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은 그냥 개론서만 읽고 끝냈다. 이쪽은 너무 깊게 파고들면 읽을 것도 많고 내용도 너무 어려워지는데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일찍 끝내버렸다.
1. 플로티노스
사실 시기 상 스콜라 철학은 아니기는 한데, 아무래도 스콜라 철학의 주춧돌과 같은 역할이라 그냥 스콜라 철학에 적었다. 그는 플라톤의 이원론에 매혹되어, 새로운 플라톤주의, 이른바 신플라톤주의를 주창하였다. 진정한 참된 실재는 오로지 모든 것에 선행하는 신 뿐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원인은 완전자에 이를 수 없다. 즉 부동의 원동자는 신이 아니다. 또한 일자 내부에서의 연쇄적인 인과 고리도 부정한다. 다만 일자의 풍성한 생명력이 아래로 흘러넘치는 것이다. 일자에서 생명력이 유출되어 정신과 사물을 이룬다. 일자에 가까울수록 관념적이고 멀어질수록 물질적이다. 하향운동에 대항하여 위로 향하고자 하는 인간 영혼의 활동이 곧 인간의 본성이자 도덕이며, 이를 기독교적 구원론과 연관짓는다. 모든 과정에서 새로운 산물을 산출하는 생성운동을 에로스와 연관지으며, 에로스는 차츰 정신적인 것을 사랑하는 필리아, 그리고 나아가 일자와의 합일, 즉 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상향운동을 지향하는 영혼의 의지로 자아와 일자는 합일된다고 보았다. 악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적극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른바 ‘부재’상태.
2.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신플라톤주의에서 구원론을 발견하였다. 다만 신을 일자로 보지도 않았으며 물질과 육체성을 악의 근원이라고 본 플로티노스와도 견해를 달리 했다. 신의 존재에 적용될 수 있는 범주는 오로지 실체 뿐이라고 보았다. 신은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이며 '전제'되어있다. 즉, 감각 너머에 실재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는 언어로는 신을 알 수 없다고 보았으나, 그럼에도 회의주의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또한 ‘알고있음’에 대한 믿음을 주장했다. 아무리 타락한 영혼이라도 그 안에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언어로는 알 수 없는 것이라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정신이란 영혼의 기능의 일부일 뿐이다.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 것이라 주장했으며 내면에서 신의 인식이 출발한다고 보았다. 감각적 지식은 인식의 최하위 활동이다. 존재는 형태의 한계와 위치에서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초월자인 신은 양적 차이로 극복할 수 없는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한계와 형태와 위치가 없다. 이런 신이 부여한 질서는 수직적이다. 신은 물질에 배아의 원리(인과율)을 삽임함으로써 가능태를 실현하고자 했다. 인간은 육체적, 지적, 영적 피조물이다. 인간의 육체는 시공간에 따라 변하지만 영혼은 오직 시간에만 영향을 받는다. 영혼의 탁월함은 자유와 자기 동일성, 그리고 초월성이라는 세가지 특질 때문이다. 신은 자유와 진리, 미, 선의 근원이다. 순수하고, 자존하며, 불변하고, 영원하며, 최고이고, 존재 그 자체이며 세계의 반영이다.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선과 악의 주체는 인간이다. 신이 인간의 주체를 침범하면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기에 신과 닮지 않게 되어버린다. 또한 악은 명사가 아닌 동사로 존재한다. 즉 자유의지의 잘못된 사용에 의해 악은 발생한다. 정의는 신과 인간의 관계기에 국가에 선행한다. 따라서 국가는 정의를 따라야 하며, 그저 악을 통제하기 위한 신의 대리자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연극일 뿐이며 그 각색자는 신이다. 따라서 역사는 신의 은총을 반영한 것이다. 시간과 창조는 동시에 일어났다. 신에게서 실체와 의지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세개의 위격은 각각이 다른 실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관계를 나타낼 뿐으로서, '아버지'는 신성의 근원, '아들'은 태어난 자 - 이 관계는 피조물들의 관계로 유비될 수 없는 것이며 신적인 단일성 안에서의 관계다. - , 성령은 나오는 자이다.
그는 원죄론을 옹호하였으며 진리를 위하여 계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사랑을 통해 완전함을 추구한다고 보았으며, 또한 그렇기에 대체할 수 없는 궁극적 사랑의 대상으로서 신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영혼의 불완전함과 자유의지로 인해 악이 발생하며, 악은 자유의지에, 선은 신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질서란 섭리의 최상의 현현인데, 인류에게 훈계와 교훈을 위하여 섭리적 목적으로 기적이 발현된다고 보았다. 감정을 억누르고자 했던 스토아의 전통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것이 인간 본성의 선한 구성요소라고 주장했다.
