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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익 Oct 04. 2015

화려한 착각

예쁜 나무의 불쌍한 하루


익숙함이 강해지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플라톤은 동굴이론을 통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이 동굴에 비친그림자 세상이라고  이야기했다.

동굴 속의 그림자를 세상이라고 믿는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자주 겪고 ,  익숙해지다 보니 지금 마주한 현실에 순응하게 된다.

순응을 통해서 적응을 하게 되고, 적응하게 되면 본질을 바꾸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사무실에는 꽃나무와 화초가 많다.


삭막한 분위기를 싱그럽게 바꿀 겸, 싱그러운 공기도 얻자는 취지에서 하나둘씩 들여온 것 같다.

걔 중에는 선인장처럼 신경을 안 써줘도 되는 게 있고, 수시로 신경을 써 줘야 하는 것도 있다.

내 자리 앞에는 이름 없는 나무가 있다. 처음 이 자리에 왔을 때는 내 키보다 작았다.

이파리도 보잘 것 없고, 색깔도 누렇게 변해서 다 죽어가는 모양새였다.

제대로 물을 주는 사람도 없고, 그나마 관심 있는 사람이 오매가매 불규칙하게 물을 줬을 뿐이다.

햇볕을 받고 광합성을 해서 쭉쭉 위로 뻗어가야 할 나무가 , 사무실 의탁한 공기에서

에어컨을 친구 삼아 서 있다니 제대로 클 리가 없지 않은가.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자리에 앉아 나무를 봤다.

나의 눈높이에도 못 미치던 나무가 , 이제는 훌쩍 커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걸 지켜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천장의 백색 형광등을 따라서 쭉쭉 뻗어가는 나무를 보니 참 신기했고 , 고마움까지 들었다.

“얘는 형광등이 해 인 줄 아나 봐” , 직원들이 우스갯소리로 쭉쭉 커가는 나무를 보며 말했다.

가시적인 성장이 보이니, 관심이 커질  수밖에.

영양제도 꼽아주고 , 물도 주고, 흙도 관리해줬다.

반들반들한 잎이 정성을 아는지 자꾸자꾸 컸다. 잭의 콩나무처럼 쭉쭉 커서 이제는 천장에 닿기 일보직전이다.

흐뭇하게 바라보다 문득 나무가 불쌍해졌다.

나무는 지금 형광등을 해 로 착각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하기에는 잔인하디 잔인하다. 광합성을 하긴 해야겠으니, 형광등에서 나오는 불빛은 햇볕 삼아서 광합성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양제도 주고, 사랑을 받아 때깔은 참 좋다.

그래도 가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평생 햇볕을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 사무실에서 형광등을 햇볕으로 착각하고 살아갈 나무의 운명이 가여웠던 것일까.

이제는 익숙해져서 환경에 순응해 버린 것 같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비와 바람 그리고 태양을 마주하며 세차게 살아 가야 할 본래 모습을 버리고 , 온 실속 화초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니..


환경에 적응하며 순응적으로 살아 가는 건 비단 사무실의  나무뿐만 아닐 것이다.

인류의 역사 또한 환경에 따른 진화의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종의  사회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을 생각하면 적응력을 키우며 삶을 개척한 것이기에 그다지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시 여기는 것이 옳을 수 있다.

하지만, 사무실의 나무는 그런 자연적 사회 진화가 아니다. 인간의 욕심이 바로 본래의 모습을 말살시킨 슬픈 해피엔딩인 셈이다.


본래의 모습을 잃고, 평생 자신이 처한 동굴의 모습이 세계라고 아는한, 살아간들 얼마나 행복할까 싶다.

비록 때깔도 좋고, 좋은 영양소도 얻으며 살아가겠지만 진짜가 아닌 한 과연 진정한 해피엔딩일까.

강요된 속박에서 마지못해 적응하며 살아가는 삶은 가짜 삶일 뿐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태가 사무실의 예쁜 나무와 같지는 않은지 생각해본다면 , 조금 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반지르르한 나무가 한없이 가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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