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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 Oct 20. 2022

현대베짱이의 내공은 궁핍으로부터

눈칫밥 먹던 급식이가 퍽킹성인이 되기까지

없는 게 메리트


누워서 볼 영화 찾느라 손가락 까딱거리는 게 기쁨이자 즐거움이요, 침대 밖 세상은 그저 두려운 겁 많고 게으른 베짱이가 그나마 세상에 발대고 기어갈 수 있는 건 내 경우 궁핍함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용감하고 열심이었던 시기는 대학생 때인데, 20대 땐 돌도 씹어먹는다더니 당시엔 코웃음 쳤던 말이 30대가 되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다. 건강한 신체와 발랄한 정신상태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희망으로 바꿔보던 시기


내 용감함은 가난에서 나왔다. 가난이라고 하니 엄청 없어보이기도 하고 좀 멋쩍기도 하지만, 그럴싸하게 명명하자면 경제적 독립이 맞겠다.

그냥 막연히 누구나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실제로 주변에 부모님 돈으로 편히 사는 친구가 적기도 했고 그냥 다들 이렇게 겪어내는구나 싶었다.


등록금 내는 것부터 돈 드는 건 죄다 성인이 되면 으레 헤쳐나가는 거라고 생각해서 별 생각 없었다. 오히려 내 서사를 써내려가는 것이라 여기고 꽤 엄숙하게 그러나 명랑하게 가난과 마주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주중 하루 6시간 씩 알바하면서도 별로 힘든 줄 몰랐다. 당시 시간 당 4,320원 씩 벌었는데 ‘하루에 이 정도 벌었구나. 열심히 하면 더 모을 수 있겠다’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기억에 울컥한다. 20 초반의 나는 절대 모르는 감정이다. 지금도 경제적으로 힘들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나곤 하는데, 당시 마감 타임 일이 끝나고 자정에 퇴근할   지나던  어두운 뒷골목. 도로 갓길 양쪽으로 화물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워져있고 버스도 끊겼지, 할증 붙은 택시비는 시급 까먹기지. 당시 집까지 편의점 하나 없는 인적 드문 길을  씩씩하게 잘도 갔다.


그때 귀갓길에 항상 듣는 노래가 있었는데 ‘옥상달빛-없는 게 메리트’ 라는 노래다. 어쩜 가사도 이렇게 측은하고 힘찬지

드문 드문 가로등 불빛을 목표 지점삼아 어두운 길을 총총 걷다가 마침내 가로등 불빛에 이르면 역경을 딛고 이겨낸 청춘드라마 여주처럼 눈을 반짝이며 씩씩하게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주변을 슥-살피고 조용히 흥얼거렸다.




없는게 메리트라네 난

두 팔을 벌려 세상을 다 껴안고

난 달려갈거야


나는 가진 게 없어 손해볼 게 없다네

난 정말 괜찮아요 그리 슬프진 않아요
주머니 속에 용기를 꺼내보고

오늘도 웃는다
                                              

옥상달빛-없는 게 메리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울컥했던 건


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진짜 솔직한 심정이다. 순진한 건지 의욕적인 건지 그때의 나는 정말 내가 모든 주위 상황을 바꾸고, 남들처럼 그럭저럭 살 수 있게 될 거라 확신했다.


사실 급식비  내고, 학교 운영비 제때   졸업식도   뻔한 10 때를 생각하면 이제 내가  벌어 충당하면 되는데 뭐든 못할까 싶은 감정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초생활수급자도   없어  이래저래 힘들던 시기였고 하필 3   지경이  공부에 지장이…(추가)됐다.^^


힘들다, 불행하다 이런 거 사실 절대 몰랐던 감정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에 모르고, 그러고 싶어서 지나간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이야 ‘이정도 굴렀는데 왜 아직도 이모양일까’ 라고 상심할 가락이라도 있지만, 그땐 막 출발점이어서 벌써 지치고 세상에 뺨 맞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그냥 닥치고 나아갈 때라는 걸 스무살 여학생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요란하지 않게 기꺼이.


그때 그 뭉클한 상황과 감정이 나를 계속 움직이는 것 같다. “그래 나는 씩씩해. 나는 이제 어른이야! 이제 가난과 싸울 수 있는 내가 됐어!” 거의 이 정도다.

소름끼치지만 진짜다.

하지만 여전히 슬픈 사실은 이놈의 사회구조가 아무리 씩씩해도 자꾸 턱에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거다. 남탓 세상탓 안 하고 싶지만 내 탓만은 아닌 것 같아서…


개천에서 용 날 만큼 똑똑하거나 특별하지 않아도 묵묵히, 열심히 살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시기-이런 건 역사책에나 기록될 말이고, 이제 어느정도 경제적 바탕이 있어야 경쟁도 해볼 수 있는 시대다.

그걸 내가 끝내 못 이뤘고, 내 자식은 그런 일 겪게 하고 싶지 않아 결혼 출산도 (현재로서는) 모두 포기다.


갑분 빈익빈 부익부 사회문제 논조가 됐으나 지금 내 심경이 그렇다. 나이들고 쇠약해진 부모님, 덩달아 함께 늙는 나, 매일 이래저래 치이는 날들 속 울컥하고 화도 나고 좀 그런 상태다.


고시원, 6평 원룸을 거쳐 4년 전 한겨울인 28살 11월 서울 변두리 옥탑방으로 이사하면서 ‘언제까지 씩씩해져야 할까’라고 인스타그램에 이사 심경을 남겼는데, 32살 각종 풍파를 겪고 거북이 저리가라 등굽은 처자가 된 지금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하는데ㅠㅠ’하고 조금 울상이 됐다.


이제 거창하게 무언가를 이룬다거나 어떤 명함을 꼭 가져야한다는 꿈보다,

그저 하루하루 잘 버티고 몸 건사하며 지내는 게 행복이고 삶이라고 믿는다.

포기한 게 아니라 조금 유연해진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성공의 다양한 의미를 알게 됐다는 게 맞겠다.

어차피 삶은 계속되고 더 이상의 상심은 장애물일뿐. 결국 그동안의 어려움은 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될 거라고.


노라 에프론은 에세이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칙칙해지지 말자.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자.

크게 소리 내어 웃어라.

먹고, 마시고, 흥겨워해라.
순간에 충실해라.
삶은 계속된다.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말을 되뇌어라.

‘그렇다고 별 수 있나?

여기,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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