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과 지하철의 연인
최근 마지막으로 끝낸 연주가 드보르작의 피아노 5중주 2번이다.
예전부터 꼭 연주해보고 싶던 곡이었다. 처음에는 1악장의 매력에 온전히 복종했었지만, 곡을 알아가면 갈수록 전 악장 곳곳에 흩어져 있는 놀라운 순간들에 정신을 차릴 새 없이 연습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한동안 거기만 가면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울컥하던 두 마디가 있다.
4악장 중간도 못가서, 악장의 중심이나 주제가 아니고, 선율이 부각되는 부분도 아니고, 몇 번을 보아도 그저 지나가는 여정 속에 있는 마디, 그중에서도 스치는 종지를 향한 두 마디이다.
장편 소설 한 권같은 긴 호흡의 곡을 연주하며, 그 두 마디가 마치 나의 약점 같아졌다.
연주를 끝내고 몇 주가 지났다.
그 희미한 존재감의 두 마디가 왜 그리 아름다웠을까를 알아내 보려는 노력은 이제 하지 않는다.
그저 이유를 몰라도 그것이 나에게 그렇게까지 아름다웠다는 것만 받아들인다.
중요하지도 않고, 부각될 일도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거기 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어떤 것이,
어떤 이에게는 약점이 될 만큼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게 있다.
음악에서 삶을 볼 때가 있고, 삶에서 음악을 볼 때가 있다.
거창하지 않다.
삶을 조금 살아보고, 음악을 조금 사랑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보이는 일이다.
몇 년 전, 소나기를 맞고 지하철 역으로 뛰어들어가 에스칼레이터를 탔던 날이 기억난다.
내 앞에 있던 어린 연인. 그들도 갑작스러운 비를 맞았는지 행색이 꾀죄죄했다.
바로 뒤에 서있던 나에게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남친 오빠님이 말했다. "나 앞머리 잘랐다."
-여친님이 받았다. "와~ 오빠, 그림 같다."
그림 같은 앞머리라...
뒤에서 봐도 크게 망한 오빠의 앞머리를 그림 같다 칭찬하는 여친님과, 마스크로 다 가렸어도 그윽한 눈빛은 가리지 않은 오빠님의 행복한 장면.
그들의 서사와 아무 관계없고, 더구나 비를 쫄딱 맞아 기분이 좋지 않던 여성 시민 한 명의 마음이, 그 장면에 그대로 평온해진 적이 있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장면장면은 참 귀하기도 하다.
하는 생각을 했었다.
40분을 넘어가는 대장정의 곡에서, 지나가는 두 마디가 어떤 연주자에게 그렇게 특별했던 것처럼.
40분보다 훨씬 더 긴 대장정의 삶에서, 누군가의 지나가는 순간들이 그 삶의 주인에게 건, 그 삶의 손님에게 건, 그렇게 또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한다.
내가 지금 지나고 있는 시간도 혹시 그런 것이려나 하는 기대를 한다.
매일이 벅찰 수 없다 해도,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만한 어떤 아름다움이 지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어느 날은 내가, 또 어느 날은 내 삶의 손님들이,
이유도 모를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누릴 수 있길 바라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