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연구한 분야 중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양이 너무 방대해서 따로 적어놨다. 물론 나 혼자 적으려고 정리한 걸 옮겨 적은 거라 가독성은 포기했다. 내 불친절에는 양해를, 내 무지에는 연민을 부탁드린다.
술어의 바탕이 되는 주어를 기체라고 부르며, 어떤 것이 기체의 안에 존재하려면 기체의 일부가 아니되 존재의 여부가 기체에 달려야 한다. 개별자들은 기체에 대해 말해지지 않는다. 단, 안에 있을 수는 있다. 어떤 것(X)이 그 어떤 것의 바탕이 되는 다른 어떤 것(Y)에 대해서 말해질 때 Y의 기체가 되는 Z에 대해서도 말해진다면 X에 대해서도 Z가 말해진다. 즉, X-Y, Y-Z를 말해진다면 X-Z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말해진다는 뜻이다.
유들의 차이성을 종이라 부른다. 낱말들은 홀로는 명제형태를 나타낼 수 없다. 제일실체는 기체에 속하지도 말해지지도 않는 으뜸실체이며 제이실체는 종과 종들을 포괄하는 유이다. 차이성과 실체는 기체 안에 있지 않다. 실체에는 정도의 차가 없다. 양에는 반대되는 것이 없다. 다른 것에 얽혀 자기 자신으로 말해지는 것이 관계의 범주다. 관계의 범주에서 알맞게 무언가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부차성 정도로는 안됨) 두 대상은 서로 맞바꾸길 수 없다. 단, 제일실체에는 관계성이 없다. 어떤 것을 확실히 알면 그것이 무엇에 얽혀 말해지는지 알 수 있다.
질은 상태/습성, 재능/소질, 성질 등을 의미한다. 질에는 반대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개별적인 것은 관계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나 개별적인 앎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같은 것이 질의 범주와 관계의 범주에 든다면 그것은 두 가지 유에 드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즉 여러 개의 유에 속하는 것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대립은 관계, 반대, 결여&소유, 긍정&부정의 관계가 있다. 대립되는 것들이 얽히면서 관계가 구성된다. 단, 반대는 아니다. 반대되는 것들의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결여와 갖추지 못한 것은 다르다. ‘먼눈’과 ‘눈멂’의 차이다. 아무튼 이 대립자들 중 하나가 필수일 필요는 없다. 긍정&부정을 제외하면.
‘먼저’는 시간, 있음의 잇따름, 순서, 더 나은 것의 의미이다. ‘같이’는 순서가 뒤바뀌지만 존재의 선후관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유는 항상 종보다 먼저이다. ‘변화’는 정지의 반대말로, 생성, 소멸, 팽창, 장소, 질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들 각각은 구분된다.
말이란 머릿속 생각의 상징물이며 글은 말에 대한 상징물이다. 명사는 시간의 구분이 없는 말소리이며 단순명사는 부분에 의미가 없는 명사, 복합명사는 부분에 의미가 있는 말소리이다. 동사는 시간의 구분이 있으며 다른 어떤 것과 결합해야 하는 단어다. 문장은 무언가를 나타내는 말소리이며, 한 음절은 의미가 없으나 부분 중 일부는 따로 떨어져도 존재할 수 있으며, 합의에 의해 무언가를 나타낸다. 특히, 참, 거짓이 있는 문장은 명제를 나타낸다.
긍정은 주어에 대한 술어를 인정하는 명제이다. 같은 속성에 대한 긍정과 부정은 모순 명제 쌍으로서, 대립한다. 보편자에 대한 보편적 서술은 반대명제를 생성하며, 그렇지 않으면 내용이 반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술어에서 보편자에 대한 보편긍정은 거짓이다. 보편자에 대한 보편적 모순명제는 하나는 참이고 하나는 거짓이다. 하나의 긍정문에는 하나의 명제가 있으며, 하나의 주어에 대한 하나의 술어인 명제는 단일하지만, 주어가 다수가 되면 그렇지 않다. 현재형과 과거형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참 혹은 거짓이어야 한다. 미래시제에서는 지금은 판별할 수 없으나 필연적으로 판별될 것이다. 두 가지가 중첩될 수는 없다. 무모순율의 전제는 형이상학의 제1원리이다. 모순명제 쌍은 필수이다.
