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문화의 부속으로 전락한 인간의 위치 탐구
학교 철학 강의에서 문화의 억압을 주제로 한 비평문 과제가 있었다. 대상 도서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었다.
사회란 하나의 유기체다. 자유란 허상이다.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부자유하다. 계약이라는 명목하에 우리는 사회에 묶여있지만, 그 계약은 불공정 계약이다. 사회의 부속으로 묶인 우리는 어쩌면 억압이라는 단어조차 무색할 정도로 의미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작가 이문열의 대표작이다. 비평문 작성을 위하여 짧게 내용의 요약을 해보겠다. 국민학교 5학년 한병태라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아버지의 좌천으로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가게 된 병태는 초라한 학급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엄석대라는 학우를 만난다. 석대는 자신의 싸움 실력을 위시하여 학급의 군주로 군림한다. 그는 교실 아이들의 금품 갈취부터 시작하여 심부름, 폭력 조장, 심지어는 대리시험까지 치른다. 병태는 석대에게 저항하려 하지만 눈앞의 주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석대는 대리시험에 기반한 공부 실력과 학급 아이들을 아우르는 통솔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교사들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해가 흘러 학년이 올라가자 그들은 새로운 담임교사를 만나게 된다. 새로운 담임교사는 반장 선거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석대를 몰락시킨다. 힘이란 더 강한 힘 앞에서 무력한 법이다. 그렇게 학급의 아이들에게 석대의 악행을 고발하라고 하자 그동안 그의 밑에서 빌빌기던 아이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석대를 비난 및 폭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석대는 학교에서 뛰쳐나간다. 이후 반 아이들에게 보복하는 행보를 보이나 이마저도 얼마 못 가고, 결말에서는 어른이 된 병태의 눈앞에서 경찰에게 체포당하는 추태를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가지고 비평을 해보고자 한다.
문화라는 단어는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사회에는 권력이라는 단어가 내포되어 있다. 권력의 함의는 통제다. 예컨대 사람들이 모이면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가질 수 없다. 가령 작중에서 병태는 이 부조리한 사회에 대하여 반항을 시도한다. 이 행위는 공동체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며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결국 처절한 응징으로 하여금 병태의 반항은 실패한다. 석대가 병태에게 가하는 응징은 원시적 의미의 형벌이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순수한 인간은 아마 아이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단, ‘순수’라는 의미가 마냥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문학작품에서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그려진 작품으로는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가 있지만 부정적으로 그려진 작품으로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 있다. 후자의 경우가 해당 작품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내용을 이끄는 인물은 선생님을 제외하면 모두 아이들이다. 아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순수한 인간들의 공동체, 즉 전근대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엄석대로 표상되는 절대권력과 거기서 파생되는 형벌과 폭력. 이문열은 어린이들에서 악한 인간 본성을 도출한다.
나는 계속 자유의 허구성과 의미의 허무성을 주장한다. 그러면 혹자는 주장할 수도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인 엄석대는 자유로운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권력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장대한 인류의 역사에서 권력을 포기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계속 봐왔다. 아마 다들 한 번씩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왜 그들은 언젠간 암살 내지는 혁명이라는 결말을 맞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다시 말하자면, 권력이란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에 얽힌 이익은 권력자 아래로 뿌리내린 형태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자가 내려오는 순간 기회를 노리던 다른 이들에 의하여 피라미드의 아래층들까지 뿌리 뽑힐 것을 알기에, 하수인들마저 권력의 포기를 방관하지 않는다. 조지 워싱턴이나 이성계의 예처럼 공동체의 모습이 제대로 잡히기 이전의 상태가 아닌 이상 권력자들은 권력을 포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엄석대 역시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새로운 담임교사의 의심 이후 대리시험을 그만뒀더라면 더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권력을 유지시킬 수는 있었겠지만, 그러면 전교 1등이라는 엄석대의 권위 역시 흔들렸을 것이 자명하기에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달리는 호랑이의 등 위에 올라탄 이상 호랑이의 굴에 들어가야만 한다. (교사들의 경우 해당 공동체에 닥친 일종의 자연재해라고 볼 수 있다. 폼페이에 들이닥친 화산 폭발처럼. 아마 그분들도 다른 공동체의 부속품이었을 테다.)
그렇다면 병태의 반항은 자유로운 행위가 아닌가?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은 융화의 숙명을 안은 이방인에게 있어서 필연이다. 선택지가 순응과 반항밖에 없을 때, 나름의 프라이드를 가진 병태에게는 반항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아마 엄석대 역시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며 예상했을 사태다. 그는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했고 이 무서운 폭도를 자신을 위한 공동체에 잘 안착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가정을 할 수 있다. 만약 병태의 혁명이 성공했더라면 모두가 자유를 되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급우들은 이미 억압에 익숙해졌다. 족쇄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장신구다. 교사의 진압으로 하여금 석대의 권력이 해체되었어도 그들은 교사라는 다른 권력을 향해 복종한다. 어쩌면 병태가 석대를 파멸시켰으면 그들은 병태에게 복종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석대 다음으로 강한 학우를 군주로 군림시켰든지. 독재자들은 모두 한 때 위대한 영웅이었다. 살아남은 영웅은 독재자가 된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었다. 만약 스파르타쿠스가 로마를 무너뜨렸으면 결국 새로운 집정관이 되었을 것이다.
