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3-2.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by 박제원

마찬가지로 형이상학도 내가 정리한 걸 붙여 넣기만 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수십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하는 게 참 재밌다. 다만 뇌 빼고 읽다가 에이도스랑 이데아를 제대로 구분 안하고 읽어버렸다. 나야 뭐 내가 정리했으니 문맥 상 구분할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수정하기는 귀찮은 관계로..


1. 서론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형이상학은 일자와 다자에 대한 논쟁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려면 동일한 속성, 즉 보편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은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유하는 속성, ‘존재함의 본성’이었으며 이것이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생성이었다. 여기서 플라톤은 일자(一者)와 이자(二者)의 논쟁을 만들어 개체의 특성은 확정적이지만 구별되는 특성은 비확정적이라고 주장했다. 수학자의 수학과 철학자의 수학이 구별되면서 형이상학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형이상학에 대한 반론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각각의 주제가 개별학문에 배정되면 제일학문에는 주제가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반문이었고, 두 번째로 각각의 학문이 성과물을 가질 때, 성과물을 쓰는 쪽이 만드는 쪽보다 우월하므로 제일학문은 성과물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플라톤은 여기에 ‘형상’이 주제를 가지고 사물을 산출한다는 주장으로 해결했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학문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형이상학이라는 워딩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서 즉 M=P, S=M일 때 S=P (P=종 S=유 M=유의 속성)에서 M은 매개념, 중항으로서 S=P라는 명제를 만드는 요인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의 요구는 M을 추구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인 것은 변하지만 앎의 대상은 불변한다고 주장했는데, 지각되는 것은 그것의 본성과 유로 하여금 알려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을 아우르는 유는 없으며 있어도 최하위의 것이라 주장했다. (포유류의 최상위 특성은 젖을 먹이는 것이지만 최하위의 것으로는 세포가 있다? 이런 느낌으로..) 따라서 모든 존재에 대한 학문과 최상위 존재에 대한 학문은 일치할 수 없고 형이상학은 후자를 추구하므로 표준학문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형이상학이란 자신의 존재를 다루는 유일한 학문이며, 단 하나의 유는 아닐지언정 모든 존재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형이상학은 세 가지 과업을 성취해야 한다.

1) 형이상학은 학문으로서 존재한다. ->모든 존재의 원인과 공통된 본성을!

2) 존재란 무엇인가? -> ‘일차적 존재’, 즉 실체. 실체는 어떻게 실체인가?

3) 어떻게 실체가 일차적인가? -> 플라톤주의자들은 ‘하나’, 즉 최상의 이데아를 주장한다.


<형이상학>의 세 가지 중심주장으로는

1) 존재는 pros hen(하나와 관련된)이다. 그래야만 형이상학이 모든 존재를 알 수 있다.

2) 형상=현실태이다.

3) 현실태의 본성. 운동은 다른 것을 향한다는 목적을 가지는데, 현실태는 자기 자신이 목적이다. 질료가 결합되면 원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원인이 필요가 없다. 따라서 순수한 현실태는 순수한 목적이며 그것이 제일원인이다.


A권

지혜는 제1의 원리이며 최고선이자 작용인이다. 인간의 제일본성은 알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수학문은 인식이 쉬우며, 지혜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한다. 완전한 지혜는 신만이 지닐 수 있으며, 신은 제1의 원인으로서의 작용인이다. 원인으로서는 형상인(실체를 향함)과 질료인(구성물질, 기체), 작용인(운동의 시초), 목적인(선)이 있다. 구시대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원인을 질료인으로만 판단했다. 사실 이 시대 사람들과 우리가 받아들이는 ‘원인’의 개념이 느낌이 좀 다르다. 우리는 원인이 사물에 선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들은 어떤 것 내부의 지탱하는 힘 정도로 생각했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수, 감각이라는 3가지의 존재를 설정하였다. 윤리적 보편성은 이데아에서나 적용되는 것이며 가시계에는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데아와 수의 차이는 유한과 무한의 차이라고 보았으며 수는 대와 소라는 두 작용인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이분법적 방법론은 일찍이 시도된 바 있으며 애초에 형상은 만물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플라톤의 이데아설을 23개의 이유를 들어서 비판한다.

1) 사물의 원인을 사물의 개수만큼 많다고 주장하는데 쓸데없는 거 아니냐.

2) 이데아의 존재성을 밝히려고 하지만 딱히 필연적인 결론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데아가 없다고 여기는 존재에도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안 좋은 사물, 소멸한 사물에는 이데아가 없다고 주장하므로. 소멸한 사물에도 심상은 존재한다.)

3) 관계적 존재가 자체적 존재보다 우선하게 되어버린다.

4) 사물뿐만이 아닌 속성도 이데아가 있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아니라면 사물이 이데아에 부수적이 아닌 직접 관여해야만 한다. 혹은 제3의 존재가 필요하게 된다.

5) 애초에 이데아는 작용인도 아니고 실체더라도 인식에도 필요 없고 만약 실체더라도 딱히 쓸모가 없다.

6) 이데아를 조작하는 존재는 없는가? 혹은 한 이데아에 여러 사물이 존재할 수 없는가? 그 반대는? 애초에 이데아도 하나의 존재일 뿐이지 않는가?

