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보다?

타인의 신음소리에

by 새벽종 종Mu

고통체감계에 0과 10이란 숫자만 있다고?


10의 고통에서 사람들은 변혁을 시도하며 행동을 한다. 혹시 1의 정도에서 고통이 가져온 변화 같은 것을 인지는 했을지 모르지만, 점점 그 강도가 세져도 그 정도가 7이 되고 8이 되고 9가 되어도 느낌이 없다. 때문에 1에서 9는 생략, 0과 10만 있다.


10이란 수치 전엔 아무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공포와 두려움만 있을 뿐. 무감한가, 무능한가, 어떤 안주(安住), 혹은 타협... 주위에서 합리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로 아무리 권해도, 10이란 고통의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 그곳을 떨치고 일어서게 되지가 않는다. 10에 차오른 지점에서야 그동안 1이 2가 되고 9.999에 다다라도 아무 일도 아닐 거라 부정하느라 아무 숫자도 표시하기를 꺼리던, 그래서 내내 0을 가리키고 있던 바늘에 놀라서, 스스로 고통의 속박에서 한 걸음 성큼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체감계"에 대한 어느 의사의 설명을 내 식으로 옮겨 쓴 내용이다.

10이란 매우 주관적 숫자이고, 0 다음에 10일뿐이란 그 바늘 주기도 선뜻 이해가 안 가지만, 어떤 괴로움이 밀려올 때 사람들이 일정 기간 주위에 표현할 의지도 잊은 채 무감한 상태로 그저 견디는 경우를 보게 되는 건 사실이다.


우인이 그걸 곁에서 지켜본다면 분명 마음이 답답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고통에 맞서 훌륭하게 항거, 승리를 이뤄낼 주체는 주위 사람이 아닌,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그 자신이기에, 우리는 운명의 태풍에 휘말린 주인공이 혼란 속에서 걸어 나올 순간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믿고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한다. 방관이 아닌 존중, 이것을 능히 할 줄 아는 우인이 되어야 한다. (*위의 고통체감계 1과 10에 대한 정의의 출처, 다큐소설 "듀이"(2009), 웅진싱크빅 출판사, 122쪽)

얼굴, 둘일까 하나일까ㅡ대학로

그렇다면 고통의 당사자와 대화하는 경우라 치고, 다음 인용을 고통 체감이 1에서 9 사이인 현재형 시제로 읽어보자.


"... 그 시절의 내 인생은 너무나 '복잡'했고, 모든 것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중심'을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인용, "듀이" 138쪽, 따옴표는 필자의 임의로 붙임)


이토록 내면에 혼란을 느끼는 여성이, 운명에 흔들려 금방이라도 붕괴될 것처럼 흔들리는 여성이 있다. 그런데 그녀가 실은, 보수적인 시골의 농가 출신으로 가장 불행한 속에서 대학공부를 결단하고...ㅡ4년제 대학공부를 결단한 이 시점이 10의 지점에서 새 인생에의 출발이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버리고 맞는 일을 찾아내는 용기를 지녔으며, 누구보다도 주변과 사회를 위해 스스로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 찾아내 추진했던,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 인간적 온기를 불어넣은 도서관 관장이었다는 점. 이후 그녀가 이룬 외적 성취를 덧붙이지 않으면, 그녀의 불안한 내심만을 엿보고서 사람들은 이 여성의 '불행한 상황'을 중심으로 제각각의 상상을 할지 모른다. 여자가 장래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하거나, 상투적인 동정이나 위안으로 대화를 마치거나...


그러나 언어에 민감한 사람은 알 것이다. 그녀의 용어 속에 무엇이 고통인지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그 고통들이 바로 그녀의 소망과 직결된다. 즉 동전의 양면이다. 다시 말해, 그녀가 고통스러워한 다음 세 가지 언어는, 그녀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암시하는 힌트이기도 하다.


1. 복잡해진 상황:계획성 있고 예측할 수 있는 정돈된 삶을 원한다.

2. 무너질 것 같음:건설, 수립, 안정을 원한다.

