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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ry J Feb 06. 2024

어디서 죽게 될까?

우리 부부가 죽을 곳은 대략 세 나라로 좁혀진다.

한국사람인 나,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사회의 일원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일본사람인 남편.

그래서 한국, 일본, 미국. 이렇게 세 나라가 우리의 사망 희망 후보국가이다.

누군가는 스위스 안락사를 얘기하더라만, 아직 그걸 웃어넘길 정도의 여유와 유머는 남아있다.

작년에 내가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올 때만 해도, 이제 나는 여기서 죽을 줄 알았다. 아니,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막연하게 이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 줄 알았다.


아버님이 오신 이후, 노년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아버님은 운이 좋으신 분이다. 첫째와는 살지 않겠다는 본인의 의지, 모시지 않겠다는 첫째 며느리의 의지, 둘째와 살고 싶은 아버님을 돌보겠다는 둘째 아들의 의지,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둘째 며느리의 동의가 맞물려 더할 수 없이 안전한 노년을 보내고 계신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아무 걱정이 없는, 바람직한 노년의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삶이다.


아버님은 비행기도 없던 시절, 일본인으로서 배를 타고 미국에 건너오셨다. 미국의 주립 대학에서 흑인문학을 50년 넘게 강의하시며 수많은 책을 쓰셨다. 영문학과에서 연구실적이 가장 높은 교수로서, 받으셨던 상도 즐비하다. 내가 막 결혼 했을 때는 나보다도 훨씬 빨리 걷고 뛰셨고,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주말마다 테니스를 치셨다. 그 천진한 유머감각은 누가 따라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남편의 유머를 보잘것없게 만들곤 했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아버님을 처음 본다면 이 분이 그런 삶을 사셨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무기력하시다. 하루 몇 마디를 안 하시고, 본인에 관한 거의 모든 일이 아들과 며느리의 손에서 해결된다. 식사와 야구 게임 시청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 그런 아버님에게 말을 시켜보려는 노력은 이미 한계치에 달해 포기한 지 꽤 되었다. 어떤 작은 활동이라도 권하고 싶은데 본인도 아들도 원치 않으니 나도 더는 애쓰지 않는다.

노인 전문 의사를 만났을 때 의사가 그랬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변하고, 활발하던 한 인격체가 말없고 의욕 없는 노인이 되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아버님은 아무 문제 없이 평온한 상태이다. 그래서 본인만 괜찮으면, 그걸 보면서 주변 사람이 걱정하거나 다시 예전의 그분으로 돌아가도록 애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여기서의 이치가 의학적인 이치인지, 의사 개인의 철학인지 그것까지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그런가 보다.


변해버린 그분에 대한 측은지심이 있다 해도, 누군가의 무기력함을 매일같이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나의 노년과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뛰어난 영문학자였던 아버님이 글로 쓰인 어떤 활자에도 관심이 없는 것을 보며, 나는 내 전문분야 이외에도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취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물질적인 걱정 포함 아무 걱정 없는 아버님처럼, 노년에 적어도 재정적인 어려움은 없게끔, 지금부터 대비책을 세울 때가 됐다는 생각도 물론 한다.

나에게 만약 아이가 있다면 나의 노년 끝자락쯤에 지척에서 나를 도와주길 원하겠지만, 그에게 내 몸을 완전히 의탁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다.

또, 아이가 없는 내가 혹시 홀로 죽게 되면 나의 죽음을 누가 어디에 알려주어야 하나 같은 무서운 생각도 한다. 친구들에게 그런 부탁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들도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늙어서 남 뒤치다꺼리를 할 기력이 이미 없을 수 있다. 남편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남편보다 먼저 죽는 것 외에는 별 신통한 방법이 없어 보인다. 요보, 잘할 수 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대체 어디서 죽어야 가장 존엄하게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노년의 선택지는 세 곳이다. 내 죽을 자리로서 각 나라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다.

내 몸이 제일 편할 나라 한국, 그러나 그곳의 미세먼지, 더위, 삭막함이 싫다.

남편 몸이 가장 편할 나라 미국, 그러나 느리고 불편한 미국을 우리 둘 다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음식이 입에 맞는 나라 일본, 노년에 먹는 게 다는 아니겠지만, 노년에 미국음식을 먹고 있다면 더 불행할 것 같다.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 그러나 나에게 닥칠 죽음에 대해 일부러 생각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즐겁지 않다. 미리 생각해 두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역시 그렇다.

누구나 태어나 자라고, 배우고, 겪고, 타인과 섞이면서 자신만의 본체를 만든다.

앞으로 남은 생이 훨씬 더 적어지는 시점이 올 때, 내 본체 중 쓸만한 것들이 나를 죽는 시점까지 지탱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노년을 보며 다른 사람들이 내 좋았던 젊은 날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본체의 활력을 거의 잃으신 아버님이 측은하다.  

마주하는 나의 고단함과는 별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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