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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종 종Mu Aug 05. 2023

아임쏘리

남해 7백년 비자나무 아래서

#.

남해 어디쯤이라고만 해 주자.

오래된 비자나무 그늘 아래였다.

작은 마을에 모처럼 행사가 열려 낮부터 구경거리가 있었다.

무덥긴 했어도 먹을 것도 차려지고 이장님도 나오고... 외지에서 모인 사람들도 점잖아서 지켜보기 괜찮았다.

아직 해는 쨍쨍한데 길이 멀다고 떠나는 사람들, 남고 싶다고 미련을 두느라 서성이는 사람들, 행사 끝난 마당에는 의자 반 사람 반이었다.


#.

비자나무 아래는 바람이 잘 들었다.

특히 마을 길이 행사 마당으로 꺾어지는 그곳이 바람 자리였다.

아직 떠날 생각이 없는 외지의 여자가 동네 터줏대감 격인 ○○ 여사와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중이다.

첨엔 바람 얘기 동네 얘기더니 이젠 할머니네가 터줏대감이 된 내력이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치를 때 이 섬에 처음 정착한 집이여.


#.

"영어로 뭐라고 해야 맞는겨?"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익스큐즈미? 실례합니다?"

터줏대감 ○○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그럼 뭐라고 하셨는데요?"

"아임쏘리, 이러니까 노랑머리 청년들이 오케이 하면서 길을 내주더라고!"

○○여사님의 하와이 원정담이다.

소학교ㅡ지금의 초등학교 학력으로 하와이에서 영어 한 마디로 길을 열었던 긍지가 목소리에 배어있다.

"저쪽에서 일본말이 들리는 거여. 그래서 일어로 끼어들었더니 일본 사람들이 반가워하며 어쩌면 일어를 이렇게 잘하냐고..."

소학교 때 배워둔 일어실력이 빛을 발했을 때, ○○여사는 늦게라도 하와이 구경 오길 너무 잘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

아들이라고 했다.

함께 산다고.

옷차림으로 보아 농사일이나 장사꾼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행사를 맡으신 어른이 안에 있으니 인사하고 오게나."

두말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여사님 아들.

잠시 딴 데를 보다 앞을 보니 아들이 엄마를 카메라 렌즈에 담고 있다.

낮에 얻은 잡지를 펼쳐 읽고 있는 어머니.

아들의 초점에 존경과 사랑의 존재가 있었다.

비자나무 바람자리로 저녁 어스름이 흘러드는데, 역사 이래로 온기로 맺어진 모자의 한 전형이

또렷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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