7) 이데아는 존재와 생성의 원인이지 작용인이 아니다. 그리고 하찮고 부정적인 사물에는 이데아가 없다는데 그러면 그런 사물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8) 이데아적 수(숫자가 곧 이데아라는 주장)가 사물의 원인일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수들 역시 비율이 존재하는데 이 비율은 또 무엇인가?

9) (이어서) 어떻게 수많은 수에서 하나의 수(최상위 이데아)가 성립하는가? 단위가 같으면 의미가 없고 다르다면 어떻게 구별하는가?

10) 중간자(숫자, 수학적 존재)는 어떤 원리인가?

11) 각각의 다른 요소가 하나의 요소에서 나오는 게 말이 되니?

12) 수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인데 그 구성요소 또한 하나의 덩어리일 수 있는가?

13) 수 전체가 가은 요소가 아니라면 이름을 다르게 붙였어야 되지 않는가? 물질적 성질을 띄는데...

14) 서로 다른 유의 항목들이 서로 내재되는데(점선면, 넓이와 깊이 등) 왜 이를 기하학적 이슈라고 유기하는가?

15) 사상, 전화 등의 논점을 왜 다루지 않는가?

16) 자연의 목적을 왜 다루지 않는가?

17) 대와 소는 질료임에도 너무 수학적이고 이들의 운동인조차 알 수 없다.\

18) 보편도 유라는 주장을 하는데 모든 게 하나라는 가설을 증명할 순 없다.

19) 수가 아닌 기하학적 존재들의 설명이 부재한다.

20) ‘있다’는 단어에 내재된 여러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 실체의 구성요소를 파악할 수 없음

21)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태어나 상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처음부터 알지 못하는가??

22) 어떻게 해서 사람은 사물의 구성요소를 알 수 있는가?

23) 어떻게 사물을 감각 없이 알 수 있는가?


α권

다른 존재의 존재원인이 되는 진리, 파생적인 진리를 진리이게끔 만드는 진리가 가장 큰 진리이다. 물질의 인과의 종류는 무한하지 않다. 변화에는 한계와 끝이 있으며, 결국 사유는 멈춰야만 한다. 원인 별로 알아보자면, (세계는 무한하다고 가정) 질료인은 2가지의 경우가 가능한데, 하나는 질료가 가능태적으로 ‘그것’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질료의 소멸이다. 즉, 변화 혹은 소멸이다. 여기서 첫 번째 경우는 처음의 질료인(제1 질료)를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경우에서는 결국 모든 재료가 소멸함으로써 무한한 세계를 이룰 수는 없다. 결국 제1 질료는 필연적이다. 또한 목적인 역시, 모든 것이 다른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없을 것이므로 형이상학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궁극의 제1 목적이 필요하다. 형상인에서도, 앎이 있으려면 무한한 원인이 있으면 안 된다. 원인에서도 끝이 있어야 하며, 따라서 제1 원인이 필요하다. 이때, 제1의 것들은 굳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


β권

베타 권에서는 이율배반(모순)적인 아포리아들을 다룬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는 모순에 머물 수 없으므로 한쪽을 폐기함으로써 모순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아포리아는 총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1) 제 1~5문으로, ‘주제’를 하나의 학문이 다루는지 다수의 학문이 다루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때, 하나의 학문은 하나의 유를 다룬다.

제 1문: 단 하나의 학문을 모든 종류의 원인을 연구할 수 있는가?

여러 원인들에는 제각각의 학문이 필요하다. 전술한 4가지의 원인들은 하나의 유에 속하지 않으므로 여러 학문이 필요한 듯 보인다.

제 2문: 실체에 대한 학문이 논증(증명)의 여러 원리도 연구하는가?

학문에는 실체적인 학문과 논증적인 학문이 있다. 우선, 논증의 원리란, ‘공리’를 말한다. 속성은 공리로서 판단되므로 하나의 류에 관계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모든 실체에 논증을 부여할 수는 없다. 또한 각각의 논증에 대해서도 더 적합한 학문과 아닌 학문이 있다. 따라서 논증과 사물에 대해서는 하나의 학문으로 해결할 수 없다.

제 3문: 단 하나의 학문으로 모든 종류의 실체를 연구할 수 있는가?

만약 모든 실체가 하나의 유로서 편입이 되어 연구대상이 된다면, 그 학문은 형이상학이어야만 한다. 즉, 형이상학이 그 하나의 학문이던가, 아니면 그 어떤 학문도 연구할 수 없는 것이다.

제 4문: 실체의 학문이 그 실체의 속성도 연구하는가?

속성과는 달리 실체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존재로서 다른 실체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마치 수학적 대상을 수학이 다루는 것처럼 다른 학문이 해야 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속성을 다루는 일 같은 경우쯤 되면 더욱이 말하기 힘들어진다.

제 5문: 감각적이지 않은 실체가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 비감각적 실체는 몇 종류인가?

