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간혹 들르는 치킨집. 1인1닭.
그나마 외출을 삼가느라 거의 5,6주 만에 다녀왔다. 마침, 코로나19 방역단계 조정이 2.5급이냐 3급이냐 결정이 불안하던 주말 저녁이었다.
만일 3급으로 조정되면 가게문 열어요?
사장님이 닫을 거래요.
대답을 해 주는 알바생은 베트남 아가씨.
나는 그녀의 일을 걱정했다. 겨울이기 때문에. 한국의 겨울은 엄하다.
봄처럼 쉽지 않다.
못난 글씨지만 진심으로 나에게 말해주었다.겨울을 맞으면서, 누군가와 꽃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그때 우리는 여러 가지 꽃 이름을 들었다. 나팔꽃, 코스모스, 모란, 그리고 백련화...
꽃 이야기를 하게 된 동기는, 아마도 그가 자기 동네의 공원에 여름이면 백련이 핀다고 말해줘서였던 것 같다.
드디어 모란꽃 그림을 마치다. 14시간의 붓질 끝에 꽃술의 흰 점을 톡톡톡 찍는 것으로 .나는 올해 옥상 위에 코스모스를 길러봤는데, 처음이라 실수를 하면서 코스모스에 대해 한 가지 제대로 알았다고 말했다. 코스모스에겐, 꽃대를 허공에 높이 띄우고 나서야 꽃을 피우는 고상한 기질이 있더라고.
그리고 언젠가 피라미드에서 나온 나팔꽃씨의 후예를 선물 받은 적도 있다는 얘기를 했다.
중국 지린성 창춘(吉林省长春)에 사는 분이 일본어 통역을 하다가 받은 나팔꽃 씨를 내게 나눠준 것인데, 특별히 꺼내어 보여준 일본어 편지와 신문 스크랩에 의하면, 이 나팔꽃 씨앗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꽃씨의 몇 대 손에 해당한다는 것이고, 신문 속의 남자가 이집트에서 얻은 씨앗을 일본에 가져와 손수 키우면서 씨앗을 나눠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나 귀한 것을... 나로서 애석한 일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씨앗을 받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족보에 어울리는 좋은 땅에 심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심기를 망설이다가 급기야는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 번 심어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피라미드에서 나온 나팔꽃 씨앗이야기를 하자니, 문득 "보리와 임금님"이란 동화가 떠올려진다.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멋진 동화 이야기.
내 뇌리 속에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소년과 왕이 보리밭 앞에 마주친 순간이다. 그런데, 황금빛 보리밭 앞에 자랑스럽게 서 있는 소년과 몇 마디 나눈 이야기에, 이집트 황제가 화가 났다. 그래서 소년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겠다는 치졸한 마음으로, 소년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보리밭을 불태워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나는 황제.
세월과 함께 그 장면의 나머지 이야기는 희미해져서 어렴풋하지만... 오늘 복원해 보자면,ㅡ소년은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보리밭이 추수를 앞두고 몽땅 불태워지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을 소년, 그래도 소년의 가족은 절망하지 않은 듯. 이듬해 그 보리밭은 다시 황금빛을 이루었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땅에 대한 믿음과 곡물에 대한 감사를 품고 사는 농민, 왕이 벌인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이유로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리를 추수할 무렵 천하의 안하무인 파라오가 죽었다.
왕실의 중요한 장례 관습은, 피라미드에 묻힐 죽은 왕에게 수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부장품으로 준비하는 일인데, 그 품목 중 하나가 보리였다고. 죽음의 세계에서도 양식은 빼놓을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보리는 반드시 함께 갖춰져야 할 물품이었다. 그런데 왕과 함께 묻힌 보리알들은 우연하게도 소년의 밭에서 채취해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열었을 때, 그 안에 여전히 생명 있는 것은 보리 씨앗뿐. 살아서 그리도 대단했던 왕조차도 햇빛 아래 무상하기 그지없었으나, 보리 씨앗들은 세상에 나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고.
황금빛 보리밭을 가진 울 아빠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라고 했던 소년. 그 말을 가소롭게 여겨 보리밭을 태워 버리라 명령한 이집트 파라오,ㅡ그 순간에 소년은 작았고 왕은 거대했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나 다시 살아나는 보리가 증명한다. 소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피라미드는 영원하고픈 인간 역사의 건축물이다. 내가 잃어버린 나팔꽃씨는 (그러한 위대한 곳을 거쳐왔음에도) 이제 자신의 역사마저 잊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아, 사실 나의 잃어버린 나팔꽃 씨앗처럼, 역사상 수많은 왕공 귀족들이 적에게 쫓기느라 후손에게 조상의 영화를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 후손들은 지난날의 영예가 지워진 존재로서 삶이 펼쳐놓은 질곡을 걷고 또 걸으며 자신만의 새 역사를 창조하고자 무진 힘썼을 것이다.
