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7. 바뤼흐 스피노자

by 박제원

개인적으로 스피노자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뭐 굳이 신인동성동형론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신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그를 닮은 인간 역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게 합당하지 않겠느냐는 게 그동안의 생각이었는데, 자연의 필연적인 인과의 연쇄고리에 의지가 제거된 신을 귀속시킨 스피노자의 철학에 나는 꽤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평온해 보이는 초상화와는 달리 아주 심각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겸손과 품위를 잃지 않고 사상을 지켜나간 그의 삶 역시 깊은 감동을 준다.


1. 신 또는 자연 - Deus Sive Natura

우선 실체란 ‘그 자체’, 즉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주체는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연쇄적이고 필연적인 인과가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고 할 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과 속성을 가진 신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존재는 무언가에 의존해야 하지만 완전성은 외적 원인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는 완전성이 실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존재들이 의존하는 절대적 완전성이 바로 신이다. 신은 무한한 속성과 영원 본질을 가진 실체이며,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따라서 무한하고 무분할적인 존재가 바로 신이므로 신 외에는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으며 자연에는 오로지 신이라는 단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이 곧 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기에 신을 개별화하여 사유할 수는 없다.(개별화란 대상, 그리고 대상과 별개의 주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을 단 하나, 단일자로서 생각하는 것은 언어의 오류일 수 있다. 수는 실체도 본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이모니데스가 언어의 혼동을 경고했듯, 언어나 숫자로 신의 본성을 표현하려 하는 것은 위험한 시도이다. 신의 속성은 실체의 본질이기에 속성은 영원한 것이다. 신의 존재와 본질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자신의 자기원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신의 본성에만 존재한다. 신은 모든 것의 초월적 원인이 아닌 내재적 원인이다.


자연에는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 존재한다.(스콜라 철학의 아베로에스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전자가 그 자체의 실체적 속성, 즉 원인으로서의 신을 의미하며 후자가 필연성에서 비롯된, 흔히 말하는 자연이자 신의 양태를 의미한다. 지성은 소산적 자연을 통해 파악하며, 의지는 그저 사유의 한정된 양태일 뿐이다. 따라서 사물에는 의지가 있을 수 없다. (필연적 인과의 연쇄에 의하여.) 또한 신의 행동에도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신의 창조물인 사물들이 지금과 다를 수 있었다면 신의 본성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럴 수는 없다. 따라서 지금의 세계가 최선이며, 다시 말하자면 신에게는 의지가 없다. (이는 라이프니츠에게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목적 역시 신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이란 결핍된 것의 추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연이나 자유와 같은 관념은 가능하지 않다. 변화와 과정은 신의 양태에만 관여하며 본질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기에 신은 시간 속에 있지 않으며 영원한 원인으로서 작용한다.


물체란 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양태이며, 본질이란 존재에 있어서 필수적인 속성이다. 이 말은 곧 연장, 양태란 신의 속성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인간의 본질에 필연적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는 신을 분유하며 그에게 의존하는 것이지, 그 안에 신이 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보다 정신의 위치를 한 단계 낮추었다. 또한 모든 관념은 신의 사유의 변용이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인데, 이 사유란 신의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은 사유하는 존재이다.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가 하나의 동일 실체이므로 이 실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무한 실체인 신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신은 모든 관념과 사물의 원인이다. 또한 그렇기에 인간은 단지 신의 속성을 분유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신이 사물의 본질인 것은 아니다. 무한한 사물이 인간 존재를 구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 안에는 인간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필연성 아래에서 표현할 수 있는 관념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완전히 파괴될 수 없다. 신은 완전성을 즐기며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리고 신에 대한 우리 정신의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온다.


2. 인식론

감각의 원인이란 정신과 신체의 합일이다. 앞선 합리주의 철학자였던 데카르트가 연장과 실체를 일찌감치 분리시켜 놓았던 반면에 그는 정신의 위치를 낮추고 신체의 위치를 올려놓음으로써 일원론적 사고로 실체에 접근한다. 관념과 대상은 다른 것이기에 우리는 실재성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관념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실, 실재와 관념은 일치한다는 가정이 그의 철학 속에 내재되어 있다. 관념의 인과는 곧 세계의 인과다. 또한 그렇기에 이때, 관념과 관념 사이의 관계는 관념들의 형상의 관계와 같으며, 그러므로 최고 실재에 대한 관념이 가장 우수하고 참된 관념이다. 또한 사물은 공간에서 선천적이고, 연장은 그 자체가 본질이며 이성에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며, 이성은 연장을 사유함으로써 실재적 본질과 가까워질 수 있다.


