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tudy in U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hwan Feb 25. 2016

영어에 대한 단상

# 1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영어에 대한 실력이 자신감이 있었다. 운 좋게도 스무살 초반에 카투사로 군생활을 한 덕분에 적당한 영어의 언저리쯤은 알아듣고, 나의 의견(혹은 애정표현)도 적당히 전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술을 한잔 마신다거나, 억울한 일로 말다툼이 생기기라도 하면 차분했던 영어는  온데간데없고 fu... 같은 욕부터 혀끝에 쉽사리 맴돌긴 했으나, 그래도 중요했던 건 영어에 대한 큰 두려움은 없었다는 것.  모든 카투사 출신들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배치받은 부서에 따라서 제대할 때까지 ‘기브미 쪼꼬렛’정도만 해도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잠잘 때만 빼고 오로지 영어만 사용해야 하는 곳도 있다. 내가 있던 사무실은 후자의 경우였고 덕분에 ‘기브미 쪼꼬렛’ 정도밖에 안 되는 영어를 이후에 많이 성장시킬 수 있었다.



# 2

내가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던 2006년만 하더라도, 해외 유학파 출신이 그리 많지 않았던 때라 영어를 그야말로 ‘조금’만 해도 ‘우오오-’라는 칭찬을 받을 때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유학의 경험이 없었지만, 단지 카투사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해외 관련 프로젝트가 생기면 ‘너 잠깐 이리 와서 이것 좀 해봐라’라고 이곳저곳에서 불러주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일들을 겪어보면서 회사의 일들을 조금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몇몇의 직장상사분들은 내가 유학파인 줄 착각하기도 했고, 이후에도 해외 관련 프로젝트가 있으면 이따금씩 내게 와서 도움을 청하시곤 하였다.


심지어 이후에 유학파들이 대거 입사를 해서 회사에 영어를 잘 하는 친구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보수적인 직장 상사의 취향은 쉽게 변하지 않더라.  여전히 해외 프로젝트나 프레젠테이션 통역 같은 것들을 내가 가끔 맡아서 하긴 했는데, 한 번은 프레젠테이션 통역 중에 앞자리에 앉은 미국 교포 녀석이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못했었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내가 영어 하는 것보다 네가 한국말 하는 게 더 나을 테니,  다음번부터는 네가 좀 해주라’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난다. 



# 3

그런데, 그게 잘못한 부탁이었다.  영어는 Memorize가 아니라 Familiarize 해야 한다는 말처럼, 그 이후에 내가 영어를 그나마도 사용하지 않다 보니까 영어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떨어지고, 급기야 다시 ‘기브미 쪼꼬렛’정도 밖에 못할까 봐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몇 년전 유학 준비를 하면서 꾸준하게 영어를 공부한다고는 했는데, 떨어졌던 영어에 대한 감각을 다시 올리는 일은 (나이 탓인가) 생각보다 무척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잘 올라가지도 않았고.


2년 전에 뉴욕에 와서도,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난해함보다는 계속해서 영어를 써야 하는 압박감이 더 커서 생각보다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들었다.  수업시간도 Voice Recorder를 사용해서 수업 후에도 반복해서 듣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프로젝트 관련한 정보(Documentation & Tutorials)들은 거의 모두 웹에서 얻게 되는데, 당연히 모두 영어로 되어있는지라 적절한 정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애들보다 두배, 세배의 시간을 더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정보들은 다 있는데, 그걸 제한된 시간 내에 다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란 겪어보지 않고는 답답함을 토로할 길이 없다.



# 4

우선 내가 있는 디자인 분야에 한정을 짓고 얘기를 하자면- 디자인 관련한 산업들이 조금 과장하면 70-80% 이상 미국에 쏠려있기 때문에, 이론 부분이나 학계에 진출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업계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당연히 미국을 고려하게 되므로 영어는 필수적이지만, 사용하는 영어의 수준이 아주 높진 않다.  가령 RP(Repurchase Agreement, 환매조건부채권매매)같은 한글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는 몰라도 된다는 말이다. (참고로 디자인에서 말하는 RP는 보통 Rapid Prototype의 약자다)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노력을 하면 금세 익숙해질 수 있다.