전칭긍정을 (A), 전칭부정을 (E), 특칭긍정을 (I), 특칭부정을 (O)라고 칭하자, A-E는 무조건 거짓이지만 I-E는 참일 수도 있다. 긍정문에서 서술되는 것은 하나의 주어에 대한 하나의 술어여야 한다. 그저 ‘아니-사람’, 혹은 ‘건강하지 않다’와 같은 단어들은 무한명사, 무한동사다.(양적에서의 무한이 아닌, 무규정적, 무한계적이라는 의미.) 제3의 구성요소인 ‘이다’는 술어로서, 요소로서 덧붙여지면 대립하는 문장을 두 배로 만든다. 이렇게 3가지의 요소가 덧붙여짐으로써 문장에는 4가지의 경우가 생기지만 둘은 긍정-부정, 혹은 결여의 의미, 둘은 덧붙여져 부정의 의미를 가진다. 암튼 술어(이다)와 부정어(아니)는 각각이 모순되는 쌍이다. ‘모든’은 보편자가 아닌, 보편자가 보편적으로 서술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단어이다. 무한동사에서는 모든 사람은 아니-정의롭다(A)에서 모든 사람은 정의롭지 않다(E)가 따라 나오며, 마찬가지로 I에서 O도 딸려 나온다. I의 부정이 참이라면 O의 긍정이 자동으로 따라 나오지만, A의 부정이 참이라도 E가 딸려 나오지는 않는다. 무한명사와 무한동사는 부정문이 아니며, 무언가를 확장 지어서 나타낼 수 없다. 따라서 참과 거짓이 없다.
하나의 술어와 여럿의 주어이든, 여럿의 술어와 하나의 주어이든 하나의 명제가 될 순 없다. 하나의 명제가 되려면 단일한 하나의 것을 이루어야 한다. 철학적 대화술이나 모순명제 쌍 중 선택이 요구되는 경우 그 대답이 단일할 순 없다. 개별이 참이라고 그 대답까지 참일 수는 없다. 주어에 딸린 어떤 술어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개별자에 대해 모순을 함축한 것이 대립된 채 덧붙여지면 그것은 거짓이다.
만약 모든 모순이 ‘이다’ - ‘이지 않다’라면 ‘~임은 가능하다’의 부정은 ‘~이지 않음은 가능하다’이고, 그렇다면 같은 것이 ~이고 ~이지 않을 수 있게 되어 무모순율이 깨진다. 따라서 ‘임은 가능하지 않다’와 ‘임은 가능하다’가 부정 쌍으로 묶여야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야 ‘이다’의 모순은 ‘이지 않다’겠지만, 양상명제에서는 다른 것이 덧붙여져야 한다.
같은 것에 대해서 참일 수 있으면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에서 필연이 도출된다. 가능에서 필연적이지 않음이 도출된다. 개별자에는 보편자가 따르므로 ‘필연적으로 ~인 것~에 ’~임이 가능함‘이 따른다. 즉, 필연에는 가능성이 내재한다.
긍정문의 반대는 부정문인가? 아니면 다른 긍정문인가? 반대되는 생각이 반대되는 것들에 관련되는 생각으로서 규정된다는 말은 너무 모호하다. 즉, 단순한 대립이 아닌, 직접적으로 부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좋다'의 반대는 '나쁘다'가 아닌 '좋지 않다'이다. 부정이 없을 때에만 대립이 반대가 될 수 있다. 좋지 않다와 나쁘지 않다는 동시에 중첩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좋지 않다의 반대가 나쁘지 않다는 아니다. A와 E는 반대이고, A와 O는 모순적 대립이다. 참과 참이 반대일 수는 없다.
