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바구니와 신혼여행

축구공과 시집 한 권

by 새벽종 종Mu

30년 전의 일이다.

문학 수업 중 선생님이 한 말ㅡ어떤 분야에 성공하는 비결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일화로 차범근 선수의 신혼여행을 예로 들어줬다.


기억력이 원래 별로인 데다, 아주 오래전 들은 것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잊었지만, 요점은 차범근 선수처럼 신혼여행 갈 때도 축구공을 들고 가 연습할 정도이면, 그 사람은 성공한다... 이런 교훈이었다.


당시 창작교실에 모인 사람들의 꿈은 공통적으로 작가가 되자, 좋은 작품을 쓰자였기에, 선생님은 성공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신혼여행 갈 때 여행 가방에 책을 넣어 가지고 갈 정도면 됩니다. OO 씨라면 어쩌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네요.


맙소사!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날 문학 선생님이 OO 씨라고 굳이 내 이름을 지명한 까닭을...

올 여름에 발견한 숨은 보석 같은 책

그래서 신혼여행에 책을 넣어 갔냐고?

시집 한 권,ㅡ문정희 시인의 "찔레꽃".

그런데 문학 수업 때 선생님의 그 예언이 없었다면, 아마도 망설였을 것이다. 도대체 신혼의 밀월을 떠나며 책을 챙기는 게 맞는 건지.


그럼 여행 중에 그걸 펼쳐 보기나 했냐고?

펼쳐봤다.

호텔 조식을 먹는 시간, 신랑을 먼저 가 있으라 하고 한두 편 읽었다.


왜 그래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책장을 펼치려고 신랑 먼저 나가라 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남국의 아침, 방에 혼자 남아 있을 때, 시집이 생각났고, 이왕 들고 온 거 읽으려면 지금이다 싶어서 펼쳤던 거 같다.

밝히자면 모든 게 할 만해서 했을 뿐, 굳이 성공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그날 아침, 일대일(1:1)의 관계에서 비교적 소심한 편이었던 나의 신랑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방문을 닫고 나가며 혹시 잠시지만 쫓겨나는 기분을 맛보지나 않았을까. 그보다도, 신부에게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궁금하지나 않았을까. 방에서 혼자 뭐했냐고 궁금한 것을 대놓고 물어볼 줄 모르던 신랑이, 글을 쓰는 지금 새삼 떠오른다.


어쨌든 그 날 직접 실행해 보고 알게 된 사실은, 신혼여행은 단지 며칠이니, 신혼여행 중에 독서하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는 것.

감기라고 오늘도 지각, 그래도 모란 잎에 시간을 입혀주었다.

아가씨 적에 어느 일본 작가가 쓴 수필을 읽었다.

거기엔 주부의 시장바구니에 시집 한 권쯤 들어 있는 일을 가정하며, 일상 속에서 문화적인 삶을 사는 건 어떠냐고 묻는 내용이 있었다.


시장바구니 속의 책이라...

나는 여자이고 주부도 될 터라서 이 예가 맘에 들었다. 평범한 속에서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는 그럴듯한 풍격이 그 한 마디 안에 다 들어 있었다.

대찬동!


3,4년 전 여름, 여름 휴가로 지방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작은 배낭을 매고 한낮의 거리를 걷다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더위와 갈증을 식힐 겸, 오후의 반나절쯤 북카페에 앉아 있으면 책도 읽고 좋지 않을까?

마침 몇 발짝 앞에 자그마한 북카페가 보여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그 도시의 여행자이고 여름 한낮을 호젓하게 독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던 날이 장날이었을까.


카페 주인은 20대 중후반의 젊은 여성, 먼저 온 손님이라곤 그 여성을 찾아온 지인인 듯한 젊은 남성 하나.


둘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고, 시각의 입장(入场)이라서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손님에 대한 환대는 없었다.

인간사 그럴 수도 있는 일.

무심한 척 굴기로 했다.


적어도 나는 처음 들어간 곳의 잘 모르는 공기 속에 방해자는 되싫었다. 그래서 우선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줄 겸, 가방을 의자에 놓자마자, 책 좀 볼게요 하면서 카페 안쪽에 따로 진열된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북카페에 들어온 주요목적이 책이었으니, 거기서 읽고 싶은 책을 신중히 고른 다음, 자리에 앉아서 행복을 음미하듯 조용히 책장을 넘기면 될 일이었다.


읽을 책을 고르는 나와 상관 없이, 등 뒤로는 선후배 사이인지 조금이라도 썸을 일으키고 싶은 사이인지 모를 두 남녀의 말소리.