어떤 학자가 밝히길, 현대 한국인이 스스로 믿고 있는 자신의 가문 이야기 중 상당수는 전 세기에 급조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해도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들이 지금 지어낸 가계도가 보여주는 그것보다 더 장엄한 영광의 보관을 머리에 썼던 핏줄이었을지 누가 아는가...
나 어렸을 적 아버지는 친지 어른들과 중대사업이라도 거행하듯 족보 복원 문제를 상의하곤 했었다. 열한두 살 무렵의 내 귀에도 그런 얘기를 나누는 아버지의 숨은 열정이 느껴져 왔다. 어느새 전염되었던 것일까. 나는 어느 날 가까운 친척 아줌마에게 우리 집 족보 얘기를 전하게 되는데. 아주 뜻밖이었던 것은, 평소 다정한 편이던 그 친척 아줌마가 갑자기 냉소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까짓 만들어낸 족보!
아주머니가 보였던 경멸하는 표정이라니. 한동안 영문을 몰라했는데, 나중에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아주머니의 친정은 왕족의 몇 대 손이라는 확실한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즉 족보를 타고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왕자의 신분인 선조가 있었다.
이렇게 등 뒤에서 비웃음을 당한 줄 알았어도 아버지 자신 그리 뜨끔했을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 나머지로서 조상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노력을 했던 것일 뿐, 족보로 허세를 부릴 속셈 같은 건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버지는 자신이 물려받은 성씨를 꽤나 긍지롭게 여겨서, 생전의 말씀 중에는, 경주의 박혁거세 제사에 참여한 이야기
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제사에서 아버지가 보았다는 박 씨 성의 국회의원이 여고 시절 잠깐 내 짝이었던 친구의 아버지였다는 사실. )
사실 나는 아무 상관없다.
왕족의 후예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내가 아는 누군가가 좋은 가문이라면 순수한 경탄 정도는 아끼지 않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현재, 보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니까.
왕족의 혈통은 뭔가 낫겠지, 교양이나 예의를 익혀도 일반인보다 훨씬 깊은 맛이 있겠지. 인간이 연마할 수 있는 우아한 예절,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격식, 그런 것을 존중한다. 가치롭게 여긴다. 당초 그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아주고자 족보를 소중히 여긴 것 아닐까.
그러나 사실 인간적 수양이 생략된 혈통 자체만으로 보자면, 그 가치는 생각보다 보잘것없을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덕성과 지혜로써 왕 노릇을 한 자도 적을뿐더러. 정적이 강하면 어제의 왕족이 노예로 하락하여, 심할 때는 그 성조차도 버리고 살아간다.
세상이 이러는 판에, 명문가 후손답게 인격수양을 하지 않고, 우리 집은 무슨 파니 몇 대 손이니 자랑하면서, 타인을 대함에 인품은커녕 상식도 없고 은혜를 갚기는커녕 배반이나 일삼으면, 일껏 보관해온 족보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15 년 전의 나의 아버지, 아버지 당신께 내가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자면, 나는 아버지가 20세기의 중엽을 고비로 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의식 밑바닥까지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의 능력과 진심을 다해, 부모형제와 아래로 2대 후손까지는 품을 묏자리를 마련해 둔 걸 일생의 긍지로 간직하며 돌아가신 것이야 아버지 자신의 선택이지만, 그건 엄연히 전근대적 발상 아닌가. (그게 아버지로선 최선의 사업이었다. 핵가족 위주로 살아가는 보통의 가장과 비교했을 때 나름의 이타적 성과라고 볼 수는 있으나, 보편적 이타주의라고는 할 수 없다. ) 그 때문에, 풍수지리 상 그 묏자리가 명당이라고 후손이 잘 될 거라고는 낙관을 가졌다 하나, 진정한 낙관주의하고는 거리가 있다. 이것이 나의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 속의 아쉬움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내가 좋아한 아버지는 따로 있다는 점이다. 나는
족보니 묏자리니 그런 관습에 젖은 아버지를 좋아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집안 여기저기를 손보고 마당에 꽃을 심고 과일나무를 가꾸고... 타인을 위해 베풀 수 있음을 오히려 즐겁게 여기던 아버지에 감탄한다.