논증의 전제는 모순대립 두 쪽 중 한쪽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항은 전제의 부분으로 술어항과 주어항이 있으며 있다와 있지 않다가 내재한다. 모든 전제는 무양상(속하다), 필연양상, 가능양상 중 하나다. 여기서 주어와 술어 간의 관계를 바꾸는 명제를 도출하는 것을 환위라고 하는데, 그는 여기서 무양상에서의 환위를 소개한다. AeB├BeA. AaB├BiA, AiB├BiA로 환위가 되며, O는 환위되지 않는다. 모든 B에 A가 있다면 B도 어떤 A에 있다. 하지만 B가 어떤 A에 있다고 해서 B가 어떤 A에 없어야 함은 필연이 아니다.
필연양상과 가능양상에 대해 정리해 보자. (┐:부정, ∧연언(AND의 의미), 필연 양상: L&N, 넓은 의미의 가능 양상: M, 좁은 의미의 가능양상: Q)
1) 필연양상 LP≡┐M┐P(P는 필연적이다≡P가 아닌 것은 가능하지 않다 ≡ 반드시 P여야 한다.)
2) 필연양상 L┐P≡┐MP(P가 아닌 것은 필연이다≡P가 가능하지 않다 ≡ P여서는 안 된다)
3) 넓은 의미의 가능양상 M┐P≡┐LP(P가 아닐 수 있다≡P가 아닌 것은 필연이 아니다)
4) 넓은 의미의 가능 양상 MP≡ ┐L┐P(P일 수 있다≡P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P가 아닐 수도 있다)
5) 좁은 의미의 가능양상: QP≡MP∧M┐P≡Q┐P (P일 수 있다 ≡ P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 P가 아닐 수도 있다.)
MP≡┐N┐P / NP≡┐M┐P 이므로, LAeB├LBeA가 성립한다. ’필연양상의 전칭부정 전제 단순환위‘. 마찬가지로 LAiB├LBiA, LBiA├LBiA가 성립한다. 필연양상 전/특칭 긍정전제 단순환위. 반면 특칭부정은 환위가 될 수 없다.
’가능하다‘를 도출하는 법: 1) Lp->Mp 2)┐LP->M┐P 3) MP∧M┐P=QP.
추론의 성립에 대해서 알아보자. 술어, 대항: P, 주어, 소항: S, 매개항, 중항: M
제 1격: 대전제 M-P, 소전제 S-M, 결론 S-P의 구조. 가장 완전하고 직관적인 구조다. 다른 모든 격들은 1격으로 환원할 수 있다. (예: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제 2격: 대전제 P-M, 소전제 S-M, 결론 S-P의 구조. 중항은 술어로서만 등장하며 이 경우 결론이 항상 부정(E, O)으로만 도출된다. 중항이 양 항으로 술어로서의 역할만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둘 다 긍정이면 제대로 연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한쪽은 부정이어야 한다. (예: 어떤 비둘기도 포유류가 아니다. 모든 고래는 포유류다. 어떤 고래도 비둘기가 아니다.)
제 3격: 대전제 M-P, 소전제 M-S, 결론 S-P의 구조. 중항이 항상 주어이며 결론은 항상 특칭이다. 즉 ’적어도 하나는 그렇다‘라는 의미. 왜냐하면 두 전제가 중항에 대해서만 말해지기 때문에 결론항의 전체에 대해서는 말해지기 않기 때문이다. (예: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모든 인간은 이성적이다. 어떤 이성적인 것은 동물이다.)
이 격에 따라서 4의 세제곱인 64가지의 형식이 도출될 수 있지만 논리적 오류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는 24가지, 현대논리학에서는 15가지의 형식이 도출된다. 이 책에서는 이 24가지를 싹 다 도출해 내는 과정을 적어놓았는데 뇌에 힘 풀려서 그 도출과정은 건너뛰었다..
