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 귀뚜라미
새 시장에서 물고기 시장, 그리고 토끼 시장
일요일.
아들은 시장 세 군데를 구경했다고 했다.
애완동물로 파는 새들 중엔 앵무새 종류가 많더라고 했다.
물고기라면, 어항에 기르는 생물들이겠지.
토끼 시장은 의외다. 소리도 없이 오물오물 풀잎을 먹는 토끼, 토끼도 애완동물로 많이 키운다는 건가.
홍화문으로 이어진 담장나는 속으로 의아해한다. 아니, 홍콩은 땅에 비해 인구가 많아서, 보통의 경우 거주 공간이 비교적 좁고 복잡하다던데... 토끼도 길러? 견문이 좁으면 별 게 다 궁금하다.
그건 그렇고, 새 시장이라고 하니, 청두(成都)에서 두보초당 가는 길에 들렀던 새 시장이 기억났다. "당시(唐诗,당나라 때 지어진 시)를 외우는 새"ㅡ새장 앞에는 그렇게 쓰여 있기도 했다.
어휴, 중국의 새들은 급이 다르구나. 나도 모르는 한시를 외운다니...
사실 여부도 궁금했지만, 그보다 먼저 (과대광고일지라도) 애완동물 세계에까지 퍼진 문화 수준에 매료되었다.
아들이 초등 6학년이던가. 우리는 우연찮게 시안(西安)의 귀뚜라미 시장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귀뚜라미를 키우기도 한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알았다.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였다.
푸이는 나중에 중국 북부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실세도 없는 만주국 황제로 지내게도 된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범으로 옥살이도 겪고, 사면된 후엔 사회주의 신중국의 수 억의 인민 중 한 사람으로 평범한 생활을 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그런 평민 신분의 푸이가, 자금성(紫金城)을 참관하던 중에, 소년왕
시절 자신의 왕좌였던 의자 귀퉁이에서,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추억의 귀뚜라미집을 꺼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안 시장에서 귀뚜라미는 푸이의 영화로 하여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중국 이야기책에서, 옛날엔 귀뚜라미 싸움이란 놀이가 꽤 성행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귀뚜라미 기르기가 유행이 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도, 견문이 하나둘 쌓이면서 연결될 때가 있다.
햇살과 그림자ㅡ호원대 교정마지막 황제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주인공 푸이는 역사 속 실존인물이다.
창춘(长春)이었을 것이다. 기억이 아슴한 대로 만주국의 황궁인가에 들렀던 적 있다. 푸이가 무늬만 황제이던 그 만주국의 역사 자료를 전시한 곳이다. 전시된 사진 속에서 마지막 황후는 젊고 아리따운 자태였는데, 설명을 읽어보니, 일본군의 음모 때문인지 훗날 아편에 중독되다시피 했다고...
푸이가 평민으로 살 때는 평민 출신의 새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의 회고에 의하면ㅡ
푸이와 자금성을 견학할 때 일이라면서, 황제의 방 앞에서, 푸이가 저건 내가 오줌을 누었던 건데...라고 가리킨 것은 꽃병, 즉 방을 장식하느라 세워둔 화려하고 멋진 도자기 병이었다고.
푸훗, 정~말?
대부분의 관람객은, 나처럼 호기심으로 궁궐을 찾아 기웃댈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낼 것이다. 왕이 통치하던 시절 신분이 낮았으면 감히 들여다볼 엄두도 못 낼 곳에 자신이 들어와 있다고. 그리고는 새삼 "만민 평등"의 시절에 기분 좋아져서, 눈길 닿고 발길 닿는 곳마다 이제 막 왕족이나 된 듯 뭐든 알아둘 욕심으로 궁 안의 여기저기를 설치다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드물게라도, 민주 사회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궁궐이 집이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 푸이 황제처럼 궁 안에서의 사소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을 먼저 떠올릴 게 틀림없다.
영화 속 귀뚜라미는 그러한 특별한 과거를 지닌 인생의 특별한 추억을 상징하는, 낯설지만 아주 경이로운 소품이었다. 그 첫인상으로 하여, 시안 시장거리에서 작은 귀뚜라미와 귀뚜라미집들을 벌려놓은 좌판들은,마치 나에게 왕조의 역사를 들려주고자 존재하는 것처럼, 아주아주 오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시안의 교외에선 나무에 달려 익어가는 주홍빛 감들을 보고 한국이 그리웠는데...
그런데 있지, 아들.
내가 어딘가를 걷다가 기억 속에 비슷한 풍광을 떠올리잖아? 그럼 그곳이 대체 어디였는지, 언제 걸었는지 다 꿈처럼 아득하고... 너하고 참 많은 곳을 걸어 다녔구나.... 이런 기분에 잠기곤 해.
그~래?
이것이 일요일 밤, 우리 모자의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