3. 위-디오니시우스
신플라톤주의에서의 유출과 회귀를 하나의 운동으로 보자면 우리는 그 운동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점은 같은 것으로서, 모네, 즉 원류라고 볼 수 있다. 원류, 유출, 회귀의 순환운동인 셈이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는 이 유출과 회귀의 변증법을 신적 계시가 인간의 수준으로 하강함과 동시에 인간이 계시를 이해함으로서 초월에 도달하게 되는 관상적 상승의 경로로 설명한다. 그는 이 신적 계시에 대하여, 원류를 단순성과 동일시, 유출을 다채로움과 동일시하고, 회귀를 다자에서 일자로 모으는 행위와 동일시한다. 최초에서 최종까지 하강하는 과정을 하향적 긍정의 길, 혹은 아나고기아라고 부르고 최하에서 신을 향해 오르는 경로는 상향적 부정의 길, 혹은 아포파시스라고 부른다. 우리가 신성에까지 와닿으려면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아나고기아를 위한 상징적 방식이다. 우리는 신성을 표현할 수 없다. 즉 선, 존재, 사랑 이따위의 단어들로는 신성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속성들은 신에게로 귀속되며, 신인동성동형론적 개념을 제거하였다. ‘신은 어떠하지 않다.’
4.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것보다 가지계와 가시계의 장벽이 낮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다. 이성과 신앙은 일치하며 존재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창조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근원에 신이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있다. 자연의 존재와 구분되는 비존재가 5가지 있다. 첫번째는 신이나 본질처럼 인간의 인식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둘째로 창조된 것임에도 부정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 또한 셋째로 감각적 영역에서도 이미 주어져 있으나 가시계로 오지 않은 비존재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아담을 만들기 전의 인간본성이 있다. 넷째는 물질적이고 변화하는 것이며 다섯 째로 선한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 있다. 또한 자연에도 네 가지의 종류가 있어, 첫 번째로 창조하지만 창조되지는 않는 자연, 즉 신이 있고, 둘째로 창조되면서도 창조하는 자연, 즉 세계에 현현한 신이 있고, 셋째로 창조되지만 창조하지는 않는 자연, 즉 지금의 우리의 세계가 있고 네 번째로 창조하지도 창조되지도 않는 자연이 있는데, 이 상태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며 인과의 일치이자 신을 인식하는 단계라고 한다.
5. 아비센나
그의 철학적 의의는 1. 창조의 필연성과 영원성, 2. 존재의 등급과 유출, 3. 매개적 지성론, 4. 가능하고 가변적인 존재와 필연적 존재 사이의 구별이 있다. 그는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창조와 유출은 필연이라고 믿었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적으로 존재하지만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신이 제1원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이성은 신과의 유사성이 있기에 나 자신을 앎으로서 신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운동인은 영혼에서 비롯되며, 영혼은 영원하다고 보았다. 그는 정신, 영혼을 육체와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6. 안셀무스
아우구스티누스가 믿기 위해서 안다고 했다면, 그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했다. 즉 믿음의 목적 추구의 대상이 곧 앎인 것이다. 그는 이성을 보편성의 토대로 보았고, 지성이란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으로 보았다. 이성적으로 자명하면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고 보았다. 선에는 최상위의 선이 존재하며, 모든 사물 중에는 최초 최고 존재의 원인이 존재한다. 또한 사물에는 우열관계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가장 위대한 것이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신이다. 이로서 그는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하였다. 그 유명한 신 존재 논증이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존재가 있지 않느냐는 반박에는, 실재가 상상보다 위대하다는 주장으로 재반박하였다. 이성이 신의 형상이라면 인간 정신에 신이 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초월을 거부한 것이다. 이성은 스스로를 인식하고 타자화함으로서 스스로에게 귀환하고 신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기억과 인식을 개념적으로 통일하는 일치점이 바로 사랑이다.