미련스럽다 할 정도로 우리 집 엄마는 처음 한동안은 친정 남동생을, 훗날엔 성장한 아들을 끼고돌았다. 엄마가 그러는 바람에, 가족 속에서 아버지가 설 자리는 자꾸 협소해져 갔다. 그렇긴 하나, 외삼촌네는 매형으로서 돌봐줄 친척이라서, 아들네는 부모로서 지켜줄 후계라서 어떤 억울함도 묵묵히 참으며 누구 탓 한 번 한 적 없이 포용하던 그런 넓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이다.
물론, 가까운 친지 중엔, 자신의 처자식핵가족 외엔 모두 타자시하고, 자식과 형제들을 동등하게 대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쪽이었던 내 아버지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만들고자 한 배은의 남자들도 두엇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죽자마자 내 세상을 만난 듯 기고만장.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도 말해두고 싶다. 어깨에 힘을 주고 있는 당신들, 사실은 욕심부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른다. 타인을 진심으로 교류하는 충실감이 뭔지. 가난해도, 삶의 운치를 어떻게 살려낼 수 있는지. 표면상 똑같은 행복을 좇았는지 몰라도, 양보와 포용 없이 자기만족만을 구하는 마음가짐으로는 도저히 고상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 당신들에 비해, 나의 부친은 비록 무명의 가난한 서민으로서 소박하고 조촐하나마 인생과 자연 속에서 멋진 것을 발견하고 감탄할 줄 알았다. 그 점에서 당신들은 아마 죽을 때까지 흉내조차 못 낼 것이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다.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가신이의 진실을 아무렇게나 지우는 사람이 문제다. 다만 애석한 일이라면, 생전의 아버지는 골기(骨气)도 있었지만 반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마는 몇 번의 반복이 있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너무 외로워서 버티기 힘들다고 스스로 체념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래도 단언한다. 약해진 뒷모습을 보였다 해서 그의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뭉개는 그들에게, 돈 몇 푼 쌓아놓고 은혜를 입은 부모에게도 형제에게도 거들먹대기만 하는 그런 친지 부류에게, 내 아버지의 맑고 선량함을 없었던 일로 돌리는 것으로 자신의 양심을 가리려는 존재들에게 지금 내가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지 않고 오히려 우쭐대던 you,
제 손 안의 금전이 자신을 장식해줄 거라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그들이 함부로 부정하지만, 평범한 농민으로서 무학의 내 아버지가 일평생 일관하였던, 아무리 내 사정이 급해도 남을 짓밟고 올라설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태도야말로 더할 수 없이 고귀한 생활방식이다.
자신이 불리할 때나 유리할 때나 절대 이 신념을 허물 줄 몰랐던 한 남자의 우직함이 바로 그가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는 덕성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인간의 품격인 것이다. 이 고상함은 금전이나 지위나 학력으로 급조할 수 없는, DNA로도 계승되지 않는, 온전한 한 사람의 기운이다. 나의 아버지, 나는 딸로서 이러했던 삶의 향기를 기억해갈 것이다. (*여기서 나는 비난의 어조로 '그들'을 언급했지만, 나는 어느 면에서 '선악불이'를 믿는다. 즉 악도 크게 받아들이면 성장의 동력으로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여기는 편이다.)
원래는 어머니를 화두로 두고 시작한 글이나, 브런치의 지면에 끄적이는 중에 나도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추억들이 떠올라 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버지에 대해서 내가 아는 얘기는 너무나 적다.
어쨌든 늙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들 인생을 생각하며 브런치를 펼치기 시작한 지 어언 50일, 나는 매일처럼 일기라도 쓰듯, 휴대폰 얘기로 살아계신 어머니 얘기를 시작했고,
모란꽃 얘기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 사이, 엄마는 자신이 앉아 있는 좁은 방에서 모처럼 얻은 휴대폰을 통해 자신의 음성을 내보내고 다른이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며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 사이, 나는 매주 1회 2시간씩 민화반에 나가 모란꽃 세 송이와 잎사귀들에 색을 입혔다.
그 사이 늦가을 감기몸살이 찾아와 나는 찬바람이야말로 두렵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 사이 조카는 나를 불러 남산 둘레길 산책을 제안했고 나중엔 겨우내 마실 차 한 상자를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그 사이 나의 언니는 농장을 가진 장녀에게서 얻은 김치를 한 포기 덜어 주었다.
그 사이 내 방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호수"와 법정 스님의 "오두막"에 관련된 책들로 한가득해졌다. 나는 아프지만 늘 충만했고 뒹굴거리면서도 엄청 읽었다.