분명 연인 사이는 아니다. 다만, 손님으로서 내가 듣고 느끼게 된 바ㅡ남자는 어딘지 공적이고 담담하다면, 여자는 어딘지 살짝 들뜬 ㅡ 그동안 카페를 지키느라 많이 심심해서였든 북카페를 차린 상황을 과시하고 싶어서든, 지금 자신의 가게를 방문해 준 남성에게 맘이 쓰이고 있는 여자, 말소리만으로도 다 드러났다.


그런데, 여자 본인도 자신이 너무 상대에게 열중하고 있다는 걸 내심 자각했을까? 적어도 자신이 북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으로서 얼마나 어울리는지는 한번 보여주고 싶었을까?


이 책들은 손때가 묻으면 안 돼요!

갑자기 내 앞으로 와 정색을 하고 금지사항을 알리는 여주인.

누가 뭐래나?

깨끗한 내 양손에 귀가 있었다면 어안이 벙벙해질 노릇...


그것뿐이 아니었다.

내가 여남은 권 책을 끼고 앉아 책장을 한참 넘길 동안, 실내의 냉풍 방향은 내 쪽이 아닌 여자의 남자 손님 쪽으로만 가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남자가 일어서 나갔다. 남자를 보내고서야 여자는 제 자리(주방과 카운터가 있는 곳)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제야 생각난 듯이, 바람을 내 쪽으로 보내 주고. 물병을 들어 내 빈 물잔에 물을 채워 주고.

창과 커튼, 그리고 소품, 쇼윈도우

아까는 좀 더웠다고 말하니, 여자가 살짝 미안해했다.


어쨌든 그나마 목을 다시 축이며 좀더 시원한 실내에 머물 수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있다가 배도 고파오고 눈도 빡빡해져서 그만 나갈까 가방을 수습하는데, 모처럼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온다. 손님인가, 저절로 주의가 갔다.


오빠!

남자 하나 부인 하나, 아기 하나, ㅡ여자의 오빠 가족이었다.

들오자마자 오빠와 올케는 번갈아 카페에 손님은 많았는지 적었는지 물어보는 게, 여자는 카페를 차린지 얼마 안 되었고,가족들이 음으로 양으로 후원해주는 모양... (*그날, 오빠 부부에게 나라는 손님이라도 보여줄 수 있어서 여자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어쩐지 그랬을 것 같다.)


내겐 맞지 않는 같아.

이곳이 아니었다면 못 만날 책들도 있었고, 그것들을 읽은 건 좋았지만, 뒤돌아 보고 싶지 않다고...

문을 닫고 나오며 드는 생각.


가끔 나는 생각한다.

시장바구니에 시집 한 권뿐 아니라 논문집 몇 권쯤 넣고 다니는 건 습관이 되고 보면 사실 뭐 굉장한 일도 아니다.


내키면 어디든 주질러 앉아 책을 통해 이 세상과 내 이상의 접점을 찾아 사색하고 토론하고 하나도 어려울 거 없다.


하지만 이런 습관 아무데서나 내보일 일은 아니라고. 왜냐하면 일껏 고양된 기분을 망치면 안 되니까 말이다.


가장 운 나쁜 것은, 책은 책가방에라는 고정관념의 사람, 시장가방 든'아줌마'와 책을 도저히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예상과 범주를 벗어난 존재를 한사코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다. 마디로 말해, 내가 책을 읽는데, 책을 읽는 시간의 소중함을 전혀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방해하고 나서면 많은 소중한 것들이 훼손된다.


그러니, 우리는 독서의 묘미에 빠져들기 전에, 그곳이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곳인지 안심이 될 때까지, 들고 있는 시장 가방을 적당히 가리고 주위의 공기가 어떠한지를 조심조심 파악하고, 최고로 신중하게 정신을 고양시킬 최적의 공간을 찾아내야 한다.


물론 책이면 다 통하는 곳, 그런 책세상으로 도서관이 최고의 장소임이 틀림없지만, 올해는 2월 어느 날 이후부터 도서관을 찾을 수 없었다. 간혹 책은 빌려주기도 한다고 소식이 오나, 활짝 열리지 않은 도서관인 채로 벌써 10 개월째다.


그래서 말이다. 뒹굴뒹굴 남의 눈치 안 보는 집도 좋다. 그러나, 사람은 이동하는 동물이고 변화를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좋아하는 책을 들고, 혹은 책을 찾아서 어딘가를 간다. 그렇게 당신이 다다른 곳이 정신의 추억으로 고이 기억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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