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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익 Mar 23. 2018

어르신의 발표자료

감히 평가되어서는 안되는 그 어떤 것들

  왜 그런거 있잖아. 잘하려고 했는데 괜히 부끄럽고 속상한거 말이야. 심지어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한건데 그때는 너무 부끄러웠던거 말이야. 그런거 없어? 난 그런거 있었거든.


우리엄마는 김밥이란걸 처음 싸봤어. 형편이 좋지않아서, 안에 고기 같은거 들어가는 김밥은 만들기 부담스러우셨나봐. 그냥 계란, 오이, 당근, 시금치, 우엉 이렇게 넣어주셨거든. 그래도 난 맛이있더라고. 첫 소풍가는날, 새벽부터 일어나서 김밥을 싸는 엄마 옆에서 하나 둘씩 토막난 김밥을 먹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생생해. 자랑스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갔어, 점심시간에 옹기종이 모여 자랑스럽게 도시락을 열었는데 너무 놀랐어. 형형색색 주먹밥부터 엄청 예쁘고 푸짐한 김밥들이 즐비했거든. 어린마음에 사실 좀 부끄러웠어. 지금에야 부끄러워 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해야겠지만, 그때는 그게 아니었거든. 괜히 엄마가 밉고 부끄러운거 있지? 그래도 엄마는 엄마가 아는한 최대한 맛있고 정확하게 만들었을텐데 말이야.


얼마전에 창업자 대표들을 모집해서 워크샵을 한 적이 있어. 미리 자기 회사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이를 어떻게 경쟁력으로 바꿀 것인지 프리젠테이션을 할테니 준비를 해달라고 했어. 행사 당일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만들어 온 PT 자료를 연습하고 있었지. 가능성 있고, 우수하다면 지원금을 주고 계속 자생할 수 있도록 판로도 개척해 주는 좋은 기회였거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열정과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사람들의 발표는 너무 흥미로웠어. 감히 내가 평가를 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정도의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거든


화려한 PPT부터 클라우드를 이용한 기술까지 마치 테드 강연을 보는 것 같았다니까. 참가자들에 심취해 있을때, 나이 지긋하신 어머님께서 나오셨어. "와 요즘엔 연령을 떠나서 대단들 하시구나" 하고 생각했어. 어머님은 주섬주섬 쇼핑백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시더니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부씩 나눠주는게 아니지 뭐야. 뭔가해서 보니, 발표내용을 손수 적은 내용물 이더라구. 스무명 남짓 있던 그 자리에 사람들에게 발표하기 위해서 손수 사인펜으로 색깔을 바꿔가며 발표물을 적어 왔었어. 어릴적 엄마의 김밥을 부끄러워 하던 나라면 "에이~뭐야 시대에 뒤떨어지게"라고 했겠지만, 그때보다 조금은 성숙해진 탓인지..어르신의 발표자료를 보고 나는 눈물이 날뻔했어.


복사도 아니고, 한획 한획 정성들여서 수작업으로 그 많은 작업을 해서 나눠 주신것인데,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때 느꼈던 전율은 지금도 표현하기가 참 어렵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있고, 화려한 방법이 있더라도 본질은 '내가 얼마나 준비를 하고, 최선을 다하는가' 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발표준비는 엄청난 기술과 시각적 효과이기 이전에 스스로의 신념과 가치관을 얼마나 깊게 고민하고 이야기 하는가가 우선이었고 ,워크샵의 핵심이었거든. 물론, 도구적인간이 도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비효율적인 방법을 썼다는게 낭만적이라거나 아날로그적이라고 미화하는것도 아니야. 다만 , 스스로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최대한 본질을 꺼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거야. 이런 과정을 거치면 자연스레 해결방안의 탁월함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공감도 잘 이끌어 낼 수있는 결과를 만들 수 있어


 다양한 방법이 있고, 변화무쌍한 트렌드가 있다고 해도 내가 당시에 한땀한땀 수놓듯이 했던 습관이나 방식들 자체가 부정되어서는 안되는것 같아. 고리타분하다고 뭐라할지도 몰라. 그치만, 그 고리타분함이 어떤이에게는 하나의 존재가치이며 , 자존심을 넘어 ,살아온 인생을 대변해 주는 것이거든. 말인즉슨, 사람들이 하는 하나하나의 행동에 절대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된다는거야. 그것은 곧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고, 살아온 그 사람의 정체성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 되레, 트렌드를 좇아가기 보다 때로는 자기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된 세상에 맞서는 게 더 용기있고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해. 나도 내가 만들었던 정성들이 ,훗날 구닥다리가 되거나, 다른사람이 쓰는 방법과 다르더라도 이 자체를 부끄러워 하거나 부정하진 않을거야. 그건 곧 나에 대한 부정이기도 할테니깐.



엄마가 싸준 김밥은, 우리엄마가 알고있던 '김밥' 이라는 정의에 가장 정성을 다해서 만들어 주셨던거야. 그건 엄마가 나를 생각한 마음 그 자체고, 곧 엄마 그 자체일 수도 있었던 것이지. 모든 것들이 각자 혼을 담고 있기에 , 난 그 혼을 절대로 비교하거나 괄시하지 않기로 했어. 어르신이 적어오신 반드한 발표자료도 그 자체일 뿐이지 다른것과 비교하거나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


예전에 내가 지금이 어느땐데 옛날 젊은시절 멋을 간직하고 싶어서 매우 촌스럽게 다니는 아저씨 이야기를 하면서 한심하다고 한적이 있었지? 나 그말 이제는 취소하려고. 그 멋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도 없는 그냥 그 아저씨 의 젊음이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강한 자존감 일테니까.


객관적이고 공통화된 개념안에서 비교를 거부하고, 모든 객체를 개별적인 존중으로 대할 수 있을때 세상을 성숙하게 살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어.


거참 말 길었네. 엄마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싸준 김밥이 너무 먹고싶은 요즘이네. 김이 마치 비단처럼 흠짓하나 없이 감겨 있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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