그 사이 기온이 차츰차츰 내려가고, 문밖에 놓은 의자엔 빗물이 고여 얼어 있었다.
그 사이 8월에 자주 갔던 동네 카페는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골목길에서 오며 가며 마주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바람이 무서운지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이렇게 겨울이 되었다.
나도 더 이상 싸돌아다니지 말기로 하자. 이제는 외출을 삼가고 벼르던 홀로 작업을 시작해야 할 때.
다행인 것은 엉덩이뼈가 많이 회복되었다는 점.
돌이켜보면, 지난 두어 달 많이 바빴다고 생각했는데 딱이 기억나는 큰일도 없다. 브런치에 39편 썼다는 기록과 모란꽃 민화 작품 하나. 그 외에 어쩌다 결실을 맺은 희소식 두세 개, 그러나 그건 여름 이전의 노고였다. 다 합쳐도 눈에 띌 것 없는 소소한 수확일 것이다.
이다음이 중요하겠지.
어쨌든 모란꽃 작품을 완성해서 기쁘다.
처음으로 그려본 모란 꽃송이 안에 아버지가 사랑한 인생, 그런 아버지를 소중히 여긴 딸의 마음이 있다. 나는 이 그림을 엄마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이제부터 모란꽃이 엄마를 위해 언제고 환하게 웃어줄 것이다.
가지고 있는 기운은 단단했으나 그게 본디 자신의 것인지도 모르고 사셨던, 이 세상에 욕심나는 건 많으나 한 번도 멋지게 꿰차 보지 못했던, 나의 고슴도치 같은 엄마. 심호흡을 하고 다시 보면 귀여운 데가 적지 않은 나의 엄마. ㅡ모란 작품은 엄마에게 딸로서 바칠 수 있는 가장 거창하고 화려한 축원이다.
나의 모란 그림이 엄마에게 따스한 위로와 안심으로 스미기를... 진심을 다해서 나는 소망한다.
딸이 엄마방에 모란꽃 족자를 걸어주는 것은 별 거 아닌 일일 것이나, 모란의 상징을 내가 아는 이상, 엄마가 생각하는 부(富)와 귀(贵)를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엄마 맘대로 꿈꾸면서 엄마의 하루하루를 밝은 맘으로 맞이하셨으면 하는 나의 축원인 것이다.
이것으로 되었다.
이제, 호기롭던 100세 어쩌고의 나의 가을 연재는 일단 구두점을 찍기로 하자. 우선은 여기까지. 기운을 회복하는 날까지 충전에 우선을...
버스가 광화문 앞을 지날때누가 되었든 약간이라도 기대를 갖고 나를 위해 기다려주면 좋겠다. 내가 지금 급한 것은 기력을 모으는 일. 그래서 하루가 될지 일 주일이 될지 이 주일이 될지 잠정적 휴면을 결정한다. 몸도 돌봐야 하니까~.
여기에 덧붙여 둘 말은, 이 세상 어떤 행복도 도달 즉 멈춤일 수는 없다는 점. 삶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길거나 짧은 휴식도 모두 전진을 위한 결단. 나 자신 꿈을 꾸고 누군가의 꿈을 북돋아주고 있는 지금 현재의 노력과 실감.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며칠이 될지, 어쨌든 나는 월동에 몰입하기로!
(*코로나 3급 어쩌고... 그런 마지못한 칩거가 내 월동의 의미일 순 없다.
자유를 막는 일에 아무도 마음 아픈 자 없고
자유가 막힘에 대하여 한 사람의 가슴에 깊은 사색이 새겨지지 않는다면 , 지구 상에 홀연 나타난
코로나 19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명과 그 병균과의 투쟁으로 2020년이란 한 해를 보낸 것이 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게 될 것 아닌가.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홀로여도 더 충실하게 견디겠다고 각오하는 게 맞다.
어떤 작업도 최후엔 협조 체계를 얻어 완성되겠지만, 모든 처음엔 홀로 자신의 씨앗을 틔워야 하는 법.
이제 나 자신은, 겨울날 땅속에 뿌려진 보리 씨앗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땅속이라도 춥다 싶은 날 누군가 와서 밟아 주겠지.
이렇게 이번 겨울은, 어떤 무자비도 자비로 받아들여 성장하는 보리의 심정으로 어디까지나 강하고 푸르게 견뎌내어 보자. 그러기로 하자.
(*두 번째 시작하는 작품, 코로나 3급 방역 통보와 함께 민화반 교실에 울리는 목소리도 어딘지 날카롭다. 견딜 것. 배움과 익힘이 늘 낭만적이지 않아도...)