무양상 추론은 두 전제 모두 무양상이어야 하고, 필연양상추론에서는 한쪽만 필연이라도 상관없다. 아무튼 모든 추론에서 한쪽의 전제는 결론과 동일해야 한다.
가능양상은 필연은 아니지만 받아들여져도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추론이다. 있을 수 있다는 추론은 없을 수 있다는 추론으로 상보환위할 수 있다. ‘... 임이 가능하다’라는 추론은 1. 보통 그렇지만 필연은 아닌 것, 2. 부정칭으로, 우연적인 것의 의미가 있는데, 지식과 논증은 부정칭에 대하여 성립하지 않는다.
메타정리 1: 3개의 격의 어느 하나에 의해서 성립하는 모든 추론은 제 1격의 전칭추론에 의해서 완전한 것으로 되며, 또 이러한 추론으로 환원된다.
메타정리 2: 모든 추론은 3개의 격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 성립한다
메타정리 3: 모든 추론은 제 1격에서의 전칭추론에 의해서 완전한 것으로 되어, 이러한 추론으로 환원된다.
증명에는 두 종류, 직접증명과 간접증명(가정으로부터의 추론, 즉 귀류법)이 있다. 두 항이 결론으로 도출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명제가 전제로서 놓여야 한다. 추론은 중항을 필요로 하며, 주어진 항을 포함하는 전제로부터만 추론할 수 있다. 귀류법은 모순명제가 생겨서 불가능이 귀결될 때, 거짓을 추론하고 논쟁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불가능을 거짓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모든 추론에서는 항 중 어떤 것이 중항과 긍정으로 연계하며 전칭관계인 항이 있어야 한다. 모든 논증은 3개의 항에 의해 성립한다. 물론 항이 3개가 있다고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전칭 추론은 항상 복수의 결론을 이끌어 내지만 특칭-부정 추론은 하나의 추론만 이끌어낸다. 환위되지 않으므로. 거짓 전제에서 참을 끌어낼 수는 있지만 그 역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아니다’와 ‘이것-아님 이다’는 다른 것이다. ‘이것’의 부정은 ‘이것이 아니다’이다. ‘이것’과 ‘이것-아님이다’는 모순의 관계다. 왜냐하면 ‘이것-아님이다’는 긍정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모순과 부정이 한 사물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순환증명이란, 원래 추론의 결론&한쪽 전제를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술어 연관이라는 점에서 역 방향으로 환위함으로써 다른 쪽의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논점 선취는 논점을 미리 가정하고 추론하는 것이다.
귀납추론이란 작은 항을 통해 큰 항이 중항에 있음을 추론하는 것이다. 예증 추론이란 중항에 큰 항이 있음을 작은 항과 유사항을 통하여 증명하는 것이다. 가설설정법이란 중항에 첫 항이 있음은 분명하고, 작은 항에 중항이 있음을 확신함으로써 추론하는 것이다.
앎은 인식에서 생겨난다. 이 앎에서의 인식이란 어떤 사항에 대해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편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단적으로는 모르던 것들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항 X와 그 원인 Y를 알고 있으며 X는 다른 것일 수 없다고 인식할 때이다. 논증적 지식이란 참이고, 첫 번째이며, 무중항이고(직접적이고), 결론보다 잘 인식되고, 결론보다 앞서고, 결론들의 원인인 사항에서 출발하는 것들이다. 논증적 지식이 필연적 원리에서 출발하고, 해당 사항에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 그 사항에 필연적일 때, 논증적 추론은 그런 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논증이 있어도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즉 A가 C에 대해 필연적이라도 그 사이의 중항인 B가 필연적이지 않다면 지식을 가질 수 없으므로 논증적 추론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증은 한 유 안에서만 이뤄져야 한다. 논증 안에는 3가지가 있다. 논증되는 사항(결론에서 술어가 되는 사항), 공리(논증이 출발하는 원리), 기체로 되어있는 유. 논증은 이 유에 부대되는 사항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추론이 출발하는 전제들이 보편적이라면 논증의 결론 또한 영원함이 필연적이며,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논증은 없거나 부수적이다. 그리고 모든 논증적 지식은 세 가지 사항 - ‘있다’라고 놓이는 한에서의 사항, 공리, 어떤 속성 - 에 관련 있다.