이 안셀무스의 최상위의 관념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칸트 이전까지 풀리지 않았다. 합리주의 철학자들 역시 이 사유에 매료되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역시 여기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7. 아베로에스
그는 철학과 신앙은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성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지성과 이데아의 일치점이 인간의 완전한 자기 인식 지점이며, 형상계에서는 지성과 형상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지성은 감각과 달리 인간영혼의 일부분이 아닌, 개별적으로 분리된 지성체이며, 모든 인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영혼은 물질이며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동지성과 능동지성을 구분했는데, 아베로에스는 능동지성이 표상에서 형상을 뽑아냄으로서 개별적 인간과 보편적 지성이 접목된다고 보았다. 본질과 존재에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8.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했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심취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처럼, 실체와 우유의 관계로 자체적인 논리학을 구축했다. 우유는 술어로서, 주어 내부에 존재하며 변화한다. 그리고 신이 창조한 것은 실체다. 그는 신을 존재 자체라고 보았는데, 세계의 창조 원인이자 실존 보존 원인이기 때문이다. 운동, 작용인, 필연적 존재 등의 논증과 완전성, 우주의 질서 등을 통하여 신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신은 운동의 제 1원인이며 제 1 작용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이 신에게 내재한다. 신은 자립하는 자이며 그의 존재 행위는 본질에 앞서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신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분유론을 주장하였고, 따라서 세계 전체를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았다. 존재자들의 존재의 지속은 신의 보편적 존재에 참여한다는 의미이고, 경험적 세계와 신의 존재 사이에 실제적 관계성을 사유했다. 인간 안에는 단일한 실체적 형상, 즉 영혼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본질과 실존은 신 안에서는 동일시되지만 피조물에서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실존은 시간적으로 그 이후의 실존으로 담보되지 않지만, 본질은 존재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본질은 존재다. 신에게는 어떤 술어도 허용될 수 없다.
신의 갈망은 인간 존재 전체의 갈망이다. 따라서 존재는 선 그 자체이며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자유가 있지만 다만 지복의 경우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기에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았다. 생명이란 인간의 제1원리이며, 인간의 영혼은 자립하는 실체다. 자립이란 다른 것에 의존치 않고 존재하며 자신의 본질로 귀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는 신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두가지, 즉 부정과 유비를 통한 방법을 제시했다. 신에게서 복합성, 물체성 등 부정적 속성을 제거함으로서 신은 단순하고 긍정적인 존재라고 말했으며, 인간과 신은 닮았기에 유비를 통하여 신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세계는 신의 지성 속 세계의 모사이며 역사의 종국점은 신이다. 신은 자유행위를 통하여 창조한다고 보았다. 신플라톤주의의 필연적 유출과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신은 완전하기에, 지금의 이 세계가 최선이라고 보았다. 신의 능력은 그의 의지가 아닌 이성에 기반했다고 주장하는 주지주의 철학자였다.(반대는 주의주의) 아름다움은 직접적으로 본질적으로 발견된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의 선을 바라는 행위이다. 윤리와 도덕적 행위에서 우선적 조건은 지성적 앎이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지성과 의지의 일치에 있지만, 최종 목적지를 향한 지향성은 의지에 복속되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배제하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 아가페 적 사랑이라면, 선에 대한 정신적 사랑이자 지복을 갈망하는 ‘카리타스’라는 사랑을 고안했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으로 국가가 생겨난다. 국가는 교회를 침범해서는 안되며 법은 자연법과 일치해야 한다. 공통선이란 개개인의 선에 대한 추구이며, 법은 공통선을 지향해야 한다.
9. 에크하르트
아퀴나스가 절대 접근할 수 없는 신에 대한 순수 사랑의 영역을 남겨두었다면 안셀무스는 모든 영역을 지성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사상의 중심에는 신과의 신비적 합일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행복처럼 가장 먼저 접근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의지와 지성 중 지성이 우위이긴 하지만 어느 것도 신을 소유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피조물 이상의 존재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존재는 신 안에만 형상적으로 있고 다른 것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신의 존재를 분유하는 것인데, 그래도 그 소유하는 위치가 자기 자신 안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원상과 모상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모상은 원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원상과 모상은 사실상 하나이고 한쪽은 산출하는 것, 한쪽은 산출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정의로운 자’에서 다른 모든 요소를 제거한다면 정의 그 자체와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 내부에 신이 있으므로 다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서 신과 합일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신과 하나됨은 신과의 직접적 관계이지, 매개를 통한 것이 아니다.
10. 존 둔스 스코투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물음 - 신 역시 하나의 존재자이며 우리와 신은 같은 존재성을 공유한다. 보편자도 개별화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존재의 의미란 ‘참으로 존재함’인데, 하나는 실제로 있음, 다른 하나는 진실로서 존재함의 의미이다. 존재와 진실 중 으뜸은 존재이며, 존재한 초월범주에 속한다. 보편자 역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실재론, 보편자는 명목적으로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을 유명론이라고 한다. 존재란 실존함과 같으며, 개별화되지 않은 보편자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자는 개별자에 선행한다. 즉 사물들은 우선적으로 가능태에 머문다. 또한 그는 형상적 구분 이론을 제시했다. 구분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실제적 구분 -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경우 - 이고, 둘째는 개념적 구분, 즉 같은 것인데 개념적으로만 구분하는 것, 세 번째는 형상적 구분으로서, 같은 존재자에 대한 구분이지만 존재자의 구성에 대한 형상적 차이로 나타난다. 마치 지성과 의지와 같이. 네 번째는 양태적 구분이다. 형상적 구분으로 하여금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다양한 역량과 본질을 신의 존재로서 삼을 수 있다. 개별성은 형상적 차이로 발현된다.
