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의 역할론
필자가 오래 전인 2003년에 처음 해보는 배낭여행의 목적지로 유럽의 10개 도시를 선택해서 약 2개월 동안 돌아다녔던 것은, 당시 디자인 전공하는 대학생으로서 유럽 디자인의 뿌리 깊은 역사를 둘러보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큰 이유였다. 유럽이 디자인의 본고장이라고 어렴풋하게 들어본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눈으로 직접 구석구석 확인해보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유럽의 디자인이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되던 시절이었으나, 지금 미국의 디자인도 예전과는 달리 많이 발전했다. 특히 예술가의 의도와 표현법이 중요시되던 전통적인 예술이 아닌 관람자의 해석과 느끼는 감성이 중요시되는 현대미술이 발전함에 따라, 미국의 디자인도 빠른 속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지닌 전통적인 예술분야와는 다르게, 요즘의 빠르게 성장하는 IT분야와 맞물려서 미국의 상업 디자인 분야가 오히려 유럽의 그것보다 낫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그 선발 주자로써, 조 두셋(Joe Doucet)을 손꼽고 싶다. 1970년생 미국 태생의 비교적 젊은 디자이너인 그는 본인 스스로 디자이너, 예술가, 사업가, 발명가 등으로 소개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주로 뉴욕이 활동 무대인 조 두셋의 작업물들을 모아둔 포트폴리오를 보면 IT제품, 가구, 패브릭, 패키지, 휴대폰 앱, 가전제품, 술병 등 그의 다방면의 관심사를 느낄 수 있다.
그런 그가 요즘에는 3D 프린트에 푹 빠진 듯하다. 보통의 3D 프린트가 아니라 철(steel)과 도자기 재질을 포함한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실험적으로 12가지의 제품 컬렉션을 '뉴욕 디자인 위크'(NYCxDesign Week)에서 ‘Othr’라는 브랜드로 선보였다. ‘독특하고 동시에 유용한' 생활용품 디자인을 지향하는 Othr 브랜드는 조 두셋이 다른 디자이너인 '딘 디 시모네'와 '에반 클라보트'과 함께 설립하면서, 현업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제품 디자이너들과 프로젝트 단위로 협업하는 형식으로 컬렉션을 구성한다. 그래서 각각의 제품마다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디자인이 달라지기 쉽겠지만, 조 두셋이 전체적인 방향성을 잡으며 12가지 제품 모두 미니멀한 형상과 기능적으로도 충실한 제품을 구현해냈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 형태의 도자기로 제작한 새집(Birdhaus), 동(Bronze)을 소재로 한 얇은 삼각형 형태와 손으로 쥐기 쉽도록 약간의 굴곡으로 그립감과 형태미를 극대화시킨 케이크 나이프 세트(Cru Cake Spatula & Knife Set)등을 보면, 이 제품들이 정말 3D 프린트로 제작한 것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기본적으로 군더더기를 배제하는 모던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디자인으로써 간결하고 선이 아름다운 제품을 보여준다. 철, 도자기의 소재와 조형적 형태 때문인지 동양적특히 일본 디자인의 느낌도 많이 난다.
제품의 디자인 퀄리티가 근사한 것만큼이나 사업적 접근법도 훌륭하다. 산업시대 이전의 예술품들이 소수에게 돌아가는 혜택이었다면, 산업시대 이후의 디자인은 대량생산을 바탕으로 한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좋은 제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큰 목표였다. 하지만, 디자인 시대에서도 자본의 논리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흔히 좋은 디자인, 독특한 디자인은 소수에게만 허락되고, 값싼 디자인들만 다수에게 돌아가는 구조였다. 제품을 만들려면 커다란 금형을 제작해야 하고, 사업적인 손익분기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 수백에서 수만 개가 양산이 되는 시스템.
그러나 3D 프린터가 등장하면서, 조 두셋은 많은 사람들이 독특하고 높은 품질의 디자인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좋은 디자인을 입힌 제품들을 소량으로만 제작해서 소비자 입장에서는 희소가치를, 제작자 입장에서도 값싼 제작 비용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이다.
"We believe in surrounding ourselves with fewer and better things"
-라는 Othr 브랜드의 모토가 그런 그의 생각을 잘 표현해준다. 이것은 그가 본인을 '디자인, 예술, 사업가'라고 소개할 만큼 다양한 방면의 관심과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통찰력 있는 접근이 아닐까 한다.
한 분야에 깊이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품질의 결과물을 내는 장인(master)으로써 칭송받는 것이 전통적인 디자이너가 추구해야 할 역할론이었다면, IT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에게는 깊이 있는 철학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의 관심을 접목시켜서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 이 글은 이 블로그와 동시에, 프리미엄 예술 문화 매거진인 'Club Balcony' 의 2016년 7~9월호의 'Designer's Report'에 실었던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