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완전히 놓쳤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아들

by 복자의 썰

한 때 완전히 놓쳤다고 생각했다. 이젠 평생 애뜻한 부자관계를 힘드겠다는 절망적인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아들은 초등학교때 농구를 시작해.. 4학년 정도까지는 내가 상대해 주었지만 그 뒤로는 내가 버거웠고, 원래 운동에 액티브 하지도 않고 정적인 성격이라 같이 놀아주지는 못했다. (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내 모습을 딸내미는 그대로 따르고 있었지만..) 가끔 내 친구들이 오면 아들은 아저씨뻘 되는 내 친구들이랑 농구를 했다. 아들이 중학교, 고등학교시절 방과 후 학교에서 시합하는 모습을 늘 따라다니긴 했지만 같이 놀아 주지는 못했다. 어쩌면 아들에게는 아빠에 대한 서운한 마음, 아쉬운 마음이 그때부터 커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 시절은 총알처럼 빨리 지나갔다.


별 의식하지 않고 있던 문제가 이태리 밀라노에서 터졌다. 아이들이 대학교 진학하기 전에 식구들이 유럽으로 2주 여행을 갔었는데,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모두들 지쳐 있었고 날카로와져만 갔다. 그리고 밀라노에 도착해 외곽 숙소에 짐을 풀고 밀라노 대성당 구경을 갔다. 여기저기 구경을 하고 광장에서 잠시 헤어져 각자 시간을 가지고 한시간 뒤에 장소를 정하고 거기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건은 여기에서 터졌다. 지정한 시간이 지났는데 아이들 둘 다 보이지 않는다. 아내는 거의 정신이 나가서 여기저기 아이들을 찾고 있었고, 주위에 있던 경찰관들을 붙잡고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나도 패닉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도대체 아이들이 어디로 갔을까.. 그래서 혹시나 하고 우리가 들렀던 성당 주위의 경로를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거기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도 우리만큼 다급한 눈빛으로 우리를 찾고 있었다… 다급하고 힘든 순간들이었다. 모든 일정을 접고 숙소로 돌아가는 트램 안에서는 나 혼자 떨어져 있어야 했다. 모두 내 옆에 있는 것을 거부했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고, 아들은 신경질적으로 급변했다.


