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비평 3. 줄광대

生과 美의 변증

by 박제원

1. 서론

현대인은 끊임없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선택은 대개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예술, 사랑, 꿈과 같은 가치들은 여전히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을 위해 삶 자체를 내던지는 선택은 점점 낯선 것이 되었다. 그 결과 현대인은 어떤 가치를 끝까지 밀어붙이기보다는 여러 가치 사이에서 타협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이청준의 「줄광대」는 이러한 문제를 일종의 우화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은 줄 위에서 삶을 초월하려는 줄광대의 이야기와 그것을 취재하는 기자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면서, 삶과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가치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특히 작품 속 인물들은 사랑과 예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파멸하거나 타협한다.


필자는 「줄광대」에 나타나는 ‘줄타기’를 삶을 초월하는 미적 가치로, 사랑을 삶의 표상으로 해석함으로서 작품 속 인물들의 가치관을 숙고해보고자 한다. 또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과의 비교를 통해 삶과 미 사이의 가치 갈등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본론

2.1 生과 美의 변증, 그리고 <지옥변>

<줄광대>는 서커스단에서 줄타기를 하는 광대 부자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취재하러 온 어느 기자의 이야기를 액자식 구성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1966년 <사상계>에 발표된 작품으로, 현재는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中 <병신과 머저리>에 실려있다.


작품은 한때 소설가의 꿈을 꾸었다가 포기하고 문화부 기자가 된 화자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는 승천한 줄광대의 이야기를 취재하라는 부장의 지시를 받고, 자신의 고향인 C읍으로 향한다. 고향에 도착한 그는 어느 매춘부를 숙소로 불러 같이 자게 된다. 그는 매춘부에게 말 그대로 ‘잠’만 잘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온몸이 더워진’ 그는 불과 하루 만에 약속을 어긴다. 이윽고 그는 ‘승천장의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장의사를 만나고, 장의사를 통해 줄광대와 같은 극단이었던 어느 트럼펫 연주자 - ‘트럼펫’으로 지칭하겠다. - 를 만나게 된다. 다 죽어가는 트럼펫은 마지막 힘을 다 해 줄광대의 이야기를 기자에게 들려준다.


승천했다는 줄광대의 이름은 ‘허운’ -雲인지 運인지는 알 수 없는 - 이었다. 허운의 아버지 역시 줄광대였다. 다만 재주를 타지 않고 고고하게 허공을 걷는 방식으로 줄을 타 단장과 실랑이가 종종 있었다. 아버지는 단장과 부정했다는 의심을 품고 허운의 어머니를 목 졸라 죽였다. 그리고 아들을 줄광대로 만들기 위하여 계속 줄타기를 가르친다. 땅바닥에 그은 직선에서 각목을 거쳐 진짜 줄을 타기까지 수년이 걸린다. 아버지 曰, “줄 끝이 멀리 보여서는 더욱 안되지만, 가깝고 넓어 보여서도 안 되는 법이다. 그 줄이라는 것이 눈에서 아주 사라져 버리고, 줄에만 올라서면 거기만의 자유로운 세상이 있어야 하는 게야. 제일 위험한 것은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이다. 줄에서는 눈이 없어야 하고 귀가 열리지 않아야 하고 생각이 땅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한 아버지는, 이제 그만 은퇴하라는 허운의 걱정을 무시하고 함께 줄에 올랐다가 낙사한다.


허운은 이윽고 공연을 마친 자신에게 꽃다발을 주는 여자를 만난다. 공연이 끝나면 도망가던 여자를, 트럼펫의 도움으로 대면하게 된다.(트럼펫이 여자를 좋아했음이 암시된다.) 그리고 여자와의 대면 후, 아버지의 방식으로 줄을 타던 허운이 갑자기 재주를 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줄을 타고 내려온 후 공원에서 여자와 만나고 온 운은, 돌아와서 다시 줄을 타다가 사망한다. 이른바 ‘승천’. 알고 보니 운이 여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이고, 여자를 목 졸라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마 사랑하는 여인을 죽일 수 없던 허운은 결국 줄로 복귀했으나, 줄에서도 살 수 없는 운명이 된 그는 그렇게 죽었다. 사실 여자는 절름발이였고, 우아하게 줄을 활공하는 운을 마치 학처럼 생각했었다는 후문이 있다.


이야기가 끝난 후, 기자는 창녀에게 승천을 믿느냐는 말을 묻자, 창녀는 요즘 것은 믿지 않지만, 옛날의 것은 믿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다음날, 기자는 트럼펫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례식에서 창녀가 트럼펫의 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창녀의 어머니가 다리를 저는 여자였음이 암시되고, 기자는 창녀의 곁에서 떠난다. 작품은 이렇게 끝난다.


이 줄광대 부자에게 ‘줄타기’란 生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美이다. (줄 타는 행위를 美로 규정함은 분명 논리적 도약으로 보일 염려가 있다. 내가 이 행위를 美로 규정함은 그것에 어떤 미학을 기대하기보다는, 生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이데아적 가치로서 가장 적절한 명칭이 美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줄 위의 세계는 세상과 유리되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에 美는 生의 대극인 듯하다. 이런 이항대립적인 가치판단에서 美를 택한 또 다른 이야기로, 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을 떠올렸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영주의 ‘지옥변’ 병풍 그림 의뢰를 받은 요시히데라는 화가가 지옥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딸을 불태워 죽이는 이야기다. 요시히데는 그림을 완성한 후 자살한다. 다른 요소들도 있지만 넘어가자.