플라톤주의자들은 이데아에 더하여 중간자라는 존재를 주장한다. 반박하자면, 첫 번째로 이건 마치 신의 의인화와 같다. 두 번째로 그러면 모든 학문에 중간자가 존재하는지 답해야 한다. 세 번째로 이 중간자의 성질도 알 수 없다. 네 번째로 사물이 소멸할 때 중간자와 이데아도 소멸하는지 알 수 없다. 다섯 번째로 만약 중간자가 사물에 내재한다면 중간자는 불변부동하지 않게 된다. 결국 자연의 유와는 별개의 유를 구성함으로써 우주의 크기를 두배로 만들어버리는 격이 돼버리므로 모든 종류의 존재들이 하나의 유에 포함되지 않게 된다.

--> a권과 α권에서는 모든 주제를 하나의 학문으로서 다룰 수 있는 듯 보였지만 여태까지의 논증으로는 형이상학의 주제를 하나의 유로서 한정 짓는 게 어려울 듯 보인다.


2) 제 6문에서 9문으로, 지각될 수 있는 실체의 원리의 통일성, 하나의 원리에 대해서 다룬다. (원리란, 실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 오직 하나인 어떤 것.)

제 6문: 사물의 원리로 삼아야 하는 대상은 그 사물의 유인가, 또는 그 사물의 내재적 구성 요소인가?

한 실체의 원리는 복합체의 일차적 구성요소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규정의 일차적 구성요소(즉, 유) 일 수도 있다. 요소로서 복합되고 구성되는 것이 사물의 원리이다. 둘 중 무엇일지는 정하기 힘들다. (근데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를 그 원리로써 생각하는 듯하다.)

제 7문: 유가 원리라고 할 때, 그 유는 최고의 유인가, 최저의 유인가?

최상위의 유라고 하면, 가장 넓은 범위의, 범주적 유라고 볼 수 있고, 그 반대는 최하위의 개별 종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범주적 유가 원리라고 한다면, 결국 가장 포괄적인 존재인 존재, 혹은 ‘일(1)’이 원리라는 뜻이 되지만, 이들은 원리가 될 수 없다. 유가 유 자체의 종에서 떨어져 독립적으로 있다면 특수한 종차의 술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개별존재에서 단일한 유로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이 유가 됨으로써 수많은 원리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종은 불가분할함으로써 이들은 유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리나 원인은 사물에 서술할 수 있어야 하므로 개별 종은 원인이 될 수 없다. 결국 제 7문 역시 알 수 없다...^^

제 8문: 존재하는 사물은 낱낱의 사물뿐인가, 혹은 그 외의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우리가 속성을 알게 되는 조건은 그 사물들이 하나이며 같다는 전제 하에서이며, 무엇인가 보편적으로 서술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한에서다. 그러나 이 인식이 사물과 별도로 존재함으로써 따로 유가 존재한다면? - 계속 말해왔듯이. 그럴 수는 없다. 이데이가 없다고 굉장히 설명했다. 그러나 사물 이외의 아무것도 없다면? 그저 질료뿐이라면? 그렇다ᅟ견 인식도 실체도 생성도 없어질 테다. 생성의 모체가 없으므로 시작도 없어질 것이고 결과와 목적도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형상이라는 것이 존재함은 필연이다. 다만 질료와는 별도로 존재하되, 사물과는 결합되어야만 한다.

제 9문: 원리들 저마다는 종에서 하나인가, 수에서 하나인가?

수에서 하나라면, 이는 개체로서 앎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존재로서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인가? 하지만 만약 그렇더라면 이 존재 말고는 사물에 그 어떤 원리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 실체를 구성하는 단 하나의 원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통일성에 대하여 정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3) 제 10문에서 15문으로, 최상위의 원리에 대해서 다룬다. 지각되는 실체는 생성하고 소멸하므로, 영속적 원리가 필요하다.

제 10문: 소멸적 사물의 원리와 불멸적 사물의 원리는 같은가?

소멸적 사물의 원리와 불멸적 사물의 원리가 같다고 주장한 놈들은 반박에 대한 논파조차 못하는 놈들이거나 사이비임에 틀림없다. 그렇긴 한데, 소멸의 원리에 대해서는 언제나 모순점 - 소멸의 원리는 소멸적 요소로 이루어졌기에 결국 제 원리에 의하여 멸망하게 된다. 소멸할 수 있다는 말은 소멸의 본체가 있다는 말이다. 원리에 본체가 있다는 말은 모순임에 틀림없다. - 이 생기고, 불멸적 원리에 대해서는 접근이 쉽지 않은 데다가, 거기서 비롯한 사물도 분명 소멸하게 된다. 깊게 탐구하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제 11문: 존재나 1은 존재하는 여러 사물의 실체인가, 속성인가?

이것들이 실체라면, 이것들 외의 다른 존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비존재’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결국 모든 것이 하나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일이 실체라면 어떻게 나눌 수 없는 수에서 모든 수가 창출되는가? 반대로, 이것들이 실체가 아니라면 다른 모든 보편자들 역시 사라지고, 결국 개별자들만 남게 된다. 숫자들도 이데아적, 중간자적 성격이 없이 그저 감각적으로만 남게 된다. -> 결론적으로는, 존재란 존재 or Nothing이기 때문에, 결국 존재하는 것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라고 봐야 한다. 즉, 이 ‘일자’ 자체, 존재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다. 이 이외의 다른 원리는 없다.