숙소로 돌아와 아내, 아이들과 대화를 해보려고 했지만 아들의 툴툴거리는 모습은 참기 어려웠다. 아내와 딸내미를 강제로 방으로 들여보내고 아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들을 윽박 질렀다. “불만을 말해봐, 속에 있는 말을 해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내 말고는 (부부싸움 하면서 서로 소리지르던 그때? ) 말고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결렬하게 화를 내본적이 없으나 아들에게는 그렇게 하고 말았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을 열지 않던 아들이 말문이 터졌고, 그동안 서운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내 마음에 비수처럼 박인 말은.. 다른 아빠들은 아들하고 잘 놀아주는데 난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데로 순간적으로 결정해 다른 식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상관없이 내 뜻만 중요하다 .. 그 중에서도 다른 아빠들과 비교하며 서운한 것들이 아들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던 것에 내 마음도 무너졌다.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온 변명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 난 정말 너희들을 사랑하고 너희들을 위해선 내 팔 하나라도 짜르라고 하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야…” 그렇게 한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아들을 앉혀놓고, 눈물 흘리게 한 자리에서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다혈질의 내 모습이 그대로 나와버린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아이들을 대하는 내 태도는 소심해졌다. 아이들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아내가 결정을 하고 난 뒤에서 서포트만 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밀라노에서 알게된 아들의 서운함에 난 다시 상처를 줄지 모르는 우려에 소심해 가는 것에 어쩔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아들은 꼭 나를 닮았다. 생각을 속으로만 품고 꾹꾹 눌리고 있는 모습은 어쩜 그리 내 모습 같은지 무서워지기도 한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심하게 대든적이 있었다. 이민을 온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모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정말로 힘든 시간이었고, 한푼 없이 미국으로 온지라 육체노동에 모두는 힘들었다. 쪼그만 월세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저녁을 먹고 있었다. 무슨 할 이야기가 있으랴.. 허기를 채우기 위해 꾸역꾸역 밥을 넘기고 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으나, 아버지가 일본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일본칭찬일색의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는데, 어머니는 그냥 듣고만 계셨는데.. 내가 터져버렸다. “아버지는 우리가 한국에 있을땐 가보지 않던 미국이야기만 하시더니 이젠 또 한번 발 들인적도 없는 일본이야기만 하세요? 지겨워요..” 그때 아버진 숟가락을 던지더니 어머니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 자식 내보내, 나가 이 새끼야…”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가슴 아픈 한 순간이다. 아마 그때부터 아버지도 나에게 순한 양처럼 조심스레 대하신 것 같다. 돌아가실 때까지 큰 소리 한번 내시지 않았다. 내가 화를 낸 이유는 있었으나 그 말을 들은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일초도 걸리지 않고 눈물이 맺힌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했던가.. 나도 내 아들에게 화를 돋구고 아들이 터지고 난 순해졌다. 그후로도 아들이 내 눈치보고, 내가 아들눈치 보는 시절이 오래되었다. 아들은 6시간 떨어진 도시로 대학교를 갔다. 데려다주고 오는 길은 어느 부모도 마찬가지로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아들과 아내는 쏟아지는 눈물로 아무 말도 못하는 첫 이별의 애틋함이었다. 아들과 둘이만 있을때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첫 일년은 힘들꺼야, 그래도 조금 적응이 되면 이젠 너의 생활을 해. 자신있게. 아빠 때문에 소심해져야 했던 건 이제 그만해도 돼. 그리고 그 때 네가 가지고 있는 리더쉽도 펼쳐봐. 넌 충분히 그럴 자질도 있어..” 정말 일년이 지나고 아들은 그 곳에서 날개를 펼쳤다. 친구들이 넘쳐났고, 슈퍼스타가 되기보다는 모두가 인정하고 옆에 있기를 원하는 그런 리더쉽을 가진 아이로 변하고 있었다. (슈퍼스타가 될 자리에 있음에도 스포트라이트를 거부하는 것은 어쩜 그리 나를 닮았는지..)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하는 아들을 보고 있었지만 아버지인 나와의 관계를 변한 것이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느라 그럴 기회는 없어 보였다. 그러다 아들이 치과로 진로를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가 치과일을 하고, 치과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도저히 치과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아들이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로인해 다시 허락된 한자락 지푸라기에 난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푸쉬하면 멀어지는 걸 잘 알기에 정말 조심조심 아들과 대화를 이어나갔고 하고 싶은 말이 산처럼 많아도 참아야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치대를 시작하고 이제 뭔가 본격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기다려야 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아들한테 잘 달리는 기술을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때가 되고 환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적지 않은 대화가 오고 갔다. 진지하게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기회는 없었으나 (나도 아들도 그런 자리는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톡으로, 어떤 때는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캐쥬얼하게 대화는 계속 이어나갔다.


주로 환자 케이스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환자에 대하는 자세와 내가 선택하는 치료방법에는 나의 오랜 생각과 고민이 녹아 있었다. 아빠를 가감없이 제대로 전할 수 있는 천금같은 기회였다. 그런 가운데 아들은 잘 몰랐던, 알았다 해도 희미했던 그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그렇게 막혀 있었던 아들과의 교감을 이렇게 풀수가 있는 기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게,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건 정말 행복했다. 집 화장실엔 작은 팻말이 하나 걸려 있는데 거긴엔 이런 글구가 있다, ‘Miracles happen everyday.’ 아들과 대화라는 기적이 매일 일어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던 아버지가 혼자서 위안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괜히 뿌드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계기는 필요했다. 아빠 혼자만의 상상으로만 남은 많은 세월을 버텨나가기엔 색깔은 짙진 않았다.



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비행기를 타고 6시간을 날아서 가야하는 먼 곳으로 다음 단계를 위해 떠났다. 6년+를 수련의로 지내고 그 다음은 기약할 수 없는 진짜 이별을 해야 했다. 며칠 먼저 아들이 출발하고 곧 식구들이 며칠 같이 지내기 위해 따라갔다. 덩그러니 아무 것도 없는 아들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들과는 달리 마음이 급했던 아내는 도착하자마자 딸내미를 혼자 아파트에 남겨두고 나와 아들을 데리고 IKEA와 Costco로 생필품을 사기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들은 아파트를 어떻게 정리할 지 어느정도 계획이 있었지만 엄마가 원하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전날부터 해야할 일이 많아 제대로 잠도 자기 못한 피곤한 상태였지만, 그리고 샤핑을 극히 싦어하지만 기색없이 따르던 아들이었다. 많은 짐들을 아파트에 산처럼 쌓아두고 있는 걸보니 아들도 슬슬 불평이 나오기 시작한다.