이제 우리는 주요한 인물로 허운(여자를 죽이지 않고 자살함), 아버지(여자를 살해하고 줄광대를 지속하다가 줄타기가 끝나는 순간 자살함), 요시히데(여자를 살해하고 자살함)를 꼽을 수 있다. 이 3명의 남성에게 美의 표상이 줄이라면, 生의 표상은 여자, 즉 사랑이다.


우선 아버지와 요시히데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시히데는 그림의 완성 직후에 자살하지만, 아버지는 줄타기를 그만두는 순간까지 삶을 살아내므로. 그러나 이들의 자살에 있어서 차이는 없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자기 서사의 완결이었기 때문이다. 요시히데는 지옥변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이 자기 서사 완결의 순간이자 美의 종결이었다. 그리고 딸을 저버린 순간 生의 추구는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그대로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아버지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요시히데의 자기 서사가 ‘순간’에서 완결되었다면 아버지의 자기 서사는 ‘시간’을 거쳐서 완결을 향해 나아갔다. 더 이상 줄타기를 할 수 없는 상황(건강 문제보다는,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해서 자리를 잃어버리는 상황)이 다다르기 전까지는 계속 줄타기를 수행하는 것이 아버지의 서사였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아내를 살해한 후 生을 포기한 셈이었기에, 삶을 존속시켜 나가면서 끝까지 美를 실현시키다가 마지막에 자살을 선택했다. 다른 듯 보이는 이 두 명의 '예술가'는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 生을 죽이고 美를 선택한 이들의 가치관을 전근대적 가치관이라고 부르겠다.


허운은 이들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生을 끊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사실 여자에게 사랑에 빠진 순간 그는 美를 포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다시 美를 추구하려면 生을 완전히 끊어내야만 했다. 아마 그의 선택은 生이었던 듯하다. 비록 여자에게 거절당한 순간부터 그의 生은 의미를 잃었지만, 의미를 잃는 것과 아예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아무튼 그는 生과 美를 선택하지 못하고 그대로 줄 위에서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는 우유부단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형태로의 자기 서사의 정립이라고 볼 수 있다. 生과 美를 동시에 포용하고자 한 시도는 결국 ‘승천’이라는 형태로 신화가 되었다. 작 중에서 허운의 마지막 줄타기는 무척 아름다웠다고 묘사되는데, 두 가치관을 초극함으로써 일종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암시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트럼펫은 이 신화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고, 또한 창녀에게 역시 진실이자 신화로서 계승되었다. 아무튼 生과 美 양자에서 갈등하다가 파멸한 허운의 가치관을 과도기적 가치관이라고 부르겠다.


2.2 믿음과 배반, 그리고 현대

창녀에게 있어서 美는 승천의 신화다. 다른 말로, 믿음이다. 그녀는 트럼펫에게 배반 - 의미도 의도도 없었지만. - 당한다. 허운을 승천하게 만든 여자를 트럼펫이 만나게 된다. 트럼펫은 美가 아닌 生을 선택했다. 애초에 美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럼에도 트럼펫은 창녀에게 있어서 生이다. 트럼펫의 배반에 의미와 의도가 없었듯, 창녀에게 트럼펫 역시 의미도 의도도 아니었다. 다만 의무이기는 했는지, 트럼펫을 위해 매춘 행위로 하여금 돈을 번다. 즉 그녀에게 있어서 매춘 역시 生과 떼어놓을 수 없는 행위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의미도 의도도 없겠지만.


근대와 과도기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가치관 역시 변화했다. 美와 生은 대극이 아니게 되었다. 창녀는 승천보다는, 승천에 얽힌 사랑의 신화를 믿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로부터 이어온 美의 가치관을 버리고 목숨까지 포기해 가면서 믿고자 한 사랑. 하지만 그녀는 옛것을 믿지만 요즘 것은 믿지 않는다. 사랑은 믿지만 매춘도 한다. 이런 배반은 그녀만의 현상이 아니다. 이 작품의 화자인 기자 역시 꿈을 버리고 기자노릇을 한다. 아마 그에게도 美는 문학이었으리라. 하지만 결국 현실이라는 핑계로 그는 美를 저버렸다. 이제는 生이 美보다 더 가치 있어진 시대다. 타협과 배반. 자아의 붕괴와 천박한 生. 이것이 현대의 가치관이다.


3. 결론

사실 옳고 그름은 없다. 모든 것이 과학과 숫자로 정의되는 지금에 있어서 그 어떤 정답이 존재할 수 있을까. 줄타기와 그림을 위해서 아내와 딸을 죽이는 낭만주의자들도 오답이고, 돈을 위해서 꿈을 저버리거나 매춘하는 현대인들도 오답이다. 서두에서 내가 제안한 과몰입 역시 옳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서사는 우리에게 달려있으니, 알아서 적합한 방도를 모색하고 生과 美의 기로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지 않을까. 어떤 길이든 후회는 남겠지만, 그렇기에 또 生이요 美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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