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芦原) 역을 지나며

억새풀 나부끼던 들판 위에서

by 새벽종 종Mu
4호선 노원역 플랫폼


노원역이다.

7호선에서 내려 4호선 전철로 갈아타려고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통로 양 옆으로 유리창, 나는 걸으면서도 연신 상가 쪽 창 너머를 기웃댔다.

아슴푸레하다.

여기쯤의 뒤던가... 아닌가?

23,4년 전, 아이를 낳고 살던 고층아파트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주했던 아파트 동 건물들은, 도로에 바짝 붙은 상가 빌딩들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아이를 낳은 일 말고도 노원역이 떠올리는 몇몇 옛사람들. 그중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지금은 연락을 끊다시피 지내는 이도 있다.


HE(SHE) IS NOTHING!


'별'이란 여학생이 있었다.

쓰촨 청두에 살 때 자주 만나던 여대생이다. 그 아이는, 사귄 지 오래되어 정이 들대로 든 남자 친구가 하나 있는데, 태도가 상쾌하지 않을 때가 있다고 가끔씩 나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나이 든 사람의 직관으로 판단하자면, 별이 남자친구란 그놈은 절대 별이하고 엮여선 안 될 놈이다.


그런데 인연이란 게 뭔지, 한참을 끌다가 헤어졌다. 그리고는 별이가 하는 말.


...그 남자가 아는 체를 했어요. 아이가 엄마에게 저 아저씨 누구냐고 물어요. 그때 여자가 아이한테,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걸어가요. 아이 손을 잡고요.


영화 이야기였다.

거리에서 여자와 우연히 마주친 남자는, 여자가 한때 떠들썩한 스캔들을 돌보지 않을 만큼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였다. 그러했기에, 남자는 여유작작 다시 아는 체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그는 이미 아무 존재도 아니다.

"HE IS NOTHING."

(*별이가 말한 대사는, (미국영화)"Painted veil"(2007)에 나온다고. 서머셋 모옴의 소설을 각색하여, 배우 나오미 왓츠와 에드워드 노튼이 주연한 영화다.)


사실, 노원역에서 별이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지난 일들이 스윽스윽 스쳐갔다. 노원역 7호선에서 4호선 플랫폼으로 오는 환승통로를 걸으며 스쳤던 지난날...그때 내 곁에 머물고자 했던 사람들, ㅡ형형색색으로 꾸민 사람들의 '자기본위'가, 내게는 대체로 인간적으로 받아줘야 할, 진지하고도 유쾌한 어떤 마음작용으로 비쳤던 바...이렇게 시간의 거리만큼 세월이 여과한 잔해는 결국 먼지보다도 못한, 진심이 1도 없는... NOTHING.

한때 노원역 근처에 살았으면서도 그곳이 원래 억새풀 은빛 갈기 나부끼던 들판이었다는 걸 생각해 본 적 없다.

부유하는 먼지보다도 가벼운 걸, 사람의 마음이라 여겼던, 노원역의 시간.


'노원'이란 지명의 한자를 본다.

와 原.

芦,억새란 이름의, 가을이면 은빛 갈기가 햇살에 흔들리는 풀.

原,그 풀들의 평원.


그런 들판이었던 적의 노원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이, 살았고 괴로웠고 그리고 떠났고, 오늘 지나치는 중이다, 나는.


전철은 노원역을 떠나 창동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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