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의 추억

아버지의 꽃밭

by 새벽종 종Mu
구름 가족,원래 7명으로 이루어졌던 우리 가족 같아

언니는 중3, 나는 초6.

아버지가 귀향을 결정했을 때, 우리의 학령(學齡)이었다.

다들 도시로 얘들을 못 보내 야단인데, 굳이 시골로 전학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은 엄마의 주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귀향은 반쪽 귀향, 즉 우리들 없이 부부 두 사람만의 농촌생활이 되었으니, 엄마는 귀향 자체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한 채 마지못해서 아버지를 따랐던 게 분명하다.


부모님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니, 이듬해부터인가 가족이 먹는 곡식이나 열매식물은 자급자족이 되었다. 학생인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그 먹을거리들을 날라왔다. 갈 때는 빈손으로 가는데 다음날이면 얼추 쌀 반 포대라든지, 고구마라든지, 오이, 옥수수, 밤 같은 것을 양손에 무겁게 들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때는 그게 고마운 줄 몰랐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쌀이 어디서 나는지, 한 포대 반 포대가 얼마나 무거운지 조금도 모르다가, 갑자기 그런 걸 들고 나르니 무겁고 귀찮은 일로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런 짐꾸러미 때문에 엄마하고 아버지는 안 해도 좋을 말다툼을 벌이는 걸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보따리 두어 개를 비료 봉지ㅡ당시 비닐 재료 중에서 비교적 두꺼운 편이다.ㅡ나 골판지 상자에 넣은 다음, 칡덩굴 끈으로 꼭꼭 동여맨다. 그걸 보고 엄마는 '칡끈'은 너무 과장된 포장이라고, 보다 일반적인 끈으로 바꾸라고 한다. 그럼 아버지는 버스 안이 비좁거나,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 행여 끈이 풀어질까 봐, 일부러 칡끈으로 묶어준 것을 왜 바꾸자 하느냐고 역정을 낸다. 그럼 엄마는, 애들이 그걸 들고 도시로 가는데 칡끈이면 너무 흉해 보이지 않겠냐며, 자신의 의견을 접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칡끈짚끈으로 혹은 비닐끈으로 바뀌었는지, 혹은 원래 그대로였는지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리고 매번 똑같은 풍경일 리 없지만, 나는 그런 날의 시골집 마당 풍경을 그림을 그려도 되리라.


섬돌에 얹힌 식량 보따리, 그것을 버스 정류장까지 짊어다 주려고 그 앞에 받쳐놓은 아버지의 지게, 혹시 빠트린 맛있는 게 더 있지 않을까, 다시 이것저것 작은 봉지들을 꾸려서 충분히 가득해진 짐 상자 속에 낑겨넣기 바쁜 엄마의 잰 움직임, 풍경에 담기는 것은 늘 먹먹한 기분이다. 지난 밤만 해도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반가움으로 넘쳤던 지붕밑이다. 화목함, 가족들이 모여서 내품을 수 있는 온기와 평화 같은 것이 바로 직전까지 존재했다면, 우리가 들고 가게 될 식량꾸러미가 나타남으로써 그 모든 좋은 것이 사라진다. 정말 싫다. 저 놈의 보따리만 아니었어도!


그런 떠넘김은 어쩌면, 부모가 직접 농사를 지어 그 수확한 것을 자녀에게 먹이는 보람과 기쁨 같은 것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탓일 수 있지만, 그때의 나로선 먹을거리 안 주어도 좋으니 제발 웃으며 배웅해달라고, 부모 양쪽에 요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 그림 속의 엄마와 아버지, 딸의 표정은 모두 뭔가 조금씩 불만이 있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십여 년만의 농사일이니 두 분도 나름 과도기였고 자녀와 떨어져 지내는 생활에 심리적 적응도 필요했을 터였다고, 지금은 거기까지 헤아려지는 바이지만, 십 대의 언니와 나는, 매달 한 차례씩 그리운 마음으로 고향의 막을 열었다가, 결말 부분에선 언제나 사소한 이유로 부부싸움을 벌이는 부모님을 보아야 하니, 가기만 하면 볼 방법이 없으니, 시골국도에서 뒷좌석이 쿨렁거리면 신나던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선언하고부터, 아버지 당신이 줄곧 강조해오던 농촌 생활 예찬이 더 이상 소녀를 감동시키지 않았다. 소녀로서의 비실제적인 동조였는지 몰라도, 처음에 나는 아버지가 귀향함으로써 실현할 뭔가에 낭만적인 기대감 같은 것을 얹었는데, 그 기대감이란 풍선에서 부푼 바람이 다 빠져나간 것이다. 직역하자면, 아버지가 딸인 나를 많이 '실망'시켰다는 뜻이겠지.