11. 윌리엄 오컴
현실의 모든 것은 우연적이며 그 모든 현존과 활동은 신의 자유의지에만 의존한다고 보았다. 현실의 어떤 것도 그 자신과는 다르게 될 수 없다. 오컴철학을 이끌어나가는 주요 원리로 1. 모순을 포함치 않는다면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 신이 이차적인, 즉 피조된 원인들에 의해 창조하는 것이 무엇이든 신은 그것을 그 이차적 원인들의 도움 없이도 직접 만들어내거나 보존할 수 있다. 3. 신은 그것이 실체든 우연적 존재든 모든 실재를 어떤 다른 실재와도 무관하게 야기하고 산출하고 보존할 수 있다. 4. 우리는 자명성이나 계시 또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계시된 진리나 관찰에 의해 검증된 명제로부터의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확증하거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즉 관념의 거부), 4. 실재하면서 신이 아닌 모든 것은 우연적 존재자들이다.
그는 독자적인 논리학을 제시했는데, 기호들로 작동하는 이름어가 있다고 하며 이것은 의미 표시의 능력을 갖는 인공적 언어이며, 명사가 이름어에 속한다. 단독적으로 의미를 확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로 독의어와 공의어를 구별한다. 또한 실재적 정의를 갖는 절대적 이름어와 명목적 정의를 갖고 개념끼리 겹한 것인 내포적 이름어를 제시한다. 정신의 지향들로서 정신적 이름어를 제시한다. 또한 말이나 글이 아닌 것의 영역과, 이것을 발화하고 글로 쓴 영역과, 이것을 의미하는 발화 내지는 글로 쓰는 영역의 세 단계를 구별한다. 정신적 이름어의 본성은 영혼의 지향, 주관적 성질, 혹은 이해작용 그 자체를 띤다고 한다. 보편자는 이차적 지향의 이름이다. 즉, 보편자란 단어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개별자와 정신의 활동만이 개념의 형성과 사용에 본질적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 - 즉 가상의 존재들 - 은 애시당초 거짓이며 보편논쟁에서 보편을 공격한다. 필연적 질서는 없으며 신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과 피조물들 사이에 공통되며 모두 술어가 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이 있다고 보았다. 신에 대한 우리의 앎은 개념에 대한 지식이며 실제 신이 아닌 명제에 대한 지식이다. 자유란 죄에 노출된 상태이며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따라 우연적이다. 그는 신학에서 신성에 대한 증명적 지식의 불가능성을 주장함으로서 신학과 신앙의 결별을 선언하고, 알고 있더라도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암시를 보여주었다.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유명한 논증이 있다. 적은 수의 원리로 설명 가능한 게 너무 많은 원리로 설명되는 중이며 가장 간단한 논증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스코투스, 오컴, 에크하르트와 같은 주의주의 철학자들은, 피조물들은 신의 이성을 분유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12.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이성 자체를 문제삼고, 정신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신은 무한히 존재하는 절대자이므로 세계는 한계와 중심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존재의 의미는 주체에 의해 규정되는 정신 중심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을 전개하였다. 이성은 감각하고 지성은 종합하는 역할이며 인간 지성에는 한계가 있기에 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정신의 인식 활동은 반성(무지에 대한 깨우침)을 동반함으로서 지식의 대상이 된다. 그의 무지를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한 지점은 인간이 신에 대해 알 가능성이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신은 사물의 근거이므로, 신의 본질을 아는 것은 곧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인간 정신으로 신은 완전히 인식할 수 없고 그저 표지와 상징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다. 신은 절대적, 무한적으로 가장 큰 것이기에 실제로 존재하며, 또한 똑같이 무한자이기에 신은 더 작아질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른바 개념의 합치. 신 안에서는 대립하는 모든 것이 합치된다. 신은 단일하고 통맇되어있지만 점차 상대적으로 이것이 펴지면서 세계와 개별적 유한자를 이룬다. 개별자들은 세계의 통일성을 반영하며 서로 상호관계를 갖는다. 통일성이라는 원천에서 모든 대립되는 것들이 시작된다. 단, 신 내부에서는 어떤 대립도 없다. 인간의 사유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의 절대적 무한성에 다가가기 위하여 위-디오니시우스의 부정의 길을 다시 도입한다. 아무튼 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개별자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읽은 책
새뮤얼 이녹 스텀프,『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열린책들 (2008)
박남희, 이부현 외, 『처음 읽는 중세철학』, 동녘 (2021)
보에티우스,『철학의 위안』, 현대지성 (2018)
헨리 채드윅,『아우구스티누스』, 시공사 (2001)
앤터니 케니,『아퀴나스』, 시공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