나름 평판이 좋은 학교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어 성적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데, 내 경우에는 IELTS로 시험성적을 준비했다.  왜 TOETL을 보지 않고 IELTS를 했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이 좀 있었는데, 단순한 이유다.  컴퓨터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보다 종이에 밑줄 치면서 읽는 게 더 쉽고 빠르기 때문에. (이것도 나이탓인가) 그리고 IELTS의 좋은 점 중에 하나는, Speaking 시험을 볼 때 감독관과 눈을 마주치면서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레코더에 녹음된 흐릿한 음성을 가지고 나의 말하기 능력을  평가받는 것보다, 눈빛, 제스쳐, 표정 등으로 말하는 내용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만약에 위의 두 시험 중 어떤 것을 목표로 공부해야 하는지 고민이라면 개인적으로 IELTS가 좀 더 낫지 않나 싶다.


학교에 따라서는 GRE/GMAT을 요구하는 학교도 간간이 있지만 다행히 내가 목표로 했던 몇몇 학교들은 그런 것들을 요구하진 않았다.  그런 것만 봐도 디자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얕은’ 영어실력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같은 디자인 분야라고 하더라도, 이론 쪽에 가깝다면 GRE/GMAT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ex. Cornell 대학교의 HCI 석사과정)



# 5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꽤 많은 학교들이 영어성적 제출이 필수이긴 한데 영어성적이 모자라다고 칼같이 불합격시키지는 않는다.  앞서 내가 쓴 글에 ‘미국에서는 우는 아이 젖 한번 더 준다’라고 했었는데, 이 경우도 해당이 된다.  친한 후배 중에 영어성적이 아주 조금 모자랐으나 입학 지원 마감일이 코앞이라 더 이상 시험을 더 볼 수가 없어서 그냥 지원했던 녀석이 있다.  어떻게 붙었냐고 물어보니, 입학처에 이메일을 써서 ‘제출하는 시험성적은 조금 모자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해외 관련 프로젝트한 경험들과 그 성과를 입증해주는 추천서들을 추가적으로 제출하여, 영어로 겪는 어려움은 아마 없을 것이니 참고해주기 바란다’라고 장문의 이메일을 써서 보냈더니, ‘OK’라고 쿨하게 답이 왔다고 한다.  실제로도 많은 수의 학교들이 영어성적을 ‘검증하는 자료의 일부’로 사용을 하는 것이지, 0.1점 모자라다고 떨어뜨릴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아, 물론 MIT처럼 0.1점 모자란다고 떨어뜨리는 학교도 있다.)



# 6

얼마 전에 한국에서 유학 준비 중인 후배가 문자메시지로 말을 걸어왔다.   그중에 하나는 ‘제가 배우고 싶은 프로그래밍 언어들을 미리 공부해가면 좋지 않을까요?’ 하는 내용이었는데, 그것보다는 영어를 좀 더 끈질기게 하라고 권해주었다.  어쩌면 나로부터 좀 더 크리에이티브한 대답을 듣기 원했던 그 후배는, 영어 공부하라는 내 말이 꼰대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어.  영어 쓰는 나라에서 공부하려면 당연히 영어를 ‘잘’ 해야지. 



# 7

나도 아직 한참 멀었지만, 틈틈이 공부하고 수다스러운 외국인 친구들 덕분에 그래도 몇 년 전 이맘때보다는 확실히 많이 편해지긴 했다.  영어를 편하게 쓰려면 한국어를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하는데, 이따금씩 한국인 친구들과 한인타운 가서 식사를 즐겨하는 나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도 온통 영어로 말을 걸어주는 친절한 한국인들 때문에, 정작 한국어를 배우기 어렵겠다는 측은한 생각도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학생활 2년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