제 12문: 수학의 여러 대상은 실체인가, 아닌가?

이 대상들이 실체라면, 운동과 관계 등은 성질로서 물체를 한정 지으므로, 이 성질들은 물체의 상위존재라고 볼 수 있다. 물체의 존재에 있어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기본성질은 ‘수’이기 때문에, 이 수는 실체여야만 물체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가 감각할 수 없으며, 그저 구획으로서만 바라봐야 한다. 사실상 존재의 여부를 깨달을 수 없으며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 존재라고 봐야 한다. 일단은 실체라고 보는 게 옳은 듯싶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실체라고 해봐야, 이 것들은 사실상 아무런 시레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수들은 생성 및 소멸의 과정, 즉 운동 과정의 설명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

제 13문: 무엇 때문에 감각적인 사물이나 수학의 대상들 외에 여러 이데아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해야 하는가?

수는 사물과는 다르지만 아무튼 많다. 중간자 역시도 비슷하다. 이데아가 없다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물에 대한 인식이 어렵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 속성이 아닌 실체로서의 이데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데아가 어떻게 다른 것들을 야기하고 운동 및 지속성을 부여하는지 알기 어렵다.

제 14문: 원리, 구성 요소의 가능한 존재는 현실적인가?

무언가가 존재하려면 우선 그 사물에의 가능태가 존재해야 한다. 가능한 존재가 반드시 현실적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즉 잠재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물에의 가능성도 열려있다. 물론 존재하기가 불가능한 사물의 가능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 15문: 원리는 보편적인가, 개별적인가?

원리가 보편적이라면, 하나의 개체가 여러 개의 술어로서 구성되어 버린다. 반면, 원리가 개별적이라면 인식은 보편적인 것이므로 원리가 인식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원리는 인식에 앞서 보편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한 학문은 하나의 유를 다루지만 존재는 하나의 유가 아니다. 모든 유가 종차(종 사이의 차별성? 개성? 암튼 그런 느낌)로 하여금 종으로 구별되지만, 존재에는 종차가 없다. 앎은 보편자에 대한 것이지만, 존재는 하나의 유가 아닌 개별자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존재가 보편자라면, 개별자는 보편자에 선행하므로 존재에 선행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에 대해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인가? 형이상학은 배재되어야 하는가?


Γ권

형이상학은 존재를 부대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존재로서 탐구해야 한다. 실체는 일차적인 것이다. 하나의 학문이 하나의 유를 다루므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에 대한 연구가 성립되려면 그 하나의 존재에 대해 모든 존재들이 'Pros hen' 관계를 맺어야 한다. 또한 있는 것은 유라기보다는 종으로서 나뉜다. 그러므로 실체가 철학에 포섭되지만, 모든 속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학문만 있을 수는 없다...


하나의 원리와의 관계에서 개별 사물이 존재하는데, 있는 것의 본성은 이 제 1의 존재와의 관계에 속한다. 결여, 부정, 반대, 관계가 그것이다. 또한 실체에 대한 연구뿐만이 아닌, 논증의 전제들이나 공리, 특히 모순율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가장 자명한 제 1전제는 모순은 없다는, ‘무모순율의 전제’이다. 오직 형이상학만이 모든 있는 것을 시야에 가짐으로써 원리들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다. 사물은 반대의 속성을 지닐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것을 설명하는데 그 의미가 한 가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사물을 설명하는 것과 속성을 설명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모순율을 어긴다면 모든 말이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가 된다. 부대성은 부대성끼리 결합할 수 없고, 실체와 결합이 되어야 한다. 이미 부대성이 결합된 이상 추가적인 부대성의 결합은 있을 수 없다. 모순되는 술어가 참이라면 모든 술어들이 참이 됨으로써 무규정이 비존재하게 된다. 모순율을 부정하는 순간 판단의 이유 자체들이 부정되며, 모든 긍정 - 부정이 양립한다. 결국 사실상 모든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다. 무모순율의 논쟁은 여태껏 있어왔는데, 프로타고라스는 모순이 감각기관의 모순일 뿐이라고 했으며 운동과 관련하여 변화하는 대상은 반대속성을 가질 수 있지 않느냐는 논쟁이 있었다. 프로타고라스 말대로 우리의 판단만이 진실이라면 모든 판단이 참이 되어버림. 감각의 이전부터 사물은 존재했다. 또한 만물은 유전한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항상 바뀌는 것으로 인해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더라도, 생성하고 소멸하는 사물의 안에는 무엇인가 있음은 자명하다. 작용인에 의해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지므로. 기준이 판단자라면 실체보다 감각이 우선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며, 또한 모순되는 사물에 중간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비존재라고 주장했으나 이 주장은 모든 것이 참이라는 주장에 불과하며, 아낙사고라스는 모든 사물이 혼합물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긍정도 부정도 피하는 것에 불과하며 참이라고 보기에 힘들다. 우선 우리는 거짓과 참에 대한 정의부터 해야 한다.