사실의 지식과 이유의 지식은 개별의 학적인 지식 중에서 다르고, 두 가지 방식 - 무중항의 전제를 통하지 않고 생기거나, 무중항의 전제를 통해서는 있지만, 이 무중항의 전제가 아닌 주어항과 술어항의 치환을 통한 서로 다른 인식 - 을 통하여 다르다.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감각이 필수적인 다른 지식도 결여되어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은 귀납 혹은 논증이며, 어떤 사항에서는 귀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논증에는 보편적 논증과 부분적 논증, 긍정적 논증과 부정적 논증, 적극적 논증과 귀류법적 논증이 있다. 부분적 논증보다는 보편적 논증이 더 뛰어나며 부정적 논증보다는 긍정적 논증이 더 뛰어나다. 또한 긍정의 논증이 귀류법적 논증보다 뛰어나다.
어떤 학문적 지식은 다른 학문적 지식보다 정확하고 앞선다. 사실보다 이유의 지식이, 기체에 대한 지식보다(즉 질료가 필요한 지식보다) 기체가 아닌 사항에 대한 지식이, 원리가 많은 지식보다 더 적은 원리의 지식이 더 뛰어나다.
운에서 발생하는 사항에는 논증을 통한 지식이 없다. 감각에 대한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모든 추론의 원리가 동일한 원리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이 될 수 있는 사항과 지식은 생각이 될 수 있는 사항과 생각과도 다르다.
우리가 탐구하는 사항은 네 종류, 어떠한 것이 그런가, 그러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것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네 종류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중항이 있는지 없는지, 중항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중항이 곧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정의가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논증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역 역시 마찬가지이며, 동일한 사항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정의와 논증의 양자를 가질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그 자신이 무중항이며 원리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안에 있으며 술어 되는 것은 보편적이며, 논증을 통해 파악됨으로써 그것이 무엇인 것은 필연적이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도 있는가? 또 원인이 있다면 결과도 있는가? - 원인이 있을 때 결과인 사항이 있음은 필연이지만, 결과가 있다고 해서 원인이 될 수 있는 항의 사항이 모두 있는 것은 필연이 아니다. 또한 문제가 항상 보편적이라면 원인도 보편적이며, 그 역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주어항과 술어항을 치환할 수 없는 추론에 의해 이끌린 것은 단적인 지식이 아니다.
다른 사항이 동일한 결과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그 자체로 논증되었거나 징표(결과로부터의 확실한 추론)로 하여금 증명되었다면 그럴 수는 없다. 중항은 끝항의 설명이므로, 그러나 유비에 따라 동일한 중항이 있을 수 있으며, 중항 역시 치환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원리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어떻게 인식되는가, 또 그것들을 인식하게 되는 성향이 무엇인가? 우리는 원리와 관련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 성향은 우리 안에서 생겨난다. 즉 원리에서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능력은 지금까지 알아본 추론과 논증보다야 부정확하다. 아무튼 감각에서 기억이 생기고, 거기서 경험이 생긴다. 이런 경험과 보편자로부터 기술과 지식의 원리가 생긴다. 다시 말해서, 태어날 때부터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경험과 감각에서 비롯된다. 이런 능력들이 내재하는 혼, 혹은 원리를 아는 인식의 상태가 곧 누스다. 그리고 인식을 통해 최하위의 종을 우리가 파악하다 보면 귀납을 통해 원리를 인식하게 된다. 감각인 이런 식으로 보편을 우리 안에 만든다. 이것이 이성이다. 이성을 제외하면 지식보다 더 뛰어나고 확실하게 진리를 포착하는 성향은 없다. 결국 원리에 대한 성향은 바로 이성, 혹은 직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