결정적인 원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가 도출되며, 이때,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이라는 것은 인식의 결함에서 산출된다. 또한 실체의 본성은 변용에 앞선다. 그렇다고 실체가 다른 실체로부터 산출되는 것은 아니다. 실체는 무한한 것이며 속성은 그 자체로 파악해야 한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인데, 지성이 본질로서 인식하고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가 다 신에게서 비롯된다.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이다. 외부 물체에 의해 신체가 변화되면(즉, 경험) 외부 물체의 본성이 관념에 포함된다. 이때, 현존 여부가 내 표상에 영향을 주지 않기에 오류를 가질 수 있다. 신체의 변용의 인식은 경험 그 자체의 인식이 아닌, 신 안에 있는 신체가 변화를 통해 신을 거침으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당한 인식은 신 내부에서의 변용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타당한 인식이 아니다. 또한 그러므로 허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단편적인 것이다.(스콜라 철학의 영향?)


신체와 정신은 상호결정 불가능하다. 신체는 정신의 명령에 의해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행위한다. 신체도 신체 나름대로 완전하며 애초에 정신도 딱히 자유롭진 않다. 그렇기에 정신과 신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차피 똑같은 신의 분신이다. 모든 사물에 공통된 것은 타당하게 파악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신체적 변용이든지 우리가 뚜렷 명확한 개념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단순하게 표상하며 그것이 필연, 가능, 우연적이지 않은 것이라면, 그에 대한 감정은 최대의 것이다.


감각을 통한 경험의 인식과 기호를 통한 관념으로 하여금 사물을 표상하는 것을 제1종의 인식(즉 상상), 수학 등 사물의 특성에 대해 공통개념 및 타당한 관념을 갖는 것을 제2종의 인식 (즉 이성) 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에 더해 신의 속성들의 현상적 본질에 대한 타당한 인식에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로까지 나아가는 직관적 인식을 제3종의 인식(즉 직관) 이라 부를 수 있다. 이성은 사물들의 공통개념, 즉 모든 사물에 공통되는 어떠한 성질에 대한 관념을 다루는 것을 의미하며, 직관은 신의 형식적 본질에 대한 적확한 관념으로부터 사물들의 본질에 관한 적확한 인식으로 나가는 인식을 의미한다. 제1종의 인식은 허위의 원인이며 제2종과 제3종의 인식은 필연적 참이다. 타당한 관념은 신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이는 정신에게도 귀속된다. 이것이 참된 인식이다. 관념에는 본질이 포함되며 신의 관념에는 개물의 관념이 포함되기에 개물의 파악에는 신이 필요하다. 이성의 본성이란 사물들을 어떤 영원의 측면에서 지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의 본성과 인간 존재의 한계 사이의 간극으로 우리는 자유의지의 환상에 빠지고는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에서 자아는 개인적이고 문제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순수한 사유는 신의 양태에 불과하며, 우리는 사물을 시간의 측면에서 보는 것을 벗어나 신의 관점인 절대적 관점으로 올라서야 한다.


표상은 명확하지 않고 혼란스럽게 나타나는 관념이며, 표상의 소실은 참된 것의 현재가 아닌 더 강력한 표상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가령 우리가 태양의 실제 거리를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표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대상과 관념을 혼동할 때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신은 무한하지 않으며 추상은 자연보다 넓다.