문제가 생겼다. 이후로 일련의 사건들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아내의 폰이 Lock이 되어버린 것이다. 몇 번이나 패스코드를 넣었지만 틀린 번호란 싸인이 뜨고 급기야 Lock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 나랑 둘이서 여행을 가기 직전 이런 일이 있었고, 해외에 나가서 폰 없이 며칠을 지냈고, 결국 폰을 리포멧을 하고 나서야 다시 쓸 수 있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산처럼 쌓아놓은 짐을 정리해야 하는 막강한 스트레스에 쌓여있는 아들이 놀라운 참을성을 보이며 엄마를 데리고 전화를 고치기 위해 나갔다. 이미 늦은 오후였다. 우리 모두 하루종일 한끼 식사도 못해 지친 상태였다. 딸내미와 함께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박스 뜯는 것만으로도 일은 많았다. 잠시 쉬기로 하고 난 방에 들어가 누웠는데 혼자 정리를 하고 있던 짤내미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딸내미가 IKEA에서 사온 주방기구를 뜯는데 싸구려 커트 칼에 손가락을 베인 것이었다.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가보니 딸내미 왼손 검지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무서워 손을 움켜쥐고 있는 딸내미의 손가락을 억지로 펼쳐보니 깊게 베였다. 손가락이 붙어 있는지 확인을 해야할 정도였다 뼈도 잘리지 않았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신경은 손상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깊은 상처였다.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고, 출혈은 심했다. 딸내미는 아티스트이고 손가락은 생명인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기만 했다. 응급실로 가야했다. 다행인지 아들의 아파트는 아들이 수련의로 근무해야 하는 병원 바로 코 앞이었고, 그 병원의 응급실은 아파트 창문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페이퍼타올로 손을 압박하고같이 뛰었다.


도시안의 Trauma Center라 환자는 많고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수속을 하고도 4,5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두시간을 기다리다 아내와 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이런 일이 있었고, 우린 지금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다. 최대한 차분히 연락을 했고, 아들과 아내는 응급실로 도착했다. 아내의 폰은 고쳐지지 않았고, 포기한 상태로 내 연락을 받았고, 놀란 가슴을 쓸어 안고 달려왔다. 주말 저녁이라 응급환자들은 계속 밀려왔다. 모두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시차도 바뀐 곳에서 하루 종일 지쳐 있었다. 저녁 10가 넘어 아직도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아들과 난 아파트로 돌아왔다. 문을 연 식당은 없었고, 편의점도 없었다. 낮에 사다놓은 계란을 삶았다. 그리고 아들에게 다시 응급실로 돌아가 아내와 니 동생 좀 갖다주고 같이 있으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아들은 심신상태는 이미 한계를 넘어가버렸다. 짜증이 입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 It has been very quiet. Now it has become a total mess…” 나도 힘들었고 반박할 수 있었지만 아들도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인내를 본지라 무슨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난 쓰러졌고, 새벽 3시가 되서 식구들이 돌아왔다.