Ε권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존재의 원리/ 원인이다. 여태까지 존재와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은 없었다. 모든 학문은 실천과 제작, 이론 중 하나에 속한다. 이 중 자연학은 이론적 학문으로서, 질료와 결합됐으며 운동이 포함된다. (따라서 자연학은 영혼을 요구한다.) 자연학은 독립적이지만 부동이 아닌 물질을 연구하며 수학은 부동이지만 독립적이지 않은 물질을 연구한다. 따라서 독립적이고 부동이며 영원한 물질을 다루는 신학이 제 1학문으로서 작용한다. 존재는 부대적 존재와 참으로서의 존재, 술어로서의 존재, 가능적/현실적 존재로 나뉜다. 부대적 사물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그저 우연적이며 연구의 대상도 아닌, 그저 그렇게 있을 뿐인 사물이다. 본질도 원인도 이를 다루는 학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의 내부에는 필연적인 존재의 원인이 존재한다. 거기에 우발적인 사건이 함께 존재하는데, 즉 가능성 혹은 가능적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우발적 사건 없이는 원인을 규정지을 수 없다. 사물 내부에는 모든 가능태가 내재한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지는 순간 현실태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리나 원인은 사물과 떨어져서 존재한다. 참(결합)이란 기체와 속성을 긍정적으로 배분하는 것이며 거짓(분리)란 부정적으로 하는 것. 즉, 참과 거짓은 사유의 내부에서 속성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Z권

술어 형태의 여러 존재들 중에서 제1의적 존재는 실체이다. 제 1로 통하는 본질 그 자체. 형이상학은 실체에 대한 연구여야 한다. 우리는 속성 또는 양, 크기가 아닌 실체를 규정해야 한다. 실체의 후보들은 형태, 한계, 형상이 있고 아마 이들 중 하나일 것이다.


실체는 술어가 아니라 주어다. 질료는 속성, 즉 술어 그 자체다. 주어에 대한 술어는 당연히 직접적인 술어가 되어야 하는데, 질료에 대한 술어는 실체의 술어가 된 다음 간접적으로 질료와 연관된다. 실체가 되려면 독립성과 주체성을 갖춰야 한다.(즉, 질료는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 질료와 형상의 결합체가 기체가 되어 실체의 본질개념이 된다. 본질은 술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설명방식으로 술어, 속성을 더하지 않아도 본질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물의 술어와 결합되면 생기는 복합체는 분명한 성질이 아니다. 의미만 같다고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종속적으로 존재하는 성질에는 정의와 본질이 없다. 결합체의 경우 실체와 본질이 같다고 보기 힘들다.


이데아같은 제 1의적 존재의 경우, 실체와 본질이 다르다고 할 때, 이 둘은 다른 한 쌍의 실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 경우 실체가 본질보다 우선하게 되며, 따라서 본질 쪽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본질이 없는 실체마저 부정당한다. 따라서 실체 = 본질이다. 이데아는 본질로서 실체이므로 그 기체는 실체가 아니다. 술어가 붙은 집합체는 술어끼리의 실체가 아닌 집합체로서의 실체와 본질이 같다. 제 1의적 존재 각각의 그 자체는 그 본질과 동일하며 본질은 형상이다. 실체의 본성과 본질은 동일하다. (즉 이데아는 그 기체와는 상관없이 이데아들끼리 본성과 본질이 같다는 의미.)


사물은 어떤 것에서 생성된다. 생성을 위해서는 질료가 필연인데, 이 질료는 재료이기도, 규정방식이기도 한다. 결여된 어떤 것의 실체는, 어떤 것의 반대사물의 실체로, 이 변환의 경우, 사유(형상, 즉 질료가 없는 실체)에서부터 질료를 가진 실체로 변환된다. 본질적 실체는 결여가 아닌 질료적 기체에서 나온다. 생성물은 작용인에 의해 질료로부터 생겨난다.(복합체 이전에 질료가 존재한다) 사물의 형상을 만들 때, 형상, 본질은 질료 안에 내재한다. 사물은 질료로부터 만들어지며 형상(본질)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형상은 다른 실체 안에 존재했어야 한다.) 생성되는 것은 늘 감각적 사물, 즉 질료다.(형상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므로) 개체와 질료는 떨어져 존재하지 않으며, 개체의 특수성 / 개별성은 질료에 의해 생긴다. (형상은 제 1의 실체라 그들끼리는 종차가 없다) 질료마다 운동여부 / 운동방향등이 다 다르다. 또한 모든 사물은 질료의 부분 혹은 형상에서 생긴다. 실체의 형상처럼 제 1의 속성, 술어(양, 크기) 역시 질료에서 생성된다.


Q1. 부분의 설명방식이 전체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 질료는 형상이 있어야 개체가 되며, 질료적인 부분은 형상의 부분이 아니다. 형상은 해체되거나 멸망하지 않는다. 질료적 부분은 설명방식에 포함되지 않는다.(반으로 잘린 인간을 피와 뽀로 설명하지 않듯) 따라서 설명방식은 형상만으로 이뤄진다. 다만 복합체의 질료, 혹은 조직화되며 형상이 되는 질료의 경우는 포함되어야 할 수 있다.


Q2. 부분이 먼저인가, 전체가 먼저인가?