3. 중심을 잡을 수 없음:중심을 잡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살고 싶다.

이쁘고 알록달록한 양말들이 떠들어대는 듯, 발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느냐고.

타인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그 속에 고통과 소망 이 함께 엉겨져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상대가 지금 몹시 고통스러워한다는 현상에만 치우쳐서 그 자의 미래를 함께 상상해주기가 힘들 것이다.


이를 보완하려면, 그 사람이 내심을 토로하는 것과, 그가 따로 밝히지 않은 객관적 사항들을 균형감 있게 절충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그러나 객관적인 인적사항을 안다고 그쪽을 너무 중시하면, 진정한 교감이나 진심의 우정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커 보인다, 사람이-홍익대 분교건물(대학로)

여기에 궁극적으로 올바른 인간관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을 과연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


"법화경"의 가르침 속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은, 고통의 신음소리를 진리를 구하는 소리로 받아들였다. 마치 산 정상을 향한 등반 중 누군가가 물자 부족이나 부상 치료를 원하면 그것을 신속하게 지원해주어 기운을 차리고 다시 등산을 할 수 있게 하는 산악 구호대에 비유할 수 있을까. 정상에 도전 중인 등산가를 지원하면서 아무도 그를 무시하거나 과보호하지 않는다. 그처럼 보살은, 누군가가 도와주세요! 소리쳐오면 , 그 SOS가 모두 다를지라도, '생명이야말로 최극의 존엄'이라는 각도에서,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원만한 인격체로 성숙해가고 싶은 갈앙의 표시로서의 SOS로 알아들였던 것이다.


"慈眼视众生 福聚海无量"

(*음:자안시중생 복취해무량, "법화경"에서)

'자비의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니'ㅡ 이 구절이야말로 중요하다. 자비의 눈은 동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본래 훌륭한 인간이다. 스스로 그 점을 알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ㅡ고 보는 눈이다.

퐁당 빠져보고 싶은 어떤 눈

그래서, 결핍이나 괴로움 때문에 보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 모두를, 본질적으로 성장을 지향하고 있는(진리를 향해 구도하는) 인간이고 그 과정이라는 일점으로 평등하게 받아들였기에, 그렇게 출발한 구제(救济) 행동이기에, 관세음보살은 어느 누구에게든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가 보다 인격적으로 성장하게끔 조력 내지는 인도해 주는 역할 정도에 만족했고, 절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욕심내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껏 전해지는 '관세음보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보살의 도움에 마음 상쾌해져서 이제부터 더욱 분발하자고 명랑한 전진을 결의하고 일어섰던 것이다.


사실, 관세음보살의 '관세음'의 뜻은 '관'

(观,보다) 과 '세음'(世音,세상의 소리), 즉 널리 세음을 관하다로, 사람들의 소리에 곧바로 반응하기 위해 진지하게 지켜보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 여기서 '보다'는 즉 '듣고 응하다'란 자식을 자애하는 어머니와 같은 상냥함이 함축된 동사이다.


어머니와 같은,이라면...나만 이러는 게 아닐 것이다. 눈앞에 성모 마리아상을 떠올리는 건.

작아보인다, 사람이

나는 의사, 너는 환자.

나는 상담자, 너는 피상담자.

나는 복지사(혹은 봉사자), 너는 수혜자.

이렇게 나눠놓고서 너 가는 길 나 기는 길 어차피 다른 거라고 할 텐가. 그러다가 당신이 병이 들면, 도움이 필요하면? 당신이 행복하건 불행하건 상관없이 타인에게서 받아 마땅한 시선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지금 당신이 타인을 대하는 시선에도 장착되어 있어야 마땅하리라.


모두가 구도자, 인생은 구도의 길.

인류로서 함께 인간의 길을 걷고 있다ㅡ종교, 무종교를 떠나서 인간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 인식이 보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공감이 강조되고, 각종 치유며 상담이 우리 사회의 낯익은 활동으로 대두되고 있는 요즘, 여러 방면에서 그 일을 담당하고 나서는 직업인들이나 종교인들, 혹은 가족이나 이웃관계 속에 자기도 모르게 상담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도 주위에 늘어나는 추세다.