잠자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모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을 해 주어야 했다. 방안에 있는 메트레스에서 아내와 난 자기로 하고, 딸내미는 거실에 에어메트레스에서 아들은 그 옆에 방바닥에 얇은 담요한장 깔고 자게 되었다. 밤새 고민했다. 하루사이에 쌓인 스트레스가 엄청나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하나.. 단 두가지 생각뿐이었다. 내일이라도 떠나자. 비행기표는 3일 뒤였지만 그때까지 이대로 지낼 수는 없다. 어떻게든 표를 마련해 내일 아침이라도 떠나자.. 아마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그냥 이렇게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떠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정리될 것을 생각하면 우리 식구에겐 정말 암울한 미래가 있을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내를 데리고 맥도날드를 갔다. 아침을 사고 내 생각을 이야기했고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의 도움으로 그냥 떠나는 것은, 그냥 그렇게 회피해버리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아파트로 돌아가 사온 아침을 먹으려 했으나 음식에 손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아들이 예약해 놓은 일들이 있었다. 아침에 U-HAUL에 가서 트럭을 렌트해서 아들이 Facebook Marketplace에서 정해놓은 세군데를 가서 작은 테이블, 침대 프레임과 카펫, 소파를 픽업해 와야 했다. 아들이 예약해 놓은 트럭이 없어 그 다음 큰 사이즈의 트럭을 픽업했다. 아들이 운전을 하고 탁자와 침대 프레임, 카펫을 픽업해 마지막 장소로 향했다. 이제 소파만 픽업해서 아파트로 옮겨 정리하면 모든 것들이 끝날 것 같았다. 힘들었지만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마지막 장소로 향했다. 받은 주소로 향하니 다운타운에 아주 큰 고급 아파트 지하주차장이었다. 짐을 실을 수 있는 장소로 이동을 위해 지하 일층으로 내려가는 중간에 사고가 터졌다. 트럭에 뭔가 부딛혔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알람소리가 나더니 아파트 전체에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뭔가 잘못됐다 생각하는 순간 어디선가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급히 트럭에서 내려보니 트럭이 윗부분이 스프링쿨러를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트럭 위에 박힌 스프링쿨러가 터져버렸다.


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폭포수가 되어 버렸고 멈추질 않고 지하주차장은 홍수가 나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운전을 했던 아들은 흠뻑 젖고 거의 패닉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모두들 사진찍기 정신이 없었다. 지하주차장 천정에서는 물이 쏟아지고 바닥은 홍수가 나고 알람소리는 혼을 빼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지켜봐야만 했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소방관 두명이 왔다. 그들이 했을까, 쏟아지는 물은 줄어들었고. 알람은 꺼졌다. 모였던 사람들은 흩어졌고, 어떻게 해결을 할 지 아무 생각이 없는 가운데 온갖 상상을 해야 했다. 트럭은 망가지고, 지하실 전체 스프링쿨러는 대대적으로 망가져 버렸다. 우선은 당장 트럭을 빼야하는데 스프링쿨러의 끝부분 훅이 트럭 지붕에 단단히 박혀 있어 빠지질 않는다. 억지로 빼다간 스프링쿨러 전체가 건물에서 떨어져 나오던가 트럭이 더 심하게 손상이 될 것 같았다.


도와주는 손길이 있었다. 아파트 관리인들이 다수 왔었으나 다 돌아가고 그 중 한명이 끝까지 남아 도움을 주고자 했었다. 트럭지붕에 껴버린 쇠파이프 훅을 빼는 방법은 차 자체를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렇게 하면 스프링쿨러를 다 제거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트럭 타이어를 바람을 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관리인이 같이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럭 사이드에 올라가 흔들기 시작하니 빠질 것도 같았다. 내가 운전을 하고 그 관리인과 아들이 다시 트럭을 흔들기 시작하고 마침내 훅이 빠지며 트럭을 백업해서 옮길 수 있었다. 아들과 난 죽을 것 같던 한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안도를 할 수 있었다. 아들은 관리사무실에 가서 일어났던 일을 상의했고, 연락처를 남기고, 난 여기저기 사진을 찍기 바빴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엔 분명 높이 안내에 대한 정보가 결여되어 있었다. 내가 증거를 남기고 돌아온 아들과 급히 가까운 주유소로 가야했다. 트럭 타이어에 바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급했다. 타이어를 정비하고 U-HAUL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 아들은 트럭을 렌트할때 기본보험을 들었다. 다행히 일을 잘 처리하는 직원과 클레임을 접수했다. 이 일을 처리하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다. 트럭안에는 우리가 픽업하는 물건들이 꽤 있었으나 물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아들에게 이야기했다. 이 물건들 다 버리자. 이것들 볼적마다 괴로운 추억들이 생각나고 한번 이렇게 젖은 물건들은 그전 상태로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고 설득하고 아들도 힘들게 동의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큰 쓰레기통이 있었던지라 아들이 클레임을 하는 동안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내가 처리했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아내와 딸내미에게 연락을 했다. 이미 아들이 스트레스 만땅으로 받은 상태이니 모르는 척하자고. 그렇게 다시 아파트로 돌아온 시간이 오후 2시경이었다. 어제부터 한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녹초도 그런 녹초도 없었다.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식당을 알아보았다. 다시 아파트에 돌아와 밥 먹자고. 내가 딤섬식당을 알아놓았다고 하니 그때서야 모두 허기가 몰려왔다. 아들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차이나타운이 있었고 (예전 실제 부르스 리가 활동했던) 딤섬식당에 도착해 드디어 첫 끼를 기다렸다.