싸움 서열 꼴찌의 아이로부터 엄석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아이들이 전부 부자유하다면 진정 자유는 허상인가? 우리에게 의미란 없는가?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피노자의 결정론 같은 형이상학적 사유와 결은 조금 다르지만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뇌가 사유함으로써, 데카르트의 말마따나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는 듯싶다가도 결국 뇌 역시 소화기관에 의존하여 영양소를 공급받으며, 육체의 존속을 위하여 행위를 결정하는, 그저 신체의 부속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몸을 그저 연장일 뿐이라고 보았으며 플라톤은 영혼과 이데아만이 진실한 실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알 수 없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혼, 실체, 이데아, 이성, 신과 같은 것들은 미지의 것이다. 철학의 몰락과 과학의 군림이 우리의 마음속에 니힐리즘을 불어넣었듯 고도화된 사회와 높아지는 의식 수준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의미를 부정한다. 억압과 지배, 필연, 통제, 감시, 힘과 같은 단어들이 우리를 지배한다. 고대 원시사회에서부터 현대 첨단 사회에 이르기까지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우리가 우리의 부자유를 알아차렸다는 점뿐이다. 지식은 우리의 선악과다.
우리의 사회는 전근대와는 달리 많이 성장한 듯 보인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나는 9살일 적부터 나 정도면 어른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으며, 지금 역시 비슷한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회도 어느 정도 성숙한 듯싶지만 결국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엄석대는 다 자랐어도 제 버릇을 고치질 못했다. 파놉티콘은 보편화되었다.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사회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되는 SNS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를 수감시킨다. 우리는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한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한다. 사회가 유기체라면 그 유기체가 바로 리바이어던임을 왜 우리를 몰랐을까. 그리하여 계약으로 변화한 것은 투쟁에서 감시로의 변화일 뿐이다. 감시에서 혐오로의 이행은 당연한 이치다. 그리하여 우리는 ‘맘충’, ‘짱깨’, ‘MZ’, ‘영포티’ 등 수많은 혐오 발언을 일삼는다. 극단과 극단은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집단주의 사회에서의 증오와 개인주의 사회에서의 증오는 방향은 다를지언정 총량은 같다. 시민 독재의 시대다. 숱한 연예인들이 자살하고 100만 명의 우울증 환자들이 양산되는 오늘에도 이런 혐오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화된 갈등과 증오가 우리의 앞을 기다린다. 진화와 성장이 반드시 개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다 같이 가난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모두가 아파트에 사는 시대가 오니, 초등학교 시절에서부터 거주하는 아파트로 서로를 혐오한다. 1 가구 1 자가용의 시대가 오니, 자가용의 기종으로 서로를 혐오한다. 이건 성악설이 옳기 때문도 아니고 그 아이들의 심성이나 교육이 문제가 있는 때문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 그 아이들이 위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시대의 슬픈 저주다. 석대의 폭정에서 풀려난 아이들이 혐오와 욕설, 그리고 동요에 휩싸인 것은 그들이 성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끌어 줄 스승이 존재하지 않는다. 엄석대가 호랑이의 등을 탄 채로 파멸한 것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혐오의 호랑이를 탔는지도 모르겠다. 호랑이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이 질주의 끝은 어디일까.
이렇듯 내 비평문의 결론은, 우리가 부자유하다는 것이다. 호랑이의 등에 탄 엄석대, 힘에 굴종하는 지식인 한병태, 권력의 수족이 되어버린 아이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 이 아이들은 우리의 닮은 꼴이다. 우리의 자유와 위치, 가치들이 모두 허상임을 깨달음으로서 우리는 고통받고 고뇌한다. 현대인의 우울은 이 일그러진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상의 내용에 더하여 약간의 사견을 넣고자 한다. 자, 우리는 이런 비감한 결론을 맞이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하는가? 무력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복종뿐인가? 우리에게 의미란 없는가? 내 대답은 ‘아니다’이다. 우리에게 자유가 없더라도 우리는 자유를 지향해야 한다. 의미가 없다면 의미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걸음마조차 떼지 못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우리의 사회가 더 성장하고 성숙해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절대로 잃을 수 없는 가치를 우리는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한다. 병태처럼 굴복해서는 안 된다. 행여 비굴해질지언정 모든 것을 버려서는 안 된다. 지식이라는 선악과로 하여금 낙원에서 쫓겨났으면 낙원을 되찾을 생각을 해야지, 은화 몇 닢에 우리를 팔아서는 안 된다. 허상이더라도 자유를 믿고 옳음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