->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에서 질료의 부분은 전체보다 뒤이며 형상의 부분은 전체보다 앞이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술어들은 결합적 전체로서, 설명방식에서는 형상의 부분만 쓰인다.


사물의 정의는 보편성과 현상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는 현상의 부분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서로 종류가 다른 사물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보편성은 실체의 어떤 부분도 아니다. 결합체에서 질료만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즉 아무 관계없이 홀로 떨어진 형상은 실체의 부분이 아니다.) 질료와 형상을 떼어놓지 않고, 즉 모든 결합체를 형상으로 설명하려 드는 것은 모든 사물에 하나의 형상, 혹은 하나의 형상에 모든 사물의 형상이 있다는 불합리한 일이 된다. 그러나 사물이 아닌 실체의 설명 방식에 질료적 부분은 포함되지 않는다. 실체 = 형상이지, 결합체 = 형상이 아니다.


실체의 형상은 유와 종차로 구성된다. 유 하위에 고유한 종차가 존재하며 저마다 하위의 종차를 가진다. 그렇게 최하위까지 내려갔을 때의 종차가 그 사물의 본질이자 실체이다. 이때 형상이 곧 실체이므로 이 말은 형상이 질료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궁극의 종차가 유의 하위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궁극의 종차는 모든 유를 다 포함하며 종의 형상이며, 유는 종의 질료이다.


보편적 술어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특수한 것이므로 보편은 모든 개체에도 개별개체에게도 실체가 될 수 없다. 또한 유는 보편자이다. 보편은 설명방식 혹은 보편적 사물 가운데 특수한 사물의 실체인데, 위에서도 말했듯 보편은 결합되지 않고 홀로 떨어진 것이므로 보편은 불가능하다. 보편은 개별개념이 아닌 유적 속성임. 그러나 물론 보편을 무시하면 실체는 모두 비복합적이게 된다.(존재함의 본성 등이 결국은 보편이기 때문.) 정의는 실체일 수만 있으나, 보편을 부정하면 실체의 정의마저 부정된다.


이데아는 이데아 그 자체의 존재이면서 다른 존재의 요소일 수 없다. 감각적 사물의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데아는 개별적이고 떨어지는 것이다. 형상에 대한 설명방식은 다른 사물에도 적용된다. 설명방식이란 사물보다 선행하며 술어가 요소에 속하며 사라지지 않는다.


설명방식은 생성과 소멸이 없으나 결합체는 있다. 결합체는 늘 질료가 있으므로 정의, 논증이 없다. 논증이란 필연적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일 수 있는 필연적이지 않는 감각적, 사라지는 사물에게는 오로지 감각범위만이 남아 정의되지도 논증되지도 않는다.


생명의 부분은 작용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적이며, 하나는 실체일 수 없다. 공통과 보편은 개체와 떨어져 있으므로 실체일 수 없다. 단, 이데아는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예시를 들 수 없으므로 논외로 침.


사물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라는 질문은 속성/술어는 왜 어떤 기체/주어에 속하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사물의 본질은 어떤 경우에는 목적인, 어떤 경우에는 작용인이다. 결국 사물은 왜 그런지에 대한 질문의 답은 ‘형상’이다. 그러나 통일성의 원인은 질료적 부분일 수 있다.


H권

형상은 질료에 질서를 부여한다. 변화가 일어나는 모든 것은 실체이며, 기체가 이것들의 가능태다. 질료의 현실적 존재로서의 실체란? 즉 차별상(구분하게 만드는 것)이란? - 아주 많다. 어떤 사물은 질료로서, 어떤 사물은 실현태로서, 어떤 사물은 제 3자로서 정의된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은 곧 형상(현실태)이다. 한 실체의 본질적 본성은 다른 어떤 실체가 갖지 않는 기능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규정은 실체를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본질과 사물은 떨어질 수 없는 것. 그리고 이것은 수가 아니다.


어떤 것은 함께 기능할 수 있는 질료적 구성요소를 가진다. 기능함의 원천은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물에서 생성되더라도 각자 고유의 질료가 있다. 이때, 생성관계로 인하여 수많은 질료가 존재하게 되는데, 이는 ‘생성’에 순서 혹은 선후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로부터 가장 먼 ‘제 1의 질료’와 가장 가까운 직접 질료) 그리고, 혹은, 같은 질료여도 원인이 다를 수 있다. 형상으로서의 원인은 곧 설명방식이다. 따라서 설명방식에는 원인이 포함되어야 한다. 제 1질료로 하여금 현실태와 가능태가 하나일 수 있다. (형상과 제 1질료는 비슷) 질료는 생성 및 전화하는 사물이며, 서로 상반되는 질료는 서로에게서 생겨나지 않는다. (상반되는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질료(가능태)와 형상(현실태)이며, 영혼은 질료의 현실태 혹은 제이현실태이다. 가능태가 현실태가 되는 원인은 생겨나는 사물의 능동자, 즉 ‘있다’이며, 이것이 사물의 본질이다. 최고의 개념은 모든 개념은 저마다가 어떤 ‘하나’라는 것.