음식을 오더하고 화장실을 갔다오는데 아내를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다. 눈에 눈물에 주렁주렁하다. 생각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잠깐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아들이 동생에게 미안했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모습에 아내는 울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어제 저녁부터 스트레스가 본격적으로 쌓이기 시작하고 우리에겐 직접적으로 불평하지 못하고 애꿎은 동생만 잡고 늘어지더니.. 사실 딸내미는 그런 것들이 어렸을적부터 쌓여 오빠에 대한 원망이 오래되었다. 그래서 오빠를 별로 보고 싶지 않아했었다. 이번에 따라 오겠다고 해서 우리는 대견해 하고 고마와 했었는데, 다시 그런 아픈 추억이 다시 되풀이되고 아파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어제 저녁 아들과 아내가 응급실로 오는 길에 아내가 딸내미가 받고 있는 상처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 했다고 한다. 오늘 하루 아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던지라 어쩌면 무서웠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지도. 그래서 첫번째로 동생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한 것 같다. 딸내미의 마음은 풀렸고, 오랫만에 음식을 먹는 우리 식구는 애틋했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아들과의 관계는 매듭이 지어졌다. 짧지만 너무나 강력했다. 일초일초가 지옥 같았던 어려움을 함께 하며 서로가 의지가 되었던 사건을 지나며 이보다 확실하고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었을까? 가족이라는 것이 막연하게나마 꼭 필요할까? 혹은 곁에 있으면 도움이 되는 수준의 그런 어정정하고 희미한 우려는 아침안개처럼 사라졌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넓고 깊어지고, 존경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가족이라는 그 의미가 손에 잡히는 확실한 사랑으로 모두에게 선물로 다가왔다.


식사 후 아파트로 돌아와 모두 꿀같은 낮잠을 잤다. 잠자리를 다시 배치했다. 아들은 방으로 들여보내 메트레스에 혼자 휴식하게 했고, 아내와 딸내미는 에어메트레스에, 내가 바닥을 청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같은 자리를 유지했다. 바닥에 얇은 담요한장을 반은 깔고 반은 덥고 자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바닥이 너무 배겨서 30분마다 돌아누워야 했지만, 마음은 천국이었다. 모두 코를 골고 자는 것은 음악소리 같았다. (옆에 있던 딸내미는 그래도 내가 코를 제일 많이 골아 못잤다고 불평했지만). 아내의 폰은 마지막날 아침 식구가 사람 없는 해변가를 갇고 있었는데 아내가 아무 생각 없이 패스코드를 쳤는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Lock이 풀려버렸다. 그동안 패스코드가 바뀌없고 아내는 그 동안의 충격으로 옛날 패스코드를 계속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또한 아침안개처럼 해결되어 버렸다. 새 패스코드를 정하고 온 식구들이 기억하기로 했다. 몇 시간 뒤 우리는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에 한국식당을 찾았고, 아들이 자신있게 음식을 주문하고, 마지막 기도로 딸내미가 이번 여행을 잘 정리했다. 공항 터미날 앞에서 동생이 오빠를 힘껏 안아주면서 ‘I love you’ 하며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첫날밤을 지나며 그냥 도망치듯 돌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남은 날들이 악몽의 연속이지 않았을까? 힘든 시간 가운데 숨어 있는 섭리가 들어나게 하는 것은 정말 우리 몫이라는 다짐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백퍼 이루어 낸 이번 기회는 식구 모두가 각자 자기에게 닥친 일들을 자기의 모습으로 충분히 감당해 내었기에, 그리고 우리를 주관하는 창조자의 손길이 온전히 있었기에라고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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