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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익 Feb 03. 2016

진보(Progressive)와 희생(Sacrifice)

인류의 진보는 희생의 역사이다.


진보는 희생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진보(progressive)는 남북 이데올로기로 인한 정치 균열로 받아들여 진다. 따라서 진보는 progressive. 가 아닌 Republic에 대응하는 Democratic에 더 근접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진보의 역사라고 함은, 인류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며 삶을 보완하고 진일보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질적 양적 인류번영을 그냥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느냐,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지 곱씹어 보는가의 관점은 명백한 차이를 수반한다.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교육을 수료한 사람이라면 한번쯤을 들어봤음직한 이름 .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더욱더 잘 알려져 있다.그는 그의 저서에서 “역사란 미래를 보는 거울” 이라는 관점을 피력했다. 과거의 일들을 통해서 미래의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는 태도를 가지자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단순한 과거의 일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창조적 과거이라고 받아들이면 조금 더 의미가 와 닿을 수 도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하는 역사적인 일들. 역사는 반복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라는 공간에서 기술은 시대마다 다를 지언정 , 인간이라는 개체는 시대를 초월하고 거의 함께 수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좋지 않은 쪽으로 퇴보했을 수도 있고, 좋은쪽으로 진보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끊임없이 진보(progressive)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모두가 노력한다는 점이다. 좀 더 나은 인류의 삶을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자세는 어떤 것일까. 


기술문명의 발달은 이전에 처했던 상황에서 좀더 효과적이고 편리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에디슨, 노벨 과같은 발명가들을 필두로 다양한 과학자들이 좀더 편리하고 정확한 방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더 발달된 제도와 문물을 발견하고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진보가 위와같은 긍정적인 노력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발명가들과 과학자들, 혹은 개척자들에게 역사의 발전과, 삶의 질 향상에 대해 감사하며 위인으로 받들기도 한다. 


편리성과 효율성을 찾기위한 노력이 진일보한 기술과 문명을 가져온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바로 시행착오를 통한 수정의 과정이다. 시행착오라고 순화된 표현을 사용했지만, 조금 더 적나라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바로 ‘희생’을 토대로 만들어진 인류의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희생이 지칭하는 건 차티스트 운동, 4.19혁명, 노예해방운동 등과 같은 목숨을 바친 투쟁의 결과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작은 변화를 만들게 한, 수많은 사건 사고의 희생자들에게 ‘희생’이라는 용어를 붙여 감사드리고 싶다. 


자동차가 발명되었을 때, 교통사고가 나니 사람이 많이 다쳤다. 그런 상황을 보고 자동차 회사는 에어백이라는 아이디어를 창안했다. 건물에 비상계단이 없이 높게만 세웠는데 불이나서 꼼짝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비상통로를 만드는걸 의무화 했다. 지하철 칸에서 불이 났는데 그 불이 의자카페트를 통해서 더욱더 번져 수백명의 사람이 죽었다. 이를 고치기 위해 모든 전철은 의자를 절연소재로 바꾸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컵라면을 먹는데 컵라면 용기로 인한 환경호르몬 피해자가 나타나기 시작해 문제성이 제기되 종이컵으로 바꾸었다. 등등 우리가 삶의 혜택으로 받고있는 수많은 것들은 위대한 발명가나 위인의 업적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먼저 사고를 당하고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위험이라는건 언제 어떻게 생길지 모르는 것이라 항상 모든 시나리오를 가지고 예측가능한 대응책을 마련해 놓을 수 없다. 따라서, 의외의 부분에서는 사후약방문의 모습일지라도, 사고나 터지면 그 사고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곤 한다. 인류의 발전은 이와같은 안타깝지만 현실적인 모습으로 흘러왔고 발전해 왔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꼭 사고를 당하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혜택들이, 누군가의 큰 희생을 대가로 수정되고 보완되어온 소중한 것이라는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지금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 그리고 차곡차곡 희생과 그 보완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는 것을 먼저 인지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진보하기 위한 삶을 위해서는 개개인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마음 속 한켠에는 희생에 대한 막중함 책임감과 감사함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 법정스님이 말씀하진 무소유 또한 이과같은 이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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