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칫밥 먹던 급식이가 퍽킹성인이 되기까지
누워서 볼 영화 찾느라 손가락 까딱거리는 게 기쁨이자 즐거움이요, 침대 밖 세상은 그저 두려운 겁 많고 게으른 베짱이가 그나마 세상에 발대고 기어갈 수 있는 건 내 경우 궁핍함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용감하고 열심이었던 시기는 대학생 때인데, 20대 땐 돌도 씹어먹는다더니 당시엔 코웃음 쳤던 말이 30대가 되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다. 건강한 신체와 발랄한 정신상태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희망으로 바꿔보던 시기
내 용감함은 가난에서 나왔다. 가난이라고 하니 엄청 없어보이기도 하고 좀 멋쩍기도 하지만, 그럴싸하게 명명하자면 경제적 독립이 맞겠다.
그냥 막연히 누구나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실제로 주변에 부모님 돈으로 편히 사는 친구가 적기도 했고 그냥 다들 이렇게 겪어내는구나 싶었다.
등록금 내는 것부터 돈 드는 건 죄다 성인이 되면 으레 헤쳐나가는 거라고 생각해서 별 생각 없었다. 오히려 내 서사를 써내려가는 것이라 여기고 꽤 엄숙하게 그러나 명랑하게 가난과 마주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주중 하루 6시간 씩 알바하면서도 별로 힘든 줄 몰랐다. 당시 시간 당 4,320원 씩 벌었는데 ‘하루에 이 정도 벌었구나. 열심히 하면 더 모을 수 있겠다’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 때 기억에 울컥한다. 20대 초반의 나는 절대 모르는 감정이다. 지금도 경제적으로 힘들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나곤 하는데, 당시 마감 타임 일이 끝나고 자정에 퇴근할 때 늘 지나던 그 어두운 뒷골목. 도로 갓길 양쪽으로 화물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워져있고 버스도 끊겼지, 할증 붙은 택시비는 시급 까먹기지. 당시 집까지 편의점 하나 없는 인적 드문 길을 참 씩씩하게 잘도 갔다.
그때 귀갓길에 항상 듣는 노래가 있었는데 ‘옥상달빛-없는 게 메리트’ 라는 노래다. 어쩜 가사도 이렇게 측은하고 힘찬지
드문 드문 가로등 불빛을 목표 지점삼아 어두운 길을 총총 걷다가 마침내 가로등 불빛에 이르면 역경을 딛고 이겨낸 청춘드라마 여주처럼 눈을 반짝이며 씩씩하게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주변을 슥-살피고 조용히 흥얼거렸다.
없는게 메리트라네 난
두 팔을 벌려 세상을 다 껴안고
난 달려갈거야
나는 가진 게 없어 손해볼 게 없다네
난 정말 괜찮아요 그리 슬프진 않아요
주머니 속에 용기를 꺼내보고
오늘도 웃는다
옥상달빛-없는 게 메리트
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진짜 솔직한 심정이다. 순진한 건지 의욕적인 건지 그때의 나는 정말 내가 모든 주위 상황을 바꾸고, 남들처럼 그럭저럭 살 수 있게 될 거라 확신했다.
사실 급식비 못 내고, 학교 운영비 제때 못 내 졸업식도 못 갈 뻔한 10대 때를 생각하면 이제 내가 돈 벌어 충당하면 되는데 뭐든 못할까 싶은 감정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초생활수급자도 될 수 없어 참 이래저래 힘들던 시기였고 하필 고3 때 그 지경이 돼 공부에 지장이…(추가)됐다.^^
힘들다, 불행하다 이런 거 사실 절대 몰랐던 감정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에 모르고, 그러고 싶어서 지나간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이야 ‘이정도 굴렀는데 왜 아직도 이모양일까’ 라고 상심할 가락이라도 있지만, 그땐 막 출발점이어서 벌써 지치고 세상에 뺨 맞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그냥 닥치고 나아갈 때라는 걸 스무살 여학생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요란하지 않게 기꺼이.
그때 그 뭉클한 상황과 감정이 나를 계속 움직이는 것 같다. “그래 나는 씩씩해. 나는 이제 어른이야! 이제 가난과 싸울 수 있는 내가 됐어!” 거의 이 정도다.
소름끼치지만 진짜다.
하지만 여전히 슬픈 사실은 이놈의 사회구조가 아무리 씩씩해도 자꾸 턱에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거다. 남탓 세상탓 안 하고 싶지만 내 탓만은 아닌 것 같아서…
개천에서 용 날 만큼 똑똑하거나 특별하지 않아도 묵묵히, 열심히 살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시기-이런 건 역사책에나 기록될 말이고, 이제 어느정도 경제적 바탕이 있어야 경쟁도 해볼 수 있는 시대다.
그걸 내가 끝내 못 이뤘고, 내 자식은 그런 일 겪게 하고 싶지 않아 결혼 출산도 (현재로서는) 모두 포기다.
갑분 빈익빈 부익부 사회문제 논조가 됐으나 지금 내 심경이 그렇다. 나이들고 쇠약해진 부모님, 덩달아 함께 늙는 나, 매일 이래저래 치이는 날들 속 울컥하고 화도 나고 좀 그런 상태다.
고시원, 6평 원룸을 거쳐 4년 전 한겨울인 28살 11월 서울 변두리 옥탑방으로 이사하면서 ‘언제까지 씩씩해져야 할까’라고 인스타그램에 이사 심경을 남겼는데, 32살 각종 풍파를 겪고 거북이 저리가라 등굽은 처자가 된 지금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하는데ㅠㅠ’하고 조금 울상이 됐다.
이제 거창하게 무언가를 이룬다거나 어떤 명함을 꼭 가져야한다는 꿈보다,
그저 하루하루 잘 버티고 몸 건사하며 지내는 게 행복이고 삶이라고 믿는다.
포기한 게 아니라 조금 유연해진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성공의 다양한 의미를 알게 됐다는 게 맞겠다.
어차피 삶은 계속되고 더 이상의 상심은 장애물일뿐. 결국 그동안의 어려움은 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될 거라고.
노라 에프론은 에세이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칙칙해지지 말자.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자.
크게 소리 내어 웃어라.
먹고, 마시고, 흥겨워해라.
순간에 충실해라.
삶은 계속된다.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말을 되뇌어라.
‘그렇다고 별 수 있나?
여기,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