Θ권

디나미스(가능태)는 작용인이며 수동적 변화를 의미한다. 참은 결합 자체이며 거짓은 분리 자체이다. 사고나 진술에서의 참이 사물의 결합과 분리에 의존하면 그것은 참의 원인이며 그것들이 야기하는 것을 사물이 가진다. 복합되지 않은 것은 현실태와 가능태를 갖지 못한다. 실체는 제일본성이며 모든 있는 것은 제일실체와 관련됨을 통해 존재한다. 있는 것은 형상/물질/현실태. 본질은 형상 혹은 현실태. 질료의 형상은 질료가 단일한 존재로 있게끔 한다. 독립적이고 실체여야지 원리가 일차적이다. 디나미스는 가능적 물질만을 내재하며 불가능적 물질을 제외한다. 그러므로 디나미스는 에네르게이아(현실태)와 함께 존재한다.(현실태가 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to be와 not to be가 공존한다는 의미이다. 에네르게이아는 그냥 지금의 상태를 의미하며, 엔텔레케이아는 완전히 완결된 상태를 말한다. 에네르게이아는 현실에서 존속한다. 가능적 존재와 현실적 존재는 유비관계를 이룬다. 추상적 존재는 그렇지 않고 따로 떨어져 존재한다. 운동은 목적을 향하지만 목적을 포함하지 않는다. 현실태는 운동. 즉 가능태의 현실화. 운동하는 것은 외부의 목적, 현실태는 내부의 목적. 현실태는 운동. 즉 가능태의 현실화이며 운동하는 사물은 항상 어떤 것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운동하는 것은 외부의 목적, 현실태는 내부의 목적. ing와 ed의 차이. 그러나 현실태는 목적을 포함한다. 작용인과 질료인을 내부에 지니고 있으면 가능상태이다. 최후, 최근의 주어나 기체가 실체(제 1질료)다.


에네르게이아(현실태)가 디나미스(가능태) 보다 우선하는 이유

1. 설명방식: 제 1의 질료가 활동할 수 있었으므로 에네르게이아에 대한 설명방식이 질료의 가능성 안에 내재

2. 시간: 현실적 사물은 종류에 있어서 먼저이며, 단, 수적으로는, 볼 수 있는 가능적인 물질이 시간적으로 먼저이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먼저 현실태가 있기에 가능태가 존재한다.

3. 실체: 나중에 생성된 사물은 그 사물보다 사물의 형상이나 실체가 더 먼저 존재한다.

4. 현실태는 가능태보다 뛰어나다. 가능태는 존재 가능할 수도 불가능할 수도 사라질 수도 있으며, 사라질 수 없는 존재(제1 실체?)는 가능태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데아가 있다면 이데아보다 사물이 더 많은 현실태이고 오히려 이데아는 가능태에 불과하다.


Ι권

하나와 존재는 보편적이므로 실재일 수 없다. 하나는 술어 느낌인데, 술어적 존재에 대응하지만 술어적 존재 안에 포함되진 않는다. 종에서 서로 다른 사물은 차별성(종차)을 포함하는 같은 유에 속한다. 이 차별성으로 인하여 유의 이타성이 생긴다. 차별성이란 곧 반대성이다. 같은 유에 속하는 사물은 서로 반대성을 지니며 다른 유에 속하는 사물들은 서로 같거나 다를 수 없다. 반대성은 완전한 차이이며 한 사물에는 하나보다 많은 반대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구성요소에서 설명방식은 차별성을 야기하지만 질료는 차별성을 야기하지 않는다.(차별성은 형상의 몫) 하나는 실체 혹은 기체지만 제일실체는 보편이 아니므로 실체가 아니며 기체는 많으므로 그 많은 기체가 하나일 순 없다. 하나는 가능적으로만 하나. 사물의 본성은 통일성보다 선차적이다. 실체가 규정에서 불가분함은 그 본성의 측면이다. 본성은 규정에 앞서므로 불가분함이 존재에 앞서며 따라서 존재는 하나임에 앞선다. 소멸적 사물과 불멸적 사물은 서로 반대이며 유에 있어서 다르다. 소멸성은 실체에서 본질적인 속성이며 제 1의 원인 때문에 소멸성과 불멸성은 대립한다. 따라서 감각적인 것과 이데아는 아예 전혀 다른 종이다. 소멸자들을 불멸하는 패러다임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멸하려면 소멸 가능한 능력을 가져야 하며 소멸은 본질적 속성이다. 형상이 개별자 안에서 실현되려면 외적원인이 필요한데, 그 원인은 분리되어 존재해야 함. 그 원인은 최상위의 영원실체.


Κ권

어떻게 형이상학이 있는지, 그리고 그 원리가 어떻게 하나인지는 이미 해결했다. 모든 학문은 형이상학의 종이다. 운동의 원리는 형상/질료/형상의 결여이다. 가장 정당한 의미의 실체는 움직임이 없는 존재자의 자족적 원리이다. - 형상과 질료가 하나라면 운동하지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이 둘은 구별됨. - 제일원리의 본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운동을 야기하는가?