초6, 열두 살 내 귀에 닿은 아버지의 설득을 액면 그대로 전하자면, 이 세상의 수많은 직종 중에서 농부란 직업이야말로 진실로 가치 있고 신성한 것이고, 농촌에서의 생활 내용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 추구해야할 행복의 필수 요건이었다. 그러나 농사일의 고됨을 엄마보다 더 불평하고, 노인들만 남겨진 마을을 누구보다 못 견뎌한 것도 아버지였다. 굳이 아버지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원인을 찾자면, 엄마의 교육열이 문제의 원인이었을지도? 아버지의 귀향은 원래 반쪽 귀향으로 시작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는 땅을 일구는 것에보다 '농촌마을에서 온 가족이 오손도손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을 실현하는 것에 귀향의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나중 얘기지만, 농가에서 십 년쯤 버티다 결국, 서울 자녀들 곁으로 이사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족이 모여 살 수 없다면 그곳은 더 이상 이상향(理想鄉) 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선 또 중산층(?) 능력으로는 감히 꿈도 못 꿀 전원생활의 운치가 아쉽기만 하다. 운치가 없으니 아버지 본연의 개성도 죽는다. 이런 딜레마에 빠진 아버지의 노년을 지켜본다는 것은, 딸로서 실망이라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모든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는 법인지, 어느 겨울 휴가에 내 발길은 저절로 아버지의 시골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생전에 서울로 이사하면서 남에게 팔아넘겼다고 들은 그 시골집. 그리고는 가 본 적 없으니, 대략 30 년만의 발걸음인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잘못 찾아온 건가... 많이 낯설다. 그렇긴 해도, 마을 입구라든지 들판 끝의 산등성이 등은 옛 기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오랜 세월 계절풍에 의지해 농사를 짓던 벼 위로 비닐하우스가 빽빽히 세워진 것이, 이제 이곳도 전통의 농촌을 버리고서라도 나름의 돈벌이 경작을 추구해야 하는 이 시대의 살림터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마을 하나를 다 지나 밤나무가 자라는 비탈진 언덕을 왼쪽으로 끼고 산모롱이를 돌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오고 바로 거기에 아버지의 시골집이 있다. 이 작은 마을은 30년 전에도 폐가를 하나 품고 있더니 그 폐가를 그대로 안은 채 30년 후의 나를 맞는다. 폐가를 지나서 보이는 지붕, 예전 우리집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일자 지붕에 마당으로 열린 구조였던 옛집의 시원한 맛은 온데간데없다. 대신 눈앞에 담장과 지붕과 차양과 비닐하우스로 그늘 뭉떵이 같은 집이 있다. 울컥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 이렇게까지 변했을 줄은 모르고, 원래는 혼자 생각을 굴렸었다. 도착하면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살펴볼 수 있으려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다.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가 애써 가꿔놓았던 운치가 다 없어졌구나.


지체 없이 발길을 돌리자 해도 미련이 남는데, 아는이도 없는 동네. 다른 농가를 기웃거릴 수도 없고, 아쉽지만 마을을 빠져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옛집을 떠올린다.

예전엔 낮은 흙담에 텃밭을 끼고 대문이 열려있었는데. 방문을 열고 나와 마당에 내려서면 들로 펼쳐진 풍경이 시원하게 들어왔고. 마당 한 켠으로 우물이 하나 있었지. 우물가에 그리 크지 않은 석류나무가 있고, 그 석류나무에서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담장 끝까지 밭이었지. 모란꽃도 거기 심겨 있었어.

모란꽃을 그리다

아아, 그래 모란꽃.

그것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었다.

시골집에서 모란꽃을 처음 본 것은 고2, 5월이었다.