3. 코나투스와 정념

사물은 스스로를 파괴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사물의 속성은 모두 신에게서 분유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사물은 오로지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만 파괴될 수 있으며,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위한 지속을 노력한다. 이 존재의 지속을 위한 노력이 바로 코나투스이며, 이것이 사물의 현실적 본질이자 사물에 주어진 본성이다. 이것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어 있는 경우 충동에 불과하며, 정신에만 관계되어 있을 때 비로소 의지라고 부를 수 있다. 또한 코나투스를 다르게도 표현하는데, 신체의 형상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극히 다른 물체들의 운동을 신체가 일정한 비율로 전달하는 데 있다. 따라서 신체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신체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선이다. 이 정지와 운동의 비율의 유지하는 본성이 바로 코나투스다. (후술할 정의까지 합치면, 코나투스의 정의는 1. 존재의 지속을 위한 노력 2. 신체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하는 것 3. 본성의 이행을 통해 타인, 그리고 나아가 신을 추구하려는 참된 자유인의 본성 이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신의 안에 있으므로 개별자에 대한 관념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한 답이 바로 코나투스이다. 코나투스를 가짐으로써 사물이 되고, 코나투스가 증대될 수록 대상은 그만큼 더 자립적이고, 더 '그 자체'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은 단어에 내재한 관념들의 진리에 의해서가 아닌, 이 단어들이 전달하고자 한 관념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즉 선과 악은 욕망과 야망, 정념 등에 의존하며, 특히 악이란 그저 결핍의 양인 것이다. 쾌감과 기쁨은 정신(혹은 코나투스)의 완전성에 관련하며 우리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사물에 대해서 우리는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감정을 가진다. 기쁨은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며 슬픔은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즈음엔 좀 물려서 흘려가며 읽었다..) 감정은 더 강한 감정에 의해서만 억제 및 제거되며 그것의 원인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표상할 때 더 강력하다. 우리는 표상으로 하여금 사물을 현존하는 것으로 고찰한다. 욕망은 욕망으로 억제해야 한다. 우리는 슬픔, 고통 등 수동적 정서가 아닌 기쁨이나 쾌감 등 능동적 정서로 하여금 우리의 정념을 이행해야 한다. 또한 아무리 능동적 정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기에, 이러한 정념에 지배되지 않고 내적 원인에 대한 이해, 그리고 공통관념에 대한 이해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 그럼으로서 우리는 우리 본성의 필연성을 이행하고 이성에 다가감으로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4. 윤리, 국가, 그리고 자유인

이성은 자신을 위한 것을 추구하며, 덕은 존재를 보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을 가지기에 이성은 덕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다 함께 존재의 보존을 위하며 다 함께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는 타인이 인간에게 가장 이로운 것이며, 그렇기에 이성을 따르면 타인을 위할 수밖에 없다. '실존하는 모든 사물들은 철저한 상호의존 속에서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라는 그의 표현으로 이를 나타낼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코나투스가 덕의 제일기초이다.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이 코나투스일 때, 그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인식뿐이기 때문이다. 이 인식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며, 정신의 최고의 선은 신의 인식이다. 유덕함은 이성이며, 이것은 최고선, 즉 신에게 가기 때문에 만인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만물에게 공통적인 코나투스와 정신의 최고선을 향한 추구가 일치하는 지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과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의지에 기반한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덕에 기반한 행위를 함으로써 코나투스의 증대와 자유, 행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성은 사물을 영원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지만 신체의 한계로 인하여 그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로 영원의 상, 즉 신을 통해 파악함으로써 사물을 영원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에 형상적 원인으로서의 정신에 의존하며, 기쁨에 신의 관념이 수반할 수 있는 것이다. (amor dei intellectualis)


감정은 더 큰 감정, 혹은 외부에 의해서만 조절되므로 형벌이 필요하며, 법률과 자기 보존의 역량에 의해 확립된 사회가 바로 국가다. 자연상태에서는 무지하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이기적이게 되므로 죄가 없으며, 오로지 공동체 혹은 국가에 복종하는 시민일 때에만 죄가 정해진다. 따라서 유일한 죄는 불복종이다. 이성에 따라 살 수 있는 권리는 국가 내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종과, 특히 제3종의 인식을 행함으로써 신에 대한 타당한 관념을 가지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이들은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행위하는 이들이다. (그의 철학과 스토아 철학이 마주치는 지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성적 판단으로 욕망을 조절하고, 본성을 이행하며 능동적 정서로 하여금 행위한다.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서 가장 적게 생각하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관조이다. 자유로운 인간들끼리만이 오직 서로에게 진실로 감사해하며 기만이 없고 항상 신의를 갖춘다.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고독한 삶보다는 많은 인간들이 모여있는 국가 내에서 더 자유롭다.


철저히 우상숭배와 기도, 기적 등에 대한 관념을 배척한 그는 이성적 인간이 복종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규율만 갖춘 종교를 주장했으며,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주장했다. 또한 사유와 의사표현에 대한 자유를 가로막아서는 안되지만, 시민 불복종에 대해서는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그 역시 사회계약에 대한 추종자였기에 최고 권력자는 최고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했다. 시민 사회는 그 자신의 코나투스를 가지며, 그렇기에 정치체는 이성에 복종해야 한다.


읽은 책

새뮤얼 이녹 스텀프,『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열린책들 (2008)

스피노자, 『에티카』, 비홍출판사 (2014)

로저 스크러턴, 『스피노자』, 시공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