는 ‘여산릉’ 건축이었습니다. 여산릉은 진시황제의 무덤인데요. 높이가 100미터, 한 변이 500미터로 현존하는 단일 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 규모가 가늠이 되시나요? 100미터는 요즘 아파트 30층은 족히 넘는 높이이고, 총 넓이를 평수로 따지면 거의 60만평이랍니다. 60만평, 숫자만으로도 압도적이지만 실제 크기가 잘 상상이 안가지요? 우리나라에서 단일 캠퍼스가 가장 크다는 서울대학교의 면적이 45만평이니, 여산릉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무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거대한 무덤 안에 대체 무엇을 묻었을까요? 진시황제의 시신만 외로이 매장했을 리 없겠지요. 여산릉에는 진시황제가 사후에도 호화로운 황제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현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문무백관은 물론, 병사들까지 모두 인형으로 빚어놓았어요. 그 중, 시황제의 묘를 지키는 친위군단으로 보이는 ‘병마용갱'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기도 하는데요. 전부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머리 모양으로 몹시 섬세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1974년, 중국 시안 시골마을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가 여산릉의 병마용갱을 발견했을 때 사람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해요. 그만큼 정교하고 보존이 잘 되었다는 의미겠죠?
세번째 대토목공사는 ‘아방궁’ 건축이었습니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사는 궁전이, 최초의 황제인 자기에게 걸맞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요. 왕이라는 칭호를 황제로 바꿔버리는 데 이어서, 궁전 역시 새로 지으려했습니다. 결국 거대한 규모의 궁전을 짓기 시작했고, 그 규모는 1만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고 해요. 한 줄에 100명씩 앉아도 100줄을 앉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럼 이 어마어마한 궁전을 짓기 위해 어떤 사람들을 동원했을까요? 바로, 죄수들이었습니다. 그 수는 놀랍게도 7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하는데요. 놀라움을 넘어 우리가 생각해볼 점이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죄수가 70만 명이나 됐을까요? 이는 진시황제가 몹시 가혹한 통치를 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 궁전은 불 타 없어지는 순간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아방궁을 불로 태울 때, 그 규모가 너무 커서 3개월 동안이나 탔다고 하네요.
이상으로 진나라의 멸망 원인으로 꼽히는 대토목공사 3가지를 알아봤습니다. 이러한 공사들에 연인원 30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진나라 인구가 2천만 명으로 추산되니 인구의 약 15%, 즉, 10명 중 1명은 공사에 투입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시황제가 죽은 후에도 공사는 계속 되었어요. 2세 황제가 높은 세금을 징수하며 공사를 밀어붙였고, 국민들은 강제적이고 고된 노동에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진승과 오광이라는 두 빈농이 반란을 일으키는데요. 이는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이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반란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이어서 유명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항우와 유방이었습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진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진시황제가 죽은 지 고작 4년 만에 말이지요. 중앙집권체제 확립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야망가 진시황제!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당시 그는 무척이나 통탄해 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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