이렇게 뚜렷하게 달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 내가 시골집에 간 사연이 조금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수학여행 참여를 신청하라 했던 막바지 주간이었다. 그해의 수학여행지가 멀리 제주도로 정해지고, 수학여행비가 그만큼 비싸졌다고 했다. 처음부터 부모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비용 액수로 봐서, 어쩐지 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정말 안 가느냐? 단짝이 섭섭해 하면서 재차 물어오니까, 그래, 정말 내가 수학여행을 갈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나 해 보자. 하고 시골집에 달려왔던 것이다. 그날은 그러니까 충동적인 시골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리 진지하지 않게 큰일은 아니라는 식으로 수학여행이 있다고 말했을 것이고, 부모님은 듣자 하니 공부와 상관없는 활동 같으니, 크게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그럼 꼭 해야 되는 거 아니지,라고 되물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정도로 대답을 듣고, 나는 학교가 있는 나의 도시로 돌아왔을 것이다.

모란꽃에 처음 색을 입히다

그런데, 떠나오기 직전에 석류나무 뒤쪽으로 활짝 피어있는 모란꽃을 본 것이다.

처음 보는 꽃인데, 꽃송이도 풍성한 데다 진붉은 꽃빛은 또 얼마나 곱던지, 아버지에게 꺾어달랬다. 아버지는 작약이라 했고, 내가 꽃을 들고 걸으면서 마주친 사람들은 모란이라고도 목단이라고도 불렀다. 꽃이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나는 꽃다발을 가슴에 안은 채로 국도변을 걷는다. 늘 버스를 타는 정류장을 지나 두세 정류장까지 내처 걷다가, 시간상 그렇게 하냥 걷기만 할 수 없어 저수지 둑방께에서 차에 올랐다.

마치 꿈길을 산책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그날 나는 모란으로하여 아름다움과 고귀한 기품을 얻은 것마냥, 혼자서 흙길을 걸음에도 마치 귀족 아가씨나처럼 자긍심이 곧추 세워진 등으로, 모란꽃에 대해, 꽃을 든 나자신에 대해 도취와 같은 만족을 느꼈다. 수학 여행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이러면서 말이다.


5월의 그 날은,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활짝 핀 꽃송이만으로 마음을 온전히 채우고,하루를 꽃빛맘으로 배부른 채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이었다, 모란도, 시골길도 그래서 잊을 수 없다. 나를 위해 아낌없이 꽃을 꺾어준 아버지까지도.


아버지의 집을 말하며, 마당 안의 우물이며 나무와 꽃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해 아버지가 마련한 시골집은 비교적 엉성한 품새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사실을 대학3학년 때 마루를 중심으로 잡은 시골집 사진을 보고서야 제대로 인지하게 되었던 나이다. ) 그런데도 아버지의 그 집이 팔릴 때까지 내가 속으로라도, 이 집 어수룩한데, 볼품도 없고, 하며 단점을 들춘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집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참 알뜰하고 소중한, 마음이 따뜻해져오는 그런 공간으로 여겨졌다.

돌이켜볼수록 시골집의 기억에선 어딘지 정성스러운 느낌이 묻어났다. 아버지만의 미적 감각이 지금도 기억의 뇌 속에 색감을 넣어주고 있는 듯, 집을 이루는 소소한 사물 하나하나가 은혜롭게 살아난다. 우물의 시원함, 텃밭의 푸름, 그리고 사랑스러운 꽃과 열매들. 붓꽃은 뒤뜰에 보라 점으로 피어났다. 붓꽃들 가운데로는 햇빛을 받아 윤이 반짝이는 장독대가 있고, 그 장독대를 지키고 있아담한 앵두나무. 자잘자잘 앵두꽃들이 피어 웃는가 하면 또 빨갛게 열매가 익어간다. 가을이 깊어지면, 그 앵두나무 옆으로 아버지는 김장독 세 개를 나란히 묻어두곤 했다.

그런가 하면 마을도 점점 생활이 편리하게 발전해갔어. 호롱불을 켜던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공동 우물물을 고쳐서 수도관도 이어졌지. 그래서 우리집 부엌에서도 수도꼭지를 켤 수 있었어.

한 해 두 해, 집도 마을도 사람살이에 맞춰 조금씩 고쳐지고 발전되어가는 그 진행 과정 속 어느 갈피엔가, 어디서 모란꽃 포기를 얻어 와 기쁜 마음으로 화단에 심고 있는 내 아버지가 있었 것이다.


집 마당은 아니었지만, 맞아, 아버지가 산에 만들었던 도라지밭. 도라지꽃이 별처럼 피어있던 걸 기억해.

