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까지는 학교에서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분을 ‘선생님’이라 부르고, 대학생이 되면 보통 ‘교수님’이라 부릅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은사님’ 혹은 ‘스승님’을 뵈러 간다고도 하지요. 이렇게 선생님과 비슷한 호칭이 여러 가지이듯, 역사 속에서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칭호도 여러 가지이죠.
어떤 이에게는 ‘OO왕’ 또는 ‘OO대왕’, 어떤 이에게는 ‘OO황제’라고 하며 칭호를 달리했지요. 보통 중국의 역대 왕조에 황제들이 있었죠. 우리나라도 고려 초와 대한제국 때 황제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황제라는 칭호를 처음 만든 사람이 있으니 바로 진시황제입니다. 그는 어쩌다 ‘황제’를 발명한 것일까요?
우리에게 황제라는 칭호부터 의문을 남긴 진시황제! 그는 더욱 궁금증이 생기는 건축물도 남겼습니다. 바로, ‘만리장성’인데요. 이것은 우주에서도 보인다는 루머가 있을 만큼 거대하고, 인간이 만든 가장 큰 건축물로 뽑히기도 합니다. 진시황제는 이 성을 대체 왜 쌓았을까요? 그에게 이 성은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요?
[왜 ‘진시왕’이 아니라, ‘진시황제’일까?]
전국시대 진나라의 왕 정(政)은 분열되어있던 중국 6개국을 10년 만에 멸망시키고 중국 전체를 통일했습니다. 넓은 영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얼마나 의기양양했을까요? 그는 결국 기존에 쓰던 ‘왕’이란 칭호가 자신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합니다. 본인이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삼황오제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 끝에,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서 ‘황제’란 칭호를 만듭니다. ‘지상최고의 군주’라는 뜻이었죠. ‘황황(煌煌)한 상제(上帝)’, 즉 ‘빛나는 우주의 주재자’라는 해석하기도 해요.
그렇게 탄생한 이름이 바로 ‘진시황제(秦始皇制)’랍니다. 황제란 칭호는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2100년 간 중국 군주의 정식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니, 최초의 황제였던 진시황제가 이 사실을 안다면 무척 뿌듯하겠지요?
[진시황제의 골칫거리 ‘출생 스캔들’]
진시황제는 대단했던 인물답게 출생과 관련된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진나라 왕의 아들이 아닌, 상인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스캔들이었습니다.
여불위는 대단한 상인이었습니다. 이해득실을 판단하는데 능했고, 세상의 흐름을 꿰뚫는 눈을 가졌었죠. 그가 여러 곳을 오가며 부를 쌓던 중, 다른 나라의 볼모로 잡혀있던 진시황 아버지를 보고는 “기이한 물건이니 사둘만하다”고 중얼거렸다고 해요. 그는 진시황의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돈으로 진나라 세력가들에게 로비를 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진시황의 아버지는 여불위 덕에 결국 왕이 됩니다. 그가 바로 ‘장양왕’이지요.
그런데, 진시황제가 태어난 후 놀라운 소문이 전국에 퍼졌습니다. 여불위가 진시황제의 생모와 그렇고 그런 불륜관계라는 소문이었지요. 진시황제 역시 여불위의 아들일 것이란 이야기가 천하에 파다했습니다. 이후 군주가 된 진시황제에게, 불편한 소문으로 자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여불위는 당연히 눈엣가시였겠지요? 여불위가 엄청난 권세를 부리는 것 역시 탐탁지 않았을 테고요. 결국 진시황제는 노애의 반란을 빌미로 여불위를 제거합니다. 매일 잠 못 이루게 하던 스캔들의 씨앗(?)을 제거한 진시황제. 그의 마음은 한 결 가벼워졌을까요?
[봉건제냐 군현제냐 그것이 문제로다]
진시황제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비단 출생 스캔들뿐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중국을 통일하는 것보다 큰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게 더 어려운 문제였지요. 진시황제는 신하들과 한바탕 토론을 벌여 그 방안을 강구하고자 했습니다.
진나라 통일 이전의 국가들은 봉건제를 시행했습니다. 군주가 자신의 자제와 일족, 공신들에게 나라의 일부를 주고 다스리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혈연적으로 가까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문제가 발생합니다. 처음에는 군주의 친형제였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사촌이 되고, 더 이후에는 육촌이 되기에 이르러요. 군주와 혈연적으로 멀어지게 된 거죠. 그렇다면, 이게 뭐가 문제일까요? 바로, 중앙에 대한 충성이 약해지고 지방에서 독자세력화 되는 게 쉬워지면서, 결국은 왕의 지방통제권이 약화됩니다.
‘이사’라는 신하는 봉건제와 다른 ‘군현제’의 시행을 주장합니다.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는 현을 두어, 군수와 현령을 황제가 임명해 파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지방관은 황제의 친인척이 아니라 단순한 관리였어요. 아들에게 그 자리를 주는 세습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임기가 끝나면, 다시 황제가 다음 사람을 임명하는 방식이었지요. 진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군현제를 채택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군현제를 통해 지방에 대한 황제의 장악력이 강해졌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답니다. 진시황제의 선택이 옳았다고 볼 수 있겠죠?
군현제와 더불어 중앙집권을 위해 펼친 정책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도량형·화폐·문자 등을 통일한 것인데요. 이게 중앙집권에 대체 어떤 도움을 주는 걸까요? 자, 지역마다 쓰는 단위, 돈, 문자가 다르다고 생각해봅시다. 중앙에서 진시황제가 내린 명령이 빨리 빨리 수용되기 어렵겠지요? 지역민들이 교류하기도 불편하고요.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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