Λ권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원리들 - 일단 실체는 선차적이고 실체에서 만물이 pros hen. 그 뒤로 질과 양이 따라온다. 질료가 전화하려면 상반되는 두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이때, 사물의 전화는 모두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바뀌는 것이다. 혹은 질료가 작용인에 의해 형상으로 변화하는 것.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존재물로부터 생성된다.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로 변하지 않지만 모든 개별실체는 그 종을 정의하는 종차를 획득할 때 변화한다. 모든 사물들은 가능적으로는 함께였다. 사물마다 질료가 다르므로, 특정 사물에서 특정 사물이 생성된다. 실체에 대한 원리는 형상, 그와 대립하는 결여태, 그리고 질료다. 어떤 사물에든 형상/결여태와 질료가 있다. 질료와 형상은 생성물이 아니지만 최초의 질료와 형상은 생성물이다. 작용인은 생성결과보다 먼저 존재하며. 형상인은 결과와 나란히 존재한다. 따라서 이데아는 사물보다 먼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있는 것에 대한 원인, 원리는 동일한가? - 보편적 유비적으로는 동일하다. 바로 ‘하나임’이다. 그러나 이게 제일원리는 아니다. 선차적일 수 없기 때문.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보편자가 아닌 개별자이다. 형상은 현실태로서 존재하며 질료에 영향을 줌, 보편자는 인과능력이 없다. 서로 다른 것들의 원인은 다르다. 구성요소는 형상, 결여태, 질료고 원인은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형상인이다. 하지만 사물마다 내재적 구성요소가 다르고 다른 사물에 대해서 시동자로서의 제 1원인이 다르다. 작용인이 가능성보다 우선하며, 생성과 소멸은 작용인이 우선한다. 모든 사물들은 제1의 사물로서 움직이는 작용인이 있다.


이성의 실체는 사유의 가능태(무엇을 사유하는지에 따라 사물이 사유에 귀속됨)이며, 이성의 실체가 사유하는 대상은 부동의 원동자. 사유는 인식의 대상 그 자체이며 이성의 사유는 질료가 없는 현실태이기 때문에 복합체의 부분이 아니다.


운동은 가능태의 현실화이므로, 영원히 운동하는 천체는 원인이 필요하다. 이 영원한 운동은 가능태가 없는 순수한 현실이다. 이른바 ‘부동의 원동자.’ 정신은 가능태이고, 무언가를 파악하려면 그것의 형상이 되어야 하므로 부동의 원동자를 파악할 순 없다. 질료 없이 존재하는 현실태는 사유이므로, 부동의 원동자는 지성이다. 이것은 선, 이성, 관조의 대상이며 신이다. 선은 시동자의 원인이다. 부동의 원동자에는 반대사물이 없다.


Μ권

수학의 원리는 실체가 아니고, 모든 지각되는 것은 변하지만 도덕은 불변한다. 자신의 형상은 보편자가 아니라 규정에 있어서 하나인 것이기에 앎의 대상이다. 수학적 대상에 감각적 사물이 내재할 순 없다. 독립적 실체도 아니다. 그저 설명방식으로서만 먼저일 뿐. 이제는 이데아가 사물보다 많아졌기 때문에 항상 바뀌는 사물을 위한 불멸의 존재의 의미가 퇴색됐다. 게다가 학문적 인식의 대상이면 무조건 이데아가 존재해야 하며, 부정적, 소멸된 존재에도 이데아 가 있게 되며 사물들 간의 관계에서 이데아의 위치가 조정되는 일까지도 생겼다. 이데아가 필요한다? 애초에 이데아는 운동과 전화의 원인도, 사물의 인식에도, 사물에 내재하지도, 사물의 출발점도 아니다. 사물의 작용인도 아니다.


에이도스는 수학적 수가 아니며 수는 원리가 아니다. 수는 나눌 수도 없으며 존재적 사물도 아니다. 모든 수에 이데아가 존재할 수 없으며 단위들은 가능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단위가 수들보다 우선한다. 수는 이데아도, 사물의 구성요소나 원인도 아니다.


앎이란 지성적 접촉(형상의 활동)과 증명적 지식(보편적이고 가능적이며 실재에 의존)으로 이뤄진다. 보편자가 실체보다 선차적이고, 형상은 보편자이자 개별자이며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각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제일원리가 될 수 없다.


N권

보편자들은 형상에 귀속, 수학적인 것들은 실체에 귀속되지만 아무튼 이것들은 제일원리가 아니다. 존재를 가르는 것은 종과 종의 결여의 비율이다. 간혹 모든 원리가 반대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사람들이 있으나 구성요소는 사물의 술어일 수 없으며 실체는 반대되는 것이 없다. 수처럼 영원한 존재는 생성이나 부분이 아니기에 목적 혹은 형상인이 아니며 애초에 원인이 될 수 없다. 실체의 진정한 질료는 요소다. 실체가 수보다 선차적이며 수의 원인이다. 우리가 제일원인에 대해 아는 것은 순수한 현실태라는 것뿐이다. 가능태로서의 존재도 비존재이므로, 존재의 생성은 비존재에서 나온다. 선은 설명이 불가능하며 이것은 제 1의 실체가 설명이 안됨을 의미한다. 존재들이 구성요소에서 나오며 존재 중 제 1의 것이 수라고 말하는 이들은 논리부터 틀렸다. 수학적 대상은 감각적 사물에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