도라지 꽃밭 아래로 샘이 파여 있고, 거기 오두막이 세워져 있었지. 아아, 맞아맞아.도라지밭도 옹달샘도 오두막도 다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낸 작품들이었던 거야.

이 또한 행복 아니냐?

참외를 샘물에 담가 놓았다가, 오두막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건네주면서 아버지가 물었지.


대학생인 아들이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나는 2015년부터 두 핸가를 중국의 강남,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인 항조우에서 혼자 지냈다. 그래서 주말의 공원 산책도 대부분 혼자일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공원 한쪽에서 총총총 피어난 희거나 보라인 도라지꽃들과 마주쳤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마치 아버지의 꽃밭을 다시 보게 된 것처럼 화들짝 피어났던 내 마음.


그런데, 어제는 내가 모란꽃을 그렸다.

그리 바쁘지 않은 생활에 게으름만 잔뜩 늘어, 뭘 해도 진득해지지 않는 내가 또 일을 벌였다. 집 근처 우리 민화 그리기 교실에 등록한 것이다. 완전 초짜가 들어온 걸 보고, 미술강사가 가는 붓 하나를 준다, 선 그리기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밑그림을 따라 그리면 된다고 하였다.

모란이네요.

밑그림으로, 모란꽃 송이가 환하게 피어있었다.


중국 오대산 쪽으로 여행을 갔을 때,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의 어느 불교 사찰에 들렀던 적이 있다. 같은 동아시아라고 해도 중국의 사찰은 한국과 여러모로 다르다. 그런데 정말 뜻밖이라고 생각했던 발견 하나는, 사찰 안쪽으로 상당히 넓다 할 면적의 모란밭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때가 10월이니 개화기가 이미 지난 꽃밭을 누가 신경쓸 것인가 싶었는데, 가을볕 아래 열심히 모란밭을 일구고 있는 스님들보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모란을 귀하게 여겼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고대 중국에서 모란은 사회 상류층만이 즐기는 꽃이었다고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기, 특히 북위(北魏)의 왕가에서 이 꽃을 선호했다고 전해지는데, 북쪽 왕실의 모란 사랑은 훗날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져, 맨 먼저 황실에서, 이후 점차 왕공 귀족들이 귀히 여기게 되어서, 모란은 궁성이 있는 도읍이나 대사원, 귀족의 정원 등에 경쟁적으로 심겨졌다고 한다.


특히 옛 도성 러양(우리나라에선 낙양이라고도 함)은, 수,당 왕조의 동경(东京)으로 일컬어졌던 바, 수나라 양제 시절, 러양의 황궁을 확장할 때는, 궁성 화원에 심을 모란으로 비래홍(飛來紅) 천외홍(天外紅)등, 진품을 헌상받아 심었다고 한다. 이런 수나라의 열풍이 당나라에 이어졌으니, 모란이 아니면 꽃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단다. 모란을 귀히 여김이 그 정도에 이르렀으니, 우리나라 역사문헌인 <삼국사기> 에 기록되었듯, 당 황제가 신라 왕에게 모란 꽃씨를 보내오고, 신라 왕이 진기한 그것을 가지고 공주와 대화하는 장면까지 펼쳐졌던 것이리라.


모란 꽃과 잎을 선 따라 그린다. 매일 설거지나 하고 빨래나 하며 둔해진 손가락으로 세필(細筆)을 잡고 선을 그린다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다. 그래서 마스크 쓴 입안도 콧속도 함께 긴장된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것이, 모란이라고 생각하면, 가을날 중국의 스님이 정성으로 가꾸고 있는 그 꽃밭에 핀 모란은, 어쩌면 그 옛날 북국의 황후가 눈길을 떼지 못했던 모란일 것이고, 또 어쩌면 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간직했던 한 자락 화려한 꿈의 세계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나는 점점 꽃이 간직한 인간의 열정에 빠져들고, 긴장감은 어느새 몰입으로 바뀌어갔다. 점점 붓질이 재미있어졌다.


어머, 잘 그렸네요.

본만 뜨는 연습에도 칭찬을 해주다니!

두 장의 연습지를 버리려다가 칭찬이 좋아 소중하게 챙겨서 집에 가져왔다. 그리고는 무슨 보물이나 되는 듯이 책상 가운데에 나란히 펴놓았다.


저녁 내내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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