타인의 고뇌에 경청하고 함께 해결 방법을 의논한다. 이 과정은 결국 대화이고 또, 마음과 마음의 신뢰가 우선일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고 용기를 주고 싶어 나서는 행동

은 참으로 존귀하고 아름답다. 그야말로 인간다운 행위이다.


그러나 혹시 그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출발이 '선무당'식의 위험성을 내포하지는 않았는지,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 털고 일어날 사람을 오히려 편견과 차별로 가두는 건 아닌지... 대화나 상담 이후의 이런 부작용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또 상담 자체만 보아선 나름 좋은 결과를 얻어서, 그 성과에서 얻은 지혜를 넓히고자, 여기저기에 자신의 상담 사례나 자신의 상담 관련 지식 등을 알려가는 사람들. 인간사회에 이타적 활동을 확장해가는 차원에서 대체로 환영할 일이나, 게 중에는 전문 지식과 경험은 있어 보이나 타자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언사로 하여 걱정을 시카는 이들도 있다. ( * 정신심리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아서일까. 영상을 통해 이혼 사례를 들어주며 뭔가를 강의하는 변호사님들 중에 일종의 희화화랄지, 배려심이 안 보이는 경우 같은. ) 그러한 몇몇은 타자에 대한, 타자가 겪는 고통을 사례로 나열하기 바빠서, 그 고통을 겪고 있는 혹은 방금 전에 겪어낸 당사자의 인격에 대한 배려를 망각하는 듯하다. 혹은 애초에 고생이란 걸 전혀 모르고 자라서, 자신의 단조한 세계 외에는 모든 고통을 벽 너머 타자의 것으로만 여긴 탓일 수도. (*여기서 잠깐. 어린 친구들은 사회인이 되도록 아무런 노고도 괴로움도 없이 살았다는 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꽃길만 밟았다는 자랑으로 여길지 모르나, 이는 학생이 학교는 졸업했는데 가장 중요한 걸 배우지 못한 것처럼 삶의 부피에 비해 진짜 질량이 채워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정신세계는 어딘지 단조롭다. 아닌 말로, 정말로 자신이 가진 환경 조건이 좋다면, 그만큼 세상과 사회를 위해 뭔가 유익한 실천에 도전하면 어떨지... )


물론 좋은 맘이 좋은 끝을 창조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지만, 어쨌든 주변 여기저기 존중을 모르는 편견 위에 서서 공감과 치유를 아무렇게나 말하는 인간군이 보이매 나는,... 과연 그들이 품고 있는 궁극적 인간관은 무엇인지, 고통이란 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가끔은 그 속이 궁금해진다.


보석의 하나인 진주는, 진주조개에 상처가 있음으로써 그 위에서 빚어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원해서든 아니든 나보다 힘든 일을 겪으며 사는 사람과 마주칠 때는, 맹자(孟子)의 다음 가르침을 떠올려 볼 일이다.


"하늘은 한 사람을 큰일을 감당할 만한 인물로 단련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연속적으로 그의 의지를 시험하며 시련과 고통을 안기는 법이다."(*통해)


나보다 그의 괴로움이 커 보인다면, 그의 사명이 나보다 큰 것이고(아무리 좋게 봐도 전혀 사명과 무관한 그런 문제도 있겠지만 일단 사람은 존중하자는 뜻에서 강조), 그는 곧 반드시 넘어진 자리에서 땅을 짚고 일어설 것이니, 우리는 잠시라도 그와 마주쳐 그에게 땅을 대신할 무언가를 전해줄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해도 된다.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땅히 할 일을 다했다면,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르는 그의 발걸음에 박수를 쳐주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도 한 자리에 계속 멈추어 있을 수 없는 바, 타자에 대한 어떤 구제 행위(봉사)도 사실은 너를 도울 수 있어서 나도 행복했던 것이었음을 인지하고, 우리 각자의 길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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