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특별한 '무드'
도서관 고양이 "듀이"와 흰 운동화
생각보다 외출할 일이 잦았던 지난 두 달.
찬비가 밤새 내리던 날, 달력을 보았다.
바깥으로 나도는 일은 얼추 마감된 것 같아.
겨울답게 방안에 칩거해 볼까.
외출에서 돌아온 저녁새삼 방 안을 둘러본다.
유리창, 맞아 한지를 사다 놓고 몇 주나 지났네... 지금 작업할까.. 한지로 커튼을 대신하려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지났다. 그래도 상관없다. 더구나, 늦가을 빗소리가 월동 준비를 재촉하는 듯하니...
자그마한 집인데, 막상 방한을 대비하려니, 유리창이며 새시문이며 손 볼 데가 많았다. 있는 재료와 내 작은 키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최선을 다한 새벽. 그리 신박하진 않지만, 내 힘으로 겨울을 대비했다는 뿌듯함.
책상에만 앉아 있을 수 없잖아.
일부러 주방 바닥에도, 남은 방한 스티로폼으로 대충 방석 하나 만들어 깔아 주었다. 방이 답답하면 여기 쪼그려 앉아 커피도 마시고 전화도 하고...
거실창에도 한지 한 겹, 부염한 게 마치 밖에 흰 눈이 내리는 것 같다.방 안 유리창도 주방이 거의 다인 거실 유리창도 희무름한 한지를 한 겹씩 입히니 그만큼의 고요함이랄까, 안정감이 생성된다. 눈앞에 선한 실내 풍경.
이렇게 며칠 지나면 겨울이 오고,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문서를 작성하고 있겠구나.
그러나, 비 그치면 한결 추울 거라더니, 아직은 낙엽 지는 가을. 잔잔바리처럼 반나절 외출은 여전하고, 그런 날은 책상에 정식으로 앉기가 겁난다. 그런데 때마침 토요일, 핑계 김에 주말을 맞은 셈이랄까.
내가 쓴 논문 어느 부분의 열정에선 또다시 맘이 끓어오르는데, 작은따옴표 자리에 큰 따옴표, 마침표 자리에 쉼표... 오늘은 이 번거로운 교정을 마칠 수가 없겠구나. 일찌감치 접고, 영화라도 볼까, 소설책 한 권을 읽는다던지... 토요일 저녁다운 소망을 소망해 본다.
주방 구석에는 올가을에 손에 집히는대로 모아온 책들, 이웃집 할머니가 와서 보고, 댁은 책하고 노는구랴, 내 대신 한숨을 쉬고 가다.그러다 영화는 딱이 떠오르지 않고, 소설책은 지난달에 사다 놓은 게 몇 권 있는 바, 아직 첫 장도 안 읽은 "듀이"를 집었다. 처음엔 미국의 사상가 듀이에 관한 책인가 했다. 겉표지를 자세히 보고서야 실제로 있었던 듀이라는 고양이를 기록한 소설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래서 망설임 없이 골라든 책이었다.
미국, 한겨울 매서운 추위 속에, 평원의 한 읍내 도서관에 버려진 아기 고양이ㅡ 사서들은 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사랑스럽고 침착한 아기 고양이를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었다... 소설은 이렇게 고양이를 들여 넣고 그 풍경 속으로 경제위기를 겪은 읍의 주민들이 어떻게 삶과 조화를 이루고자 분투해가나를 묘사해가려고 한다.
누가 이 고양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양이와 교감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책 속의 이런 구절이 와 닿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밑줄을 긋기까지 한다. 듀이가 하는 짓이 자꾸 오래전에 길렀던 '모모'와 '복이'를 떠오르게 해서, 그 귀여움, 영특함 하나하나가 기억나서...
늦은 밤. 고양이 생각을 하다가 책을 엎어놓고 잠자리에 눕는다. 자장가 삼아 유튜브의 낭독을 취(取)해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느지막한 아침, 일요일이다.
휴대폰에 지난밤 켜 두고 잔 낭독 화면이 정지되어 있었다.
노벨문학상 작가 '펄 벅'의 "어머니".(*소설 번역본은 "삼 남매의 어머니"라는 제목이다. )
이어서 다음 편을 켜 본다.
중국의 농가, 눈먼 딸을 산간 마을로 시집보내는 어머니. 사실 이 어머니의 맘 같았으면 그냥 같이 살고 싶은데, 입을 하나라도 덜자는 아들 부부의 실리주의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떠나간 딸이 안타깝고 그리워 모처럼 나귀를 타고 딸이 산다는 산으로 올라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죽어있는 딸. 추측컨대, 인심이 각박한 데다 열악한 환경 속에 굶주려 병사한 것이리라...
봉건사상이 뿌리 깊은 농촌에서 무책임한 지아비로 하여 과부 처지로 삼 남매를 키워낸 농가의 여인이지만 그 어머니는 나름 다정하고 지혜롭고 당당한 면이 있었다. ( *2020년 서울 하늘 아래서 휴대폰 소리도 아들 눈치가 보여 아무도 없을 때 얼른 눌러본다 하는 내 어머니에 비하면 말이다.)
너희가 내 딸을 죽인 거냐, 호통을 쳤지만 예의도 모르고 사납기만 한 산촌의 사돈네들이 오히려 떼로 덤벼들까 봐, 그래서 노모를
모시고 간 아들마저 위험해질까 봐, 서둘러 산을 내려오는 어머니...
슬픈 어머니.
"엄마하고 똑같은 신이야."
공원의 벤치, 한 할머니가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는 걸 아이가 발견하고 소리친다.
과연!
아이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나는 할머니와 마주 본다. 벤치의 할머니도, 가벼운 맛에 학생들 교실용 실내화를 신고 걷고 있는 내 발을 보며 미소 짓는다.
그렇게 사귄 동네 할머니.
"나오셨어요?"
공원을 가로지르다 가끔은 나란히 앉아 보기도 했다.
흰 운동화를 신은 할머니에게도 딸이 있었다. 중매쟁이 말만 믿고 혼인을 시켰는데, 흉악한 시집살이에 굶는 설움 말 못 하고 자살해 버린 딸이 하나 있었다. 그 얘기를 (남은 자식들도 듣기 싫어라 하니) 가슴에 숨기고 살아왔는데, 어쩌다 내게 다 털어놓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이던, 슬픔에 절은 할머니의 그 표정 잊을 수 없다.
공원 옆 미황색 단독주택에 세 들어 살면서, 나는 이렇게 마음 아픈 어머니도 만났던 것인데... 분명 21세기 초엽에 직접 들은 실화이건만, 요즘 청년들에게 말하면 옛 전설로나 여길 것이다.
지나치게 슬픈 삶은 옛날이야기겠거니 멀리 밀쳐 두지만, 여기저기 숨은 눈물자국, 사실은 바로 어제 새로 깊게 패여진 것들이다.
우리의 삶 터.
눈물 젖은 빵.
흰눈 내리는 겨울밤의 적요와 같은 아늑함(*흰 눈이 내리면, 이 적요한 방 안의 한 여자는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지도.... 창 너머 풍경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